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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심언어' 영어를 외면한다면
'초중심언어' 영어를 외면한다면
  • 박준언 숭실대·영어영문학과/한국외국어교육학회장
  • 승인 2018.09.10 10: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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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세계 중심국가로 나아갈수록, 우리 사회에서 영어 사용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영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상황들이 도처에서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제 영어는 개인적, 사회적, 국가적 삶의 영역에 깊숙이 침투한 언어가 됐습니다. 일례로, 대학을 비롯한 우리나라 고등교육기관들은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서 생존하고 우위를 점하기 위해 오랫동안 영어원서를 전공과목의 교재로 삼아 왔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영어로 강의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실제로, 학문적·기술적으로 새롭게 소개되는 이론들은 거의 영어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영어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정보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비록 특정 기술이 다른 언어의 지역에서 개발됐다 하더라도 국제적 공인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어로 재구성돼 소개돼야만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비단 학문과 기술의 영역뿐만 아니라, 경제, 산업, 예술, 대중문화 등의 여러 분야에서 영어를 통과해야만 글로벌화 되고 경쟁력을 얻게 되는 메커니즘의 실례들은 너무도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현대 과학기술의 대표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인터넷은 공간의 장벽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위력적입니다만, 이를 이용해 전 지구적으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인터넷 기술과 함께 영어 능력이 필요합니다. 많은 웹사이트들이 영어로 제작돼 있는 것이나 국제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전자메일이 주로 영어로 이뤄진 것, 그리고 최근 비즈니스의 중심으로 성장 중인 전자상거래에서의 언어도 거의 영어인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에는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매체로서의 영어를 적극적으로 배우고 가르치려는, 그간의 의지도 한 몫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몇 년 전, 다른 기초과목들과 달리 수능 영어에만 절대평가를 적용하는 정책이 결정된 뒤, 학교 영어교육은 점점 위축돼 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수능 영어 절대평가 정책이 과연 영어 사용의 수요를 객관적으로 반영한 것인지, 글로벌할 수밖에 없는 영어 수요가 과연 이렇게 하루아침에 변할 수 있는 것인지, 여러모로 의심스럽습니다. 아니, 애초에 수능 영어 절대평가 정책에 글로벌한 영어 수요를 반영하려는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대학 신입생들의 영어 실력이 눈에 띠게 하락했다는 소식을 접하며, 다른 무엇보다 걱정이 앞섭니다. 소정의 고교과정을 마치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전공원서도 제대로 읽고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영어의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는 글로벌 환경에서 우리 학생들의 경쟁력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점점 치열해져만 가는 냉혹한 국가 간의 경쟁에서 우리의 미래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非영어 사용권 유럽 국가들의 자국 문화와 언어에 대한 자부심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라들이 이미 20여 년 전부터 영어에, 단순 외국어를 넘어 자국어에 버금가는 언어적 위상을 부여하고 있는 건 알고 계신지요? 이런 현상은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등의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들에 한정되지 않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유럽 중심 국가들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유럽 국가들이 영어를 이처럼 받아들이는 이유는 자국 문화와 언어에 대한 자부심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영어의 언어적 상품가치인 Q-Value(Abram de Swan이 제시한 개념)가 다른 언어들을 압도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영어는 단순히 프랑스어, 독일어 등과 같은 중심언어(central language)의 위상을 넘어 초중심언어(hypercentral language)로서의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싫든 좋든 이미 세계인들의 최고 통용어(lingua franca)로 자리 잡은 영어의 위상을 외면할 때,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도 영어 학습은 글로벌 및 지식정보화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인적 자원을 키워내야 하는 한국의 학교 영어교육은 과연 그 목적에 맞게 운용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준언 숭실대·영어영문학과/한국외국어교육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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