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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여의 계보학과는 다른 ‘증여와 계약’의 계보학
증여의 계보학과는 다른 ‘증여와 계약’의 계보학
  • 이경묵 서울대 인류학과 BK21+사업단 박사후연구원
  • 승인 2018.08.27 12: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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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진리의 가격』(마르셀 에나프 지음, 김혁 옮김, 눌민출판사, 2018.7)

에나프의 『진리의 가격』은 시대와 분야를 아우르는 ‘증여와 계약’의 계보학이자 ‘진리와 돈’의 인류학이다. 여기서 ‘증여의 계보학’이 아니라 ‘증여와 계약’의 계보학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만일 증여와 선물관계의 특성을 추적하고 ‘의례적 선물교환’이 현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있다고 요약한다면 이 책의 ‘절반’ 이상을 이해할 수 없다. 에나프가 의례적 선물교환이 상업적 교환으로 대체된 것이 아니며 증여를 증여자가 도덕적으로 양도하는 관대함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이유 역시, 가격으로 매길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싸움 그리고 화해가 이 책의 논의의 등뼈임을 곱씹어야함을 요구한다. 

대갚음과 호혜성

에나프가 제시한 계보학은  증여와 계약의 관계에서 도출된 많은 레퍼토리를 포함한다. 이 책의 역자는 동사형인 reciprocate에 주목해, 지금까지 호혜성이라 번역됐던 reciprocity를 대갚음이라 번역했다. 이는 저자의 의도와 잘 들어맞는다. 그는 전통사회에서 대갚음이 인간관계를 압박하기도 했고, 의례적인 선물교환이 이미 구축된 공동체 외부의 나선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는 약점을 지님을 지적했으며, 또한 상업적 교환과 시장의 기능이 친구와 낯선 사람의 차이를 개의치 않는다는 긍정적 효과를 무시하지 않는다. 이 책에는 reciprocity가 호혜성으로 번역되는 순간과 대갚음으로 번역되는 순간, 그리고 대갚음이 봉사, 보상, 명예 처벌 피해 등 대가로 치른 것을 가리키는 안티페폰포스(antipeponthos)에서 되갚아주는 행위나 유용한 물건을 상호 되갚음 하는 교환이라는 뜻의 안티도시스antidosis 로 넘어가는 전환 역시 포함돼 있다. 반면 증여 혹은 선물-주기를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해결하기 위한 보다 ‘인간적인’ 전망을 대표하려 한다면, 호혜성이라는 번역어가 더 적합할 것이다.

진리의 가격의 긴장감

『진리의 가격』의 바닥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있다. 이 긴장감이 이 책 전체를 황금만능주의를 비판하는 교양서라 칭하지 못하게끔 가로막고, ‘질문이 여전히 풀리지 않았음을 고백하면서 엄격한 정의를 지향하는’ 앎의 예가 된다. 예를 들어, 에나프는 ‘돈을 철학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고전 텍스트에서 나온 허구의 표현을 그저 반복하는 하찮은 일’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곧이어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것의 필요성을 드러내는 일을 그치지 말아야’ 한다고 선언한다. 플라톤의 논의를 끌어와 장사꾼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파는 것의 본질에 대해 알 필요가 없는 소피스트’를 맹렬히 비판했다가, 소피스트로 인해 철학, 정치학, 도덕성이 어느 누구라도 취득할 수 있는 능력과 기술로 전환되고 대중도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사회가 출발되었다며 그들을 복권시킨다. 만약 에나프가 어느 편을 드는지, 즉 돈과 소피스트를 비판하는가 아니면 옹호하는지는 이 책을 읽는 주요한 질문이 될 수 없다.

에나프의 방법

부족사회에서 현대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저작에서 그는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것, 가격의 바깥에 있는 것이 어떻게 식별되고 또 처리돼 왔는가를 추적한다. 저자의 논의는 ‘지식의 장사꾼’인 소피스트와 소피스트의 복권, 이윤에 대한 비판, 고리대금업자와 싸움을 벌어지는 철학자, 의례적 선물교환과 상업적 교환의 공존, 희생, 부채, 은총, 의례화폐와 상업화폐, 해방의 수단으로서의 화폐 등의 주제를 모두 품에 담은 가치와 가격의 문명사이다.

