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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한 경비 지원 규정, 외유성 국제학술대회 초래했다
허술한 경비 지원 규정, 외유성 국제학술대회 초래했다
  • 문광호 기자
  • 승인 2018.08.27 0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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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ET 논란 후폭풍

오전 발표가 끝나면 오후는 자유시간.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한 교수와 대학원생들은 유명 관광지를 찾는다. 자연 경관으로 유명한 휴양지다. SNS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해외 관광지 사진에 동기들이 부러움의 댓글을 남긴다. 한 동기는 눈치 없이 국제학술대회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물어온다. 답하려던 찰나 평소 친한 교수님이 함께 사진을 찍자고 부르신다. 동기의 무거운 질문은 바다 건너 새로운 풍경에 금세 잊힌다.

위 이야기는 서울 A사립대의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했던 대학원생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된 사례다. WASET(세계과학공학기술학회, 이하 와셋) 논란이 불거지면서 일각에서는 외유성 국제학술대회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서울 B대학의 ㄱ 교수는 “국제학술대회의 목적은 논문 투고 전에 자기 생각과 아이디어를 교류하는 데 있다”며 “그런데 현재는 외유성으로 해외 출장을 가기 위한 것이 더 크다. 하루면 끝나는 국제학술대회에 며칠씩 지내고 오는 것도 항공권, 체재비 등을 지원받으며 놀기 위해서다”고 비판했다.

제도 허점 이용해 경비 지원받기도

국제학술대회가 쉽게 외유성 출장으로 변질될 수 있는 것은 허술한 여비 규정 때문이다. 각 대학과 한국연구재단은 국제학술대회 경비를 지원하고 있다. 이 때 기준이 되는 것이 공무원 여비규정과 각 대학의 자체 여비규정이다. 그런데 이 여비 규정에 따르면 국제학술대회의 일정에 따라 1일당 최소 39만원에서 최대 55만원(전임교원 기준)까지 추가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여비규정에서 일수를 기준으로 일비, 숙박비, 식비 등을 지급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다보니 일부러 학술대회 일정을 길게 잡아 추가 경비를 지원받는 경우도 생긴다. BK21플러스 사업단의 지원을 받았던 ㄴ 대학원생은 “첫날 오전에 발표를 하고 남는 시간에 관광을 다녀왔다”고 말했다. 국고로 일부 몰지각한 연구자들의 여행비를 지원해준 셈이다.

국제학술대회 참가 경비를 지원받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까. 각 대학과 한국연구재단이 규정하는 참가 경비 신청 기준에 따르면 ‘국제학술대회’에서 ‘논문 발표’를 하는 것이 조건이다.

한국연구재단은 가짜 국제학술대회를 구별하기 위해 △4개국 이상 참여 △총 구두발표논문 20건 이상(인문사회 10건 이상) △총 구두발표논문 발표자 중 외국인 논문비율 50% 이상 등의 규정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문제가 된 와셋 등의 가짜 국제학술대회들도 이 규정을 무리 없이 통과했다.

등록비만 내면 논문 발표를 하는 것도 어렵지는 않았다. 한 BK21플러스 사업단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논문 분량이 A4 반쪽에 불과하기도 했다. 국제학술대회 참가자들은 200자 정도의 초록만으로도 학술대회 발표 여부가 결정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부 교수들은 학술적 목적의 국제학술대회 참가와 여행을 명확하게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ㄷ 교수는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하면 해외 학자와 교류를 하면서 근처를 돌아다닐 수도 있고 전공과 무관한 학술대회 강의를 들을 수도 있다”며 “오히려 규제가 엄격해질수록 학술적 교류가 힘들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구슬아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위원장은 “학술대회 목적이 지적 교류를 위한 것인데 정부지원사업에서 해외 학술대회 관련된 것들이 포함되니 겸사겸사 외국 구경도 할 수 있는 국제학술대회 등을 찾게 되는 것 같다”며 “한국연구재단 등 기관이 기준을 명확히 세워야 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해외는 받기 어렵고 금액도 작아

해외 대학들은 국제학술대회를 어떻게 지원하고 있을까. 해외에서는 국제학술대회를 지원하기 위해 여비 보조금 제도(Travel grant)를 운영한다. 특정 재단이나 대학이 마련한 기금으로 조성되는 여비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는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 대부분의 지원금은 국제학술대회 참석 결과를 토대로 사후 지급된다. 코넬대의 경우 특별위원회에서 여비 보조금 승인 여부를 결정한다. 윌리엄 앤 매리대는 학술대회 신청서 검증하는 데만 8주가 걸린다. 전준하 KAIST 대학원생(과학기술정책)은 “먼저 돈을 주고 학회를 참가함으로써 돈을 소진하는 형태가 아니라 학회를 가고 싶은 간절한 사람들이 원하는 학술대회를 신청하게 만들어야 한다”며 “여비 보조금 제도가 도입된다면 운영하는 쪽에서 검증할 수 있는 단계가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참가 경비의 상한선도 역시 한국에 비하면 적은 수준이다. 캠브리지대, 랭커스터대, 펜실베니아대, 코넬대 등 해외 대학들은 지역별 등급에 따라 교수 최대 1000파운드(한화 약 144만원), 대학원생은 최대 750달러(한화 약 84만원) 정도를 지원받는다. 일수에 따른 변동사항은 없었다. 한국의 경우 국공립대 및 서울 시내 주요 사립대 여비 규정에 따르면 해외에 3일만 머물러도 교수는 최소 117만원에서 최대 165만원(일비·숙박비·식비 합산, 지역별 가장 높은 등급 기준), 대학원생은 최소 81만원에서 최대 120만원까지 지원 받는다. 보통 국제학술대회는 3일에서 6일 정도 진행된다.

정량적 기준보다 연구윤리 강화가 중요

이번 와셋 논란에 국제학술대회 참가조차 점수화되는 평가 방식이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우찬제 서강대 교수(국문학과)는 “기본적으로 대학 평가 방식이 양적인 기준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이 생기는 것 같다”며 “양적 평가 제도로 해결하기 보다는 동료 평가 등 질적인 평가 방식을 적극 도입해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해당 문제제기에 대해 한국연구재단은 “부실 학술대회 문제는 BK21 플러스 사업뿐 아니라 부처 및 재단 차원에의 대책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며 “연구자들의 개선 아이디어를 토대로 학술대회 기준 강화와 연구자 윤리 강화를 포함한 다양한 측면에서 후속 조치가 있을 수 있다”고 전했다.

문광호 기자 moonlit@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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