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적 성찰은 철학적 무중력 상태의 돌파구가 될 것인가
회귀적 성찰은 철학적 무중력 상태의 돌파구가 될 것인가
  • 교수신문
  • 승인 2018.09.10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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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철학적 사유의 갈래』(노양진 지음, 서광사, 2018.8)

책에서 필자는 동·서양의 철학사를 통해 드러난 다양한 철학적 이론들을 인지적 본성에 따라 ‘초월/선험적 이론’, ‘해체론적 이론’ 그리고 ‘경험적 이론’으로 구분했다. 이러한 세 갈래 구분은 필자가 옹호하는 체험주의(experientialism) 시각에 근거한 것이며, 필자는 이 구분을 토대로 초월/선험적 이론이나 해체론적 이론이 경험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근거해서 확장된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의 유형들이라는 사실을 밝히려고 했다. 이러한 시도는 철학 이론의 본성과 구조에 대한 인지적 분석에 근거한 것이다. 철학 이론은 스스로 존립하는 실체적 질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해의 산물이며, 그 이해는 인지 과정의 한 국면이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빠지게 되는 ‘초월의 역설’
체험주의에 따르면 우리 경험을 넘어선 초월/선험적 이론은 은유적으로만 구성되며, 동시에 은유적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초월/선험적 이론은 ‘절대성’을 향해 구성되지만 그것들이 은유적 구성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처음부터 그 ‘절대성’이 허구라는 것을 함축한다. 이러한 비판은 니체나 데리다에게서도 이미 찾아볼 수 있지만 서양철학 이론에 대한 체험주의의 은유적 분석은 훨씬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이다. 이러한 체험주의적 시각을 토대로 필자는 존재론적이든 인식론적이든 윤리학적이든 우리 경험을 넘어선 것에 관한 모든 이론이 필연적으로 ‘초월의 역설’에 빠지게 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초월의 역설은 초월/선험적  이론이 본성적으로 철학적 정합성을 유지할 수 없는 ‘열망’의 산물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이처럼 비정합적인 열망이 ‘절대’라는 이름을 얻게 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에 대한 왜곡이나 억압을 수반한다. 절대 이론의 폭력성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초월/선험적 이론은 절대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표출하는 은유들의 묶음이며, 따라서 그 열망은 ‘철학’이 아니라 사적 희망으로 남아야 한다.

한편 필자는 체험주의의 은유 이론에 의존해서 ‘그림자 개념’(shadow concept)을 새롭게 구획했으며, ‘해체론적’이라고 불리는 이론들이 이 그림자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림자 개념은 경험적인 모든 것을 한데 묶고 그 경계선 또는 밖에 설정된 개념이며, 따라서 경험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는 ‘비어 있음’으로 특징지어진다. 해체론적 이론들은 이 그림자 개념을 축으로 우리의 경험 세계를 해체하거나 분석하려고 시도한다. 그림자 개념의 비어 있음은 결코 스스로 개념화될 수 없으며, 반드시 우리 경험 세계 전체를 하나로 묶고 그것을 넘어서는 인지적 과정을 거쳐서만 개념화될 수 있다. 이처럼 그림자 개념은 경험적인 것에 대한 인식에 의존해서만 개념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그림자’다. 각각 다른 철학적 결론을 향하고 있지만 데리다의 ‘차연’(diff?rance), 용수의 ‘空’, 老子의 ‘道’는 그림자 개념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모두 해체론적 이론이다.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초월/선험적 이론이나 해체론적 이론은 모두 경험적인 것을 토대로 은유적으로 확장된 것들이며, 따라서 그것들은 고도로 추상화된 철학적 사고실험의 유형들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사고실험이 추상적 층위의 인지작용을 통해 구성되며, 또한 모두 경험적인 것을 토대로 확장된 인지적 국면이라는 점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사고실험의 본성을 해명하고 평가하기 위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궁극적 지반은 경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 지반에는 우리의 몸과 두뇌, 그리고 그것들과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하는 환경이 있다.