그런데 가치란 무엇이고 가격의 바깥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 자신의 일반적인 정의는 제시돼 있지 않다. 자신이 쓰는 것을 정의하지 않은 채 무엇인가에 대해 쓸 수 있을까? 에나프의 방법은 ‘다양한 양식의 상징적 표현들과 가치 개념이 발전하는 자리인 표상의 틀’(320)을 고찰하는 것, 즉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사람들, 특히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내놓았던 무엇이 가치를 지니며 그 가치에 어떻게 가격을 매길 것인지를 둘러싼 질문과 정의와 해답을 분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앎과 돈 사이에는 등가교환이 불가능하므로 선물관계에 의거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공동적인 유대가 위기에 처했다는 판단 하에 친구들이나 친족들 이방인들 누구에게라도 너그러우면서도 순수하게 베푸는 진정한 도덕적인 증여를 강조한 세네카, 고리대금업자와 맞서 시간을 이윤을 낳는 것이 아니라 신이 준 으뜸가는 선물이라 규정한 신학자들, 돈이 다산의 자연에 속하며, 돈은 돈을 낳을 수 있음을 청교도 도덕으로 제시한 벤저민 프랭클린, 시간을 투자하고 생산하는 능력에 따라 변모하는 사회 전체의 운동이요 이윤창출의 기반이라고 본 정치경제학자 모두가 무엇이 각자의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것/없는 것 사이의 관계를 제시했다.  

그렇다면 저자의 방법론은 무엇인가? 에나프는 자신의 철학적 방법론이나 관점을 책 전반에 걸쳐 조금씩 뿌려 뒀다. 각기 해결책과 해답을 추적하고자 했다고 해서 저자를 각기 다른 문화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가치판단이 그 내부의 기준에 따라야함을 주창하는 ‘문화상대주의’의 지지자로 요약하기도 어렵다. 에나프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상인을 자신들의 경쟁자로 여겼고 돈이라는 언어가 진리의 언어 사이에서 시작된 싸움이 ‘우리의 전 역사를 관통 한다’는 명확한 역사관을 제시한다.

그 중 가장 명시적인 문장을 ‘희생제의’가 있었던 사회의 특징을 분석한 5장에 있다. 에나프의 전략은, 어떤 조건에서 의례적 희생-소피스트에 대한 폄하, 고리대업업자에 대한 반대, 상업에 대한 복권, 예속의 조건이 되는 부채와 은총의 논리 등(필자가 덧붙임)-이 나타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로서 다시 왜 그것이 사라졌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 소멸을 이해하는 것은 ‘희생의 시대’-가격을 매길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독특한 관계설정 방식-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로서 우리는 이 역사적 운동 속에서, 하나의 ‘여파’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제기한 질문들은 이 ‘여파’와 떨어질 수 없다. 무언가가 존재론으로 도래했다가, 돌이킬 수 없이 사라졌다. 아마도 희생이, 그 죽음을 통해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을 열었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중세 그리고 부족사회에서 ‘근대’와 현대에 이르는 각 시대를 특정한 조건들의 결과로 분석하는 작업과, 있었다가 사라진 것들이 돌이킬 수 없는 조건을 쌓아왔음을 분석하는 작업을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는 통찰은 통시적·공시적인 의미에서의 타문화를 연구할 때 견지해야할 점을 정확히 꿰뚫는다.  

미완‘이어야 하는’ 과제 

『진리의 가격』의 후반부에서 에나프는 그가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소크라테스의 예를 폐기했다. 만일 ‘현재의 소크라스테스’가 있다면 그는 자신이 돈을 받지 않았고 가난하기 때문에 결백하다고 주장하지 못할 것이다. 철학자, 학자, 작가가 자신의 소득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이제 통용되지 않는다. 이제 ‘진리에 가격을 매길 수 없다’는 문장은 진리와 가격을 어떻게 연결하고 계산해야 하는지/할 수 없는지를 둘러싼 해소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외침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진리와 가격 사이의 통약불가능성을 상기시켰지만 그것은 불가능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의 제기였다.

역자인 김혁은 ‘자신이 속한 서양문명의 경험을 지표로 삼아 세계를 설명하는 대신, 세계를 통해 서양문명의 현재를 설명하고자 하는’ 에나프에게 존경을 표했다. 에나프의 책이 한국의 독자에게 주는 제안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것/값이 매겨져 교환의 근거가 되는 것 사이의 지속적인 긴장이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스스로의 눈으로 다시 추적하고 도전하라는 제안이다. 죽음 외에는 갚을 수 없는 정치인의 잘못, 기본소득정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상품에서 커먼즈로, 커먼즈에서 상품으로 오가는 재화와 서비스, 사람을 보다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평가하기 한 실적 계산법 등에 맞서 이제 ‘한국의 진리의 가격’을 써야할 때다. 

 

 

이경묵 서울대 인류학과 BK21+사업단 박사후연구원
서울대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인도네시아의 빈민촌의 물 문제로 박사논문을 작성했고, 현대사회에서의 증여, 개발, 정책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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