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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반복강박’적 自問…문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한국문학의 ‘반복강박’적 自問…문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 양도웅
  • 승인 2018.09.03 1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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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어문학회 제40회 전국학술발표대회 ‘문학 너머의 문학’ 개최
2006년 출간된『근대문학
의 종언』(도서출판b, 조영
일역). 

지난 2004년 계간지 <문학동네> 겨울호에 가라타니 고진의「근대문학의 종말」이라는 글이 실렸다. 이어 위 글과 가라타니의 다른 글이 함께 묶인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b)이 2006년 출간된 뒤, 한국문학은 ‘반복강박’적으로 한 질문에 매달리고 있다. 바로 문학은 정말 힘(사회적 영향력)을 잃었는가? 달리 말해, 문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숱한 사람들이 나름의 답을 내놨지만, 10년 넘게 이 ‘핑퐁 게임’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어느 누구도 이 질문에 설득력 있는 답을 내놓진 못한 것 같다. 아니면 많은 이들의 부정과 달리, 가라타니의 테제가 지극히 사실이거나.

시간을 돌려보자. 가라타니가 주장한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여러 해석이 나왔지만, 그의 주장은 의외로 간명하다. 『근대문학의 종언』 「한국어판 서문」의 마지막 문단이다. “우리는 현재 세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에 직면해 있다. 전쟁, 환경문제, 세계적인 경제적 격차. 이것들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역사적 관계를 집약하는 사항들이다. 게다가 이것들은 시급한 과제들이다. 이전의 문학은 이런 과제들을 상상력으로 떠맡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학이 이것을 떠맡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불만을 드러낼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나 자신은 그것을 떠맡고 싶다. 그것이 문학적이든 비문학적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바로 문학(가)들이 더 이상 세계적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

지난달 22일 중앙어문학회(회장 손종업, 선문대)는 ‘문학 너머의 문학’을 주제로 선문대에서 제40회 전국학술발표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도 어김없이 가라타니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답변이 제출됐다. ‘문학 너머의 문학’이라는 주제에서 알 수 있듯, 현 문학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문학에 대한 전망이 이 자리에서 논의됐다. 과연 이번에는 가라타니가 촉발한 질문들을 해결했을까? 근대문학을 넘어 새로운 문학 모델을 제시했을까? 손종업 회장의 「문학 이후: 게임 주체의 등장과 문학의 존재 방식」, 문형준 중앙대 교수(영어영문학과)의「이 뜨거운 여름 앞에서 문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생태위기와 파국서사의 가능성」의 결론 부분을 발췌 소개한다. 

손종업: 주지하다시피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은 “소설 또는 소설가가 중요했던 시대는 끝났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실제로 그렇다. 영화(1895)와 텔레비전(1958), 컴퓨터(1989), 휴대전화(1984) 등의 매체들이 등장할 때마다 문학은 멸종될 것들의 목록에 올랐다. 그리고 여전히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하리라. 다만 끊임없이 “문학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성찰하고 의지적으로 실천하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닐까. 다시 모두의 문제의식으로 돌아가서 이 과제에 대해 말하자면 이렇다. 그러한 가치를 온몸으로 밀고 나가지 못하면서 앵무새처럼 ‘무용함의 쓸모’(김현)를 반복하는 것도, 이 시대가 요구하는 천박한 실용주의에 굴복하는 것도 문학의 길은 아닐 것이다. 

문학이 아니라 게임의 형식 속에서 그 이후가 열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게임 속에 있으면서 그 규칙에 속박되지 않고 근원까지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가라타니 고진이 바로 그 글에서 인용했던 들뢰즈가 인용한 사르트르의 말로 돌아가면 어떨까? “문학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영구혁명 안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주관성)이다.” 근대문학의 종언이 그러한 문학적 투쟁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한 소설가가 최근에 자신의 소설 속에 인용한 다음과 같은 구절에 희망을 걸고 싶다. “작가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란 걸 눈치챌 때조차 그 환상을 놓쳐선 안 된다.”

손종업 교수(왼쪽), 문형준 교수. 