필자의 이러한 체험주의적 논의의 배경에는 ‘자연주의’(naturalism)라는 철학적 시각이 자리 잡고 있다. 자연주의는 존재론적이든 인식론적이든 윤리학적이든 초자연적인 모든 것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흔히 환원주의나 물리주의라는 말과 동일시돼 철학의 敵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두 가지 유형의 자연주의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흔히 철학의 적으로 비판의 표적이 된 자연주의는 ‘과학적/환원적 자연주의’다. 상위적 질서가 하위적 질서로 환원될 수 있다는 입장이 그것이다. 필자가 옹호하려는 자연주의는 상위적 질서가 하위적 질서에서 비롯되지만 그 창발적 특성 때문에 하위적 질서로 환원될 수 없다는 비환원주의적 입장이다. 필자는 이러한 입장을 듀이의 개념을 빌려 ‘창발적 자연주의’(emergentist naturalism)라고 부른다.

낡고 오래된 시각, 자연주의의 질문
사실상 자연주의는 정교한 논변을 통해 적극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할 이론적 구성물이 아니라 공허한 사변의 베일을 걷어내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될 낡고 오래된 시각이다. 이렇게 드러나는 자연주의는 우리에게 초월적 청사진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주의는 사변의 혼미를 겪은 우리에게 철학 이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기보다는 현재와 같은 몸을 가진 유기체로서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인지를 다시 묻도록 권고한다. 이러한 물음은 ‘우리가 원하는 것’에 대한 선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에 대한 해명을 향한다. 그래서 자연주의의 옹호는 사변철학자들의 우려처럼 철학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철학의 출발을 예고한다. 새로운 철학은 경험적인 것을 온전히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인 것의 확장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며, 이 때문에 경험적인 것에 의해 반박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그것이 레이코프와 존슨(G. Lakoff and M. Johnson)이 말하는 ‘경험적으로 책임 있는 철학’(empirically responsible philosophy)의 모습이다.

지난 세기 초월과 해체의 거친 충돌은 철학적 무중력 상태를 불러왔다. 초월/선험적 이론은 스스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너졌으며, 해체론적 이론은 스스로의 가벼움 때문에 외면 받게 되었다. 필자는 이 상황을 우리 자신의 ‘크기’(size)에 부합하지 않는 과도한 이론화와 그 반작용의 필연적 귀결로 봤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연주의의 한 갈래인 체험주의는 현재와 같은 몸을 가진 유기체로서 우리 자신의 ‘크기’에 부합하는 새로운 이론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제안한다. 필자는 이러한 제안이 여전히 초월과 해체 사이에서 모호하게 흔들리는 우리 시대의 지적 분기 상황에서 더 이상 비켜서거나 외면할 수 없는 새로운 지적 도전이라고 본다.

이 책에서 철학적 이론들의 인지적 본성에 대한 필자의 해명은 다양한 사변적 이론들을 자연주의적 지반으로 환원하거나 수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공유하는 공통지반, 즉 경험적 지반으로부터 어떻게 확장돼 마주치고 갈라서는지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이러한 해명은 마치 공약 불가능한 것처럼 유포되고 교차돼 왔던 철학적 이론들이 어디에서 새로운 대화의 접점을 찾을 수 있으며, 또 찾아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 그 대화는 사변의 경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모든 이론들이 공유하는 경험적 지반에 대한 회귀적 성찰을 통해서 열리게 될 것이며, 그것은 다시 우리 자신의 ‘크기’에 부합하는 새로운 이론들을 탐색하는 데 결정적인 교두보를 마련해 줄 것이다.


 

 

노양진 전남대·철학과
미국 서던일리노이대에서 언어철학으로 박사를 했다. 대표 논문으로 「념체계의 신체적 기반」이, 대표 저서로 「몸·언어·철학」 등이 있으며, 한국철학회와 범한철학회에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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