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索은 없고 檢索만 있는 시대에도 기초는 사람” … “지식 팔러 다니는 사람은 교수 아니야”
“思索은 없고 檢索만 있는 시대에도 기초는 사람” … “지식 팔러 다니는 사람은 교수 아니야”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8.09.10 13: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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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_ 계간지 『황해문화』 100호 펴낸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노동, 문화, 재단이 합쳐진 대한민국 최초의 시민재단은? 새얼문화재단(이사장 지용택)이다. 1975년 새얼장학회로 출발해 1983년 지금의 새얼문화재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지금까지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인천을 거점으로 활발한 문화활동을 펼쳐왔다. 전신인 새얼장학회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새얼문화재단은 그간 성적이 뛰어나거나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처지의 학생들 장학금을 지급해왔다. 매월 두 번째 수요일 아침 각계 전문가를 초청해, 사회 제반 문제에 대한 관심과 제고, 이해를 넓히는 토론의 광장으로 유명한 ‘아침대화’도 400회를 목전에 두고 있다. 뿐만 아니다. 예술공연사업으로는 매년 뛰어난 음악인을 초청해 봄에는‘국악의 밤’(2018년 26회)을, 가을에는 ‘가곡과 아리아의 밤’(2018년 35회)을 개최한다. 전국 초중고생과 어머니들을 대상으로 한 새얼전국백일장을 개최해 입상자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며, 입상작품집 <새얼문예>를 발간한 지도 33년째다. 조상의 얼과 숨결을 찾아가는 새얼역사기행을 통해 우리 국토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는 일도 꾸준히 해나가고 있다. 인천과 국가 문화 발전에 헌신한 분들에게는 새얼문화상을 수상한다. 제1회 수상자로 우현 고유섭 선생이 선정됐고, 석남 이경성 선생 등 수상자의 동상 혹은 흉상을 제작해 인천시립박물관에 기증했으며,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광장에 우리의 염원인 통일을 노래한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이 노래비는 우리나라 최초로 악보와 가사를 새긴 노래비다. 또한 지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져 전국으로 발신되는 잡지 <황해문화>를 펴내고 있는데, 이번달 드디어 <100호>를 발간했다. <황해문화> 발행인이자 새얼문화재단의 수장으로 이 모든 사업을 이끌고 있는 지용택 이사장(사진·82세)을 만났다.
 


인터뷰 일시: 2018년 9월 4일 오후 2시
대담: 윤상민 편집국장
cinemonde@kyosu.net
사진 제공: 새얼문화재단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 한국노총 사무총장, 전국자동차노동조합 위원장 등을 역임한 노동계의 대부였다. 준법투쟁 이론을 적용해 버스 기사들의 임금을 인상시켰고, 최초로 운수업계에서 퇴직금을 수령하도록 했다. 한화갑, 조흥래 등 함께 노동운동을 하던 동기들이 정계로 간 이후 문화 운동으로 전향해 현재까지 새얼문화재단을 이끌고 있다. 현재 『황해문화』 발행인, 송암문화재단 이사, 인천학연구원 자문위원장, 인천시립박물관 운영위원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 『장강을 넘어 역사를 넘어』가 있다. 19183년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八旬을 목전에 둔 나이임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다독가다.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 한국노총 사무총장, 전국자동차노동조합 위원장 등을 역임한 노동계의 대부였다. 준법투쟁 이론을 적용해 버스 기사들의 임금을 인상시켰고, 최초로 운수업계에서 퇴직금을 수령하도록 했다. 한화갑, 조흥래 등 함께 노동운동을 하던 동기들이 정계로 간 이후 문화 운동으로 전향해 현재까지 새얼문화재단을 이끌고 있다. 현재 『황해문화』 발행인, 송암문화재단 이사, 인천학연구원 자문위원장, 인천시립박물관 운영위원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 『장강을 넘어 역사를 넘어』가 있다. 1983년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八旬을 넘긴 나이임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다독가다.

