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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디외의 질문⋯ '지식인, 그럼 당신은 누구이고 당신이 발디딘 곳은 어디인가?'
부르디외의 질문⋯ '지식인, 그럼 당신은 누구이고 당신이 발디딘 곳은 어디인가?'
  • 이상길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 승인 2018.09.17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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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읽는 신간_『아틀라스의 발: 포스트식민 상황에서 부르디외 읽기』 (이상길 지음, 문학과지성사, 2018.08)

서구에 대한 학문적 의존 구조의 성격과 원인, 그리고 극복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 전략에 있어서는 연구자들 간에 아직까지 뚜렷한 합의가 이루어진 바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토론을 위해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점들마저 없지는 않다. 두 가지 정도가 두드러져 보인다. 하나는 여러 객관적 지표상(해외 유학생 수, 학위의 국적별 가치 평가, 학술서 번역의 상호성, 지적 인정과 평가 기준, 연구자 및 교수 집단의 재생산체계 등) 국내 학계와 서구 학계 사이에 학문적 교류의 불균형과 비대칭성, 한마디로 일종의 ‘서구(특히 미국) 중심성’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제도적 불평등 구조가 지식 생산의 정신적인 수준에서도 서구 편향성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학계와 학문의 서구 의존적 권력구조는 언제나 학문 장 내 행위자들의 다양한 동기와 전략을 매개로 불안정한 재생산과 변환 과정에 놓일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해 그 구조는 일방적으로 강요되고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 안의 행위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축되며 따라서 변화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엄밀한 인식과 계몽된 실천을 통해, 우리 학문의 식민화 내지 주변화를 시사하는 부정적 현상들을 일정하게 통제하고 구조의 실질적인 개선을 도모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필수적인 선결 과제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론문화에 대한 분석과 성찰이라 할 수 있다. 지적 교류에서 중심-주변국 간 비대칭성은 학계 내 이론적 전통과 교육 프로그램의 형성, 연구자 성향 체계의 계발, 학문적 생산물을 조건 짓는 입장공간의 구성과 같은 이론문화 전반에 특수한 효과를 발생시키며, 이는 역으로 제도적 비대칭성을 계속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부르디외의 이른바 ‘성찰적 사회학(sociologie reflexive)’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체계적인 탐구를 가능하게 하는 지적 수단을 제공한다. 

더욱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부르디외의 사유 전체가 어떤 면에서는 ‘지식인과 그의 활동에 대한 급진적 비판’이자, ‘(지식인에 속하는) 사회학자로서의 근본적인 자기반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순수’와 ‘보편’의 외양을 띠는 학문적 지식조차 그 생산자인 지식인 집단과 결코 떼어놓고 이해되어선 안 되며, 사회 속에서 특수한 위치를 가지는 이 집단은 그에 따른 온갖 편협하고 지저분한 이해관심에 좌우되는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존재라는 점을 역설했다. 이러한 시각에서 부르디외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실천’과 그에 대한 지식인의 ‘이론’ 사이의 괴리를 최소화하는, 달리 말해 실제 현실에 좀 더 밀착한 사회 연구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끊임없이 자문하고 또 고민했다. 지식인의 스콜라적 관점과 자계급 중심주의에 대한 치열한 비판, ‘이론을 위한 이론’의 분명한 거부와 경험연구에 대한 완고한 집착, 성찰성과 참여객관화, 실천적 지식 양식에 대한 강조 등은 모두 그러한 과정에서 그가 내놓은 구체적이면서도 잠정적인 대답들이다.

그 답들이 얼마나 타당하고 또 유효한지에 대한 평가는 장차 우리 연구자들이 집단적으로 수행해가야 할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다만 여기서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의 ‘질문들’이 학문의 식민성에 대한 우리 학계의 오랜 고민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그 문제의식의 핵심이 무엇보다도 ‘지식의 보편성과 가치중립성에 대한 무비판적 가정 위에서 이루어지는 서구 이론의 무분별한 수용’과 ‘한국의 구체적이며 역사적인 현실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채 겉도는 사회 연구’에 있기에 그렇다. 그런데 부르디외는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첫걸음이 바로 지식인과 그 활동에 대한 사회학적 객관화에 있다고 보았으며, 자신의 사회학이 그러한 작업을 위한 개념적·이론적 도구들을 제공하는 연장통으로 쓰이기를 바랐다. 나아가 그는 지식 생산 실천의 이해관심과 맥락 구속성에 대한 사회학적 객관화 작업을 매개로, 우리가 더 객관적인 지식을 구축해나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부르디외에게 지식의 특수성(역사성, 지역성, 관점주의)에 대한 ‘메타(meta)’ 관점의 확보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진리도 없으며 모든 지식의 가치는 비교 불가능하다는 식의 상대주의나 허무주의로 귀결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사회학적 성찰성의 실천은 지식 구성에 그 한계에 대한 인식(칸트적 의미의 ‘비판’)을 통합함으로써, 오히려 지식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강화시켜줄 수 있는 일종의 ‘인식론적 보증’으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성찰적 사회학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띤다. 첫째, 사회학자가 한층 객관적인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위치와 관점에 대한 사회학적 성찰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이다. 둘째, 이렇게 획득된 과학적 지식은 공론장에 되돌려지면서 구성원들의 성찰성을 증진시키고 해방을 가져오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학은 지배체제를 탈신비화하고 각종 구조적 제약에 대한 행위자들의 인식을 확장시킴으로써 그 변혁 가능성을 제고한다. 그것은 “사람들의 자유, 행복과 자기완성에 대한 정당한 열망을 무수히 침해하는 진정한 사회경제적 결정 요인들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것을 통제하고 극복할 수 있는 지적 힘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지식으로 무장한 사회 세계는 스스로 수행했던 것을 해체할 수 있다.” 사회학 장은 이처럼 사회가 스스로에 대해 성찰성을 발휘하는 거대한 심급으로 작동하는 셈이다.

부르디외 사유의 이러한 특징들을 고려해볼 때, 그에 대한 연구는 외국과 비교해 심각한 담론 부족 상태에 있는 저자 한 명을 우리 이론문화 안에 본격적으로 편입시키는 차원을 넘어선다. 지식의 역사성과 맥락 구속성에 대한 부르디외의 예민한 인식, 그리고 경험 세계에 최대한 정합적인 사회 연구에 대한 모색이 우리 학문의 서구 중심성을 지양하려는 국내 학계의 문제 제기와도 통하는 면이 있다면, 그가 제시한 ‘성찰적 사회학’이라는 답안 역시 진지한 검토와 논의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부르디외에 대한 이론적 연구는, 역설적이지만 우리 학계가 탈식민적 지식 생산을 위한 한 가지 유력한 방법을 비판적으로 전유하는 과정으로서 의의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부르디외가 콜레주드프랑스의 마지막 강의에서 썼던 비유를 빌리자면, 성찰성이란 “세계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아틀라스의 두 발이 어디를 딛고 있는지” 질문하는 일이다. 우리가 성찰성을 그토록 중시한 부르디외의 이론에 충실한 방식으로 그것에 관해 말하려면, 그 이론을 논의하는 우리의 두 발이 과연 어디를 어떻게 딛고 있는지 끈질기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상길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파리5대학 사회학 박사. 파리1대학 철학과 DEA 과정 수료. 공저로는 『커뮤니케이션학의 확장』, 『근대 한국의 일상생활과 미디어』, 『한국의 미디어 사회문화』 등이, 역서로는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 『헤테로토피아』, 『근대의 사회적 상상』, 『비장소』(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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