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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낯선 얼굴을 환대해야 한다는 실존적 책임윤리
타인의 낯선 얼굴을 환대해야 한다는 실존적 책임윤리
  • 윤대선 경기대·교양학부
  • 승인 2018.09.10 14: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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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읽는 신간_ 『레비나스의 타자물음과 현대철학』(윤대선 지음, 문예출판사, 2018.08)

레비나스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는 타인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서로에 대한 경외와 책임감을 발견하는 곳에 있다. 어쩌면 나를 제외한 타인들 모두와 나의 생명이 있도록 만든 종적인 관계가 없다면 나의 존재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주체는 타인들에 대한 빚이 있다. 그의 이 말을 기억하자. “인간은 이미 완전하게 만들어진 우주 안에 들어왔고, 벌 받은 첫 번째 존재다. 인간은 자기가 하지 않은 것에 응답해야 한다. 인간은 우주에 대해 책임이 있고 피조물들에게 볼모로 잡혀 있다.” 그래서 레비나스에게 있어 모든 존재는 생명을 가진 소중한 존재이며, 또 앞선 존재들에 대한 책임감을 요구받는다. 나와 타자의 관계는 이미 다르지가 않다. 예컨대 나의 얼굴이 눈앞의 거울에 비춰지듯이, 타인의 얼굴이 바로 나의 얼굴이다. “주체는 (타인에게 붙잡힌) 볼모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 사회 공동체는 운명 공동체다.

은신처의 상실과 유토피아적인 편재

나와 타인들이 모인 그런 열려진 공동체는 생명과 운명 그리고 사랑을 함께 나누는 곳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그들 사이의 얼굴들 가운데서, 각자의 자아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런 작은 공동체는 그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다. “나, 말하자면 타자들에 대해서 ‘나 여기에 있다’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자리 또는 존재 안의 은신처를 상실한다는 것이며, 유토피아적인 편재에 들어서는 것이다.” 사실 ‘나 여기에 있다’라는 것은 신 앞에 숨을 곳이 없는 실존을 의미하지만, 실제적으로는 타자들 가운데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함께 있는 곳에서 이미 유토피아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서로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곳이 최초로 시작한 원점이 바로 가족이며, 이곳의 가까움이 이웃으로, 지역으로, 사회로 확대되기를 바라는 것이 레비나스의 생각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타인들에게의 ‘가까움’을 지향하는 사회성은 유아론적 주체의 배타성을 극복하고 타자의 관계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주체성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얼굴은 낯선 얼굴이며, 이미 가족의 얼굴을 넘어 이웃의 얼굴이다. 얼굴에 관한 레비나스의 지대한 관심은 주체의 사회적 실존과 그 책임성을 일깨우는 것으로, 그 얼굴이 이웃한 나의 자아인 이상은 주체는 타자에게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그와의 일체를 이미 구성한다. 그리고 그 얼굴은 내가 만났던 모든 사람의 얼굴로 같은 얼굴은 없다. “타인의 얼굴은 환원되지 않는 차이인데, 나에게 부여되고 나에 의해 이해되며 나의 세계에 속하는 모든 것에 뜻하지 않은 출현을 일으킨다.” 타인의 얼굴에 의해 나와 타인 사이를 끈끈히 묶는 유대는 타자성에서 비롯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며, 나 자신성은 타자에 대한 가까움 또는 타자성을 통해 타자와 함께 이미 묶여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타자에 대한 책임감을 갖게 하는 원천적인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대체될 수 없는 주체의 일체성은 타자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소환에 놓여 있다.” 즉 주체는 타자에 대해 이미 파기될 수 없는 그와의 일체를 구성한다. 따라서 우리는 타자에 대한 인간의 가치가 인간에 대한 신의 명령으로서 요구된다는 종교적 차원에 대한 이해를 떠나 실존적 공동체가 윤리적으로 가져야 할 나와 타자 사이의 인격적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런 관계가 우선시되는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인 셈이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을 분석하면서 데카르트 이후 중시했던 사유 주체로서의 주체성에 근본적인 이견을 제시한다. “볼모로서의 주체성, 이 관념은 자아의 현존이 철학의 시작이며 완성으로서 나타난다는 입장을 전도한다.” 그 얼굴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코기토와 같은 진리의 명백함인데, 왜냐하면 얼굴은 신적인 창조의 질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얼굴은 데카르트적인 합리주의를 지지했던 신적인 진리성과 같은 명백함을 가능케 하는 명백함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이미 실존적인 공동체의 암묵적 질서 가운데 나 자신성을 구성한다. 따라서 타인의 얼굴을 통해 여기저기서 발견될 수 있는 디아스포라의 윤리는 사회성을 떠날 수 없는 주체의 윤리를 확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의 낯선 얼굴을 환대해야 한다는 실존적 책임윤리를 발생시킨다.

레비나스의 돈독한 탈무드 읽기

“나 자신 속의 무한의 관념 또는 신에 대한 관계는 타인에 대한 관계에서 오는 구체성과 이웃에 대한 책임감인 사회성에서 찾아온다. 그 책임감이란 어떤 경험에서도 포착할 수 없던 것이며 다만 타인의 얼굴과 그 타자성, 그 낯섦 자체에서 오는 것으로서 내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오는 명령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한의 관념과 구체성을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까? 레비나스는 탈무드를 읽으면서 신의 말씀과 여기에 얽힌 앎을 통해 신적 존재의 무한성과 인간에 대한 영적인 인도를 얻고자 한다. 그래서 그의 탈무드 읽기는 매우 돈독하다. 그런데 그는 마치 삶 속의 탈무드와 같은 타인의 얼굴을 통해 신의 무한성과 계시를 보고자 한다. 그 얼굴에 삶의 진리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무한성이 그런 낯선 구체성에서 현시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에게 이방인과의 만남은 하나의 신비적 체험과 더불어 책임의 윤리를 절대적으로 요구한다.

다문화 사회 공동체는 나와 타인들이 함께 실존하는 공공세계로서 존재한다. 이것은 나와 가깝게 이웃한 삶의 세계이며, 나와 타인들 사이의 책임관계를 요구하는 세계다. 따라서 이런 세계에서 통용될 수 있는 삶의 가치는 타자와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윤리를 요청하며, 이런 가치는 사회 공동체가 추구하고자 하는 선의 가치를 타자 중심에서 새롭게 구성한다. 그런 세계에서 ‘나’의 정체성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성립되기 때문에 나와 이웃의 관계는 이미 낯선 타인의 관계가 아니다. 레비나스에 있어서도 자아는 이웃한 자아다. 즉 자아의 정체성과 윤리적 보편성은 이웃한 타인들과의 사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웃의 얼굴은 모든 자유스러운 합의, 모든 협정, 모든 계약에 앞서면서 기피될 수 없는 책임감을 나에게 의미한다. 그것은 표상을 벗어나는 것이며, 현상성에서의 이탈 그 자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가치의 중심은 나와 타인들 사이의 파기될 수 없는 실존적 관계와 책임감을 수반하며 존재한다. 우리는 이런 가치를 공공의 윤리로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윤리는 나와 이웃한 타인의 얼굴에서 시작한다. 마치 그 얼굴은 우주론적 이치를 비추고 있는 살아 있는 이성과 같으며, 모든 윤리가 최초로 시작하는 성스러운 장소이기도 하다.


* 윤대선(경기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고려대학교 철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파리1대학 철학과 DEA 과정 수료. 파리10대학 철학 박사. 저서로는 『레비나스의 타자철학』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레비나스의 타자로서의 주체물음과 정신분석학>, <상상과 치유, 행복의 가치로서 현대미학 이해하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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