 

△ 한국 최초의 시민재단을 설립하시고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중이십니다.
“장면 총리가 인천 사람이고, 죽산 조봉암 선생도 인천사람이었죠. 경제적으로도 발전이 어려웠던 시절인데, 사람들이 술 한 잔 먹으면서 ‘인천에 뭐 정체성이 있어?’라고 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게 참 가슴이 아팠어요. 이걸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새얼문화재단을 만든거죠. 1975년에 그 전신인 새얼장학회를 만들었지만, 사실 그 3년 전부터 사람들은 만나서 재단에 대해 설명했어요. 그런데 친구들도 이해를 못해. ‘니가 돈 달라면 주겠는데 문화재단? 시민재단이 뭐야?’이러면서 말이죠. 3년간 설명과 설득의 과정을 거치고 1975년에 깃발을 들었더니 1천200명이 사인을 해 준 거요. 이렇게 시민들이 만든 돈으로 만든 재단은 대한민국 처음 아니오. 그래야 그게 인천의 뿌리가 될 것 같았소. 대한민국에서 시민재단 첫 번째다. 인천시민이 위대한 것이구나. 근로자가 아니라 시민들이 돈을 모아 시작했기에 이건 인천의 뿌리고 정신이고 문화라는 생각으로 문화운동을 시작한 겁니다.”

△ 새얼문화재단은 ‘새얼아침대화’, ‘백일장’, ‘국악의 밤’ 등 많은 사업을 진행하는데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하나 소개해 주신다면요.
“너무 많은데…. 2000년이었나요, 「그리운 금강산」노래비를 건립한 게 기억나네요. 악보가 들어간 노래비는 처음이고 세계에서도 제일 크다고 기네스북 측에서도 등재요청이 왔는데 안 했죠. 각을 한다고 하죠. 그 악보를 돌에 새긴 분이 한국에서 최고의 실력자인데 이런 이야길 하더라고요. 자기가 수많은 돌에 각을 했지만 자기의 이름이 들어가 본 적이 없다고요. 그래서 ‘이봐, 내가 당신 이름 넣어줄게’했어요. 대신 조건으로 깊이 파달라고 했어요. 가보시면 알겠지만, 손가락 두 마디 가까이 들어가요. 다른 비들이 세월이 지나 각한 글자가 희미해지는데 우리 노래비는 안그래요. 역시 사람은 자기와 관계가 돼야 해요. 그게 중요한 거요.”

△ 백일장에도 애정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중앙정부나 시정으로부터 단 한 푼 받아본 적이 없어요. 30년 넘게 백일장을 하며 문집도 내고 하니 자격조건이 돼서 국무총리상, 장관상도 얼마든 받을 수 있죠. 하지만 장원이면 됐지, 뭐가 필요합니까? 장원이면 대통령상보다도 높은 거죠. 이사장상도 없앴어요. 올해 35년째이니 한 세대가 바뀌었어요. 초기 상 받은 김금희 소설가가 우리 백일장 출신이고 인천 작가죠. 이제는 심사위원으로 백일장에 참가해요.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거예요. 백일장 수상 작품을 모아 <새얼문예>라는 책을 내고 있는데요, 뒤 50페이지 정도를 부록으로 참가했던 아이들 학교랑 이름을 넣어서 우편으로 학교에 다 보내줘요. 선생님들에게서 연락이 옵니다. 애들이 이 책 받는 날은 하루 종일 자기 이름 인쇄된 이 책을 들고 다닌다고요. 그게 긍지죠. 다 소설가 만들 거 아니잖아요. 긍지 불어넣어 주는 거죠. 이게 진짜 중요한 거예요. 사람을 귀하게 생각하는 것. 5천 명 가까이 참여하니….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요즘은 3,4,5학년 학생들 참석률이 좀 떨어지는데, 그게 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 계간지 <황해문화>는 어떻게 시작하신 건가요?
“그냥 만들고 싶었어요. 잡지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요. <청맥>은 초판부터 다 있어요. <창비>도 다 사 모았고요. 황해라는 이름을 넣은 건 황해가 아시아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황해가 평화로우면 한국이 평화로워질 거라는 막연한 생각도 있었고요. 거대한 이데올로기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 <황해문화> 100호가 나오기까지 편집에 일절 관여를 안 하셨다던데요?
“발행인이 편집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을 갖고 있죠. 나이도 많은 사람인데, 내가 젊은 교수들이나 학자들 이야기하는 걸 따라갈 수도 없고요. 그래서 전혀 관여 안 하죠. 편집만은 자유스럽게요. 사람을 믿고 하는 겁니다. 지난번 최영미 시인의 작품 3편이 실렸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제가 고은 시인과 40년간 알고 지내 친분이 두터웠지만 어쩌겠어요. 편집부가 결정한 일인데요. 대신에 우리 규모에서 <황해문화>를 발행하는 게 돈이 많이 드는 일 아니겠어요? 편집부가 돈 걱정 안 하게 하는 게 제 일이죠.