문형준: 파국서사를 휴머니즘 서사인 소위 근대문학과 구분시키는 지점들이 몇 있다. 첫째, 파국서사는 인류의 종말을 상상한다. 휴머니즘 서사는 개인의 죽음은 다뤄도 인류의 죽음을 다루지는 않는다. 인류의 종말은 ‘현실’(reality)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망상 때문인데, 파국서사는 이를 극복한다. 인류의 종말을 이미닥친 현실로 가정하고 파국서사는 그 종말 이전과 이후에 발생할 다양한 심리적, 정치적, 철학적, 경제적, 인간적 문제들을 제기한다. 인류세를 인정한다면, 파국서사야말로 우리 시대의‘리얼리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둘째, 파국서사는 생태의 힘을 인간의 힘보다 우위에 놓는다. 휴머니즘 서사에서 모든 사건의 발단이 인간의 행위나 심리인 데 반해, 파국서사의 사건은 인간이 포함된 생태적 사건이다. 핵전쟁의 발발, 석유의 고갈, 행성의 충돌, 바이러스의 전염, 가뭄의 전면화, 유전공학의 발전 등 파국서사의 소재는 인간 외부의 사물 혹은 체제인 경우가 대다수다. 이런 설정 속에서 파국서사는 인간과 지구의 운명을 결정짓는 인자가 인간/개인이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인간이 만든 어떤 체제, 모튼(Timothy Morton)적으로 말하면 초과물이라고 본다.

셋째, 파국서사는 인간 이후(post-human)의 상황을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좀비서사나 로봇 아포칼립스 등의 파국서사 하위장르에서 인간은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니다. 사이보그, 로봇, 좀비, (유전공학으로 태어난) 포스트휴먼 등이 주인공/화자가 되어 인간을 바라보거나, 인간처럼 사유하고 행동하거나, 아니면 자신들만의 심리상태(non-human psyche)를 묘사하기도 한다.

넷째, 파국서사는 휴머니즘적 가치들을 낯설게 만든다. 파국서사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종말을 상정하므로, 파국서사는 현 질서를 넘어선 질서를 상상한다. 지금 우리가 자연스럽게 여기고,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가치들이 정말 자연스럽고 영원할 것인가? 자원의 풍요가 존재하지 않아도 인간은 여전히 존엄할 수 있는가? 생존경쟁이 일상이 될 때 민주주의나 페미니즘이나 인권이라는 개념이 살아남을까? 파국서사는 이런 질문들에 ‘아니오’라고 답하는데, 이를 통해 근대 이후의 휴머니즘적 가치체계에 익숙한 우리를 낯선 사유 속으로 인도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특징들은 궁극적으로 파국서사를 휴머니즘 이후의 서사로, 문학을 넘어선 문학으로 만든다. 파국서사 자체가 기후변화를 막거나 탄소 방출을 중지시키거나 대재난을 방지할 수는 없다. 휴머니즘 서사로서의 근대문학이 기후변화와 탄소방출과 대재난을 아예 없는 것처럼 여기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면, 파국서사는 인간을 넘어선 힘을 인식함으로써 인간을 모든 생태적 요소 중 하나로 축소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파국서사를 읽고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상식이자 자연이 되어버린 인간중심적 가치를 (조금이라도) 낯설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인간중심적 가치가 낯선 것이 될 때야 비로소 우리는 인류세가 인간에게 가지는 의미를 묵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인간을 사물의 하나로 격하시키는 것이 근대문학에서는 사악한 악인의 범죄 같은 것이었다면 파국서사에서는 새롭게 바뀐 현실에 대한 재현으로 변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유, 평등, 민주, 박애, 인권, 연대 같은 기존의 가치들을 대체하거나 그것들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뭔가를 상상하고 사유할 수 있다. (근대)문학을 넘어선 (파국)문학, (인간주의적) 문학을 넘어선 (인류세 시대의) 문학으로서의 파국서사, 그 가능성을 더 깊고 넓게 사유해야 할 때는 폭염으로 달궈진 여름, 바로 지금이다.

 

양도웅 기자 doh0328@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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