△ 40년간 수많은 사업을 진두지휘하셨지만 본인을 잘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가곡과 아리아의 밤’ 행사를 하면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서 있는 사람도 많죠. 서 있는 사람이 있으니 앉은 사람은 불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실수요. 오랜만에 왔는데 뒷자리라고 불만이 있을 수도 있거든요. 저나 집사람이나 이때까지 음악회에서 앉아서 음악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서 계신 분들께 직원들이 죄송하다고 인사할 때, 이사장인 나도 뒤에 서 있다고 할 말이 생기잖소. 스스로 특권층이 되는 걸 경계하기에 VIP라는 단어를 새얼문화재단에서는 절대 쓰지 않아요. 노동자들, 몸을 써서 일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의 배려를 늘 생각해야죠. 또 하나, 우리가 모시는 분들에게는 꽃을 달아드리지만, 감사패를 드리는 저는 꽃을 달지 않습니다. 왜 달아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 사람을 중요시 여기시는 이사장님의 철학의 바탕은 무엇인가요?
“사색은 없고 검색만 있는 시대 아니오? 알고리즘, 경영 등등 말로들은 그러는데 기초가 사람입니다. 동양철학이 서양철학한테 이길 수 있는 건 동양철학이 사람을 중심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많은 책을 읽었지만 『논어』가 상식의 집합인데, 상식을 기초로 한다는 건 사람을 기초로 하는 것이죠. 사람을 기초로 하지 않으면 상식이 있을 수 없소. 이게 여든두 해 인생을 살면서 알게 된 내 생각이오. 사람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것 말이오.

△ 지방대학은 어렵고 교수들도 인서울 대학에서 일하길 원하는 게 요즘 현실입니다.
“좋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좋은 도시입니다. 아파트 짓고 높은 빌딩 있다고 좋은 도시가 되나요? 인하대나 인천대나 마찬가지인데, 교수들이 학교 수업 끝나면 학생들을 안 보고 바로 서울집으로 돌아갑니다. <황해문화> 편집주간들은 인천에 살아요. 얼마 전에 인하대 총장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때 이렇게 말했어요. 앞으로 교수 뽑을 때, 인천에 사는 걸 조건으로 하라고. 그래야 그 교수들이 인천 촌놈들과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해야 그게 쌓여서 문화가 되는 거 아니오? 문화는 세습되는 게 아닙니다. 복습하는 거요. 연습하는 거고. 내 철학은 그렇소. 문화가 어떻게 세습이 됩니까? 그 시대 사람들이 그걸 복습을 해야 하고 좋은 전통을 행동으로 옮겨야 문화가 뿌리를 내리는 거죠. 교수란 사람이 와서 강의 끝나고 버스 타고 서울 가면 누가 교수요. 그 사람은 자기 지식을 팔러 온 거지 의미가 없소. 인천 촌놈들과 저녁에 술도 하고 학생들과도 하고 해야 토양이 좋아지는 게 아니오. 사실 그런 사람들은 교수 자격이 없는 거요. 지식을 팔러 다니는 사람이지 교수가 아니오. 교수라면 그 지역을 사랑하고, 책임을 느끼고, 제자의 앞날을 생각하고, 그게 교수지요. 지식 팔려면 핸드폰만 가지고 다녀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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