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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계 동향]비만, 새로운 질병의 탄생인가.
[과학계 동향]비만, 새로운 질병의 탄생인가.
  • 교수신문
  • 승인 2003.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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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담론'의 은밀한 수혜자들

지난 5월 29일부터 4일간 핀란드 헬싱키에서 개최된 제12차 유럽 비만 문제 학술대회에서는 전세계 성인 비만 인구가 2억 5천만 명에 달할 정도로 비만은 "지구촌 전염병"이 되었음을 선언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성인 3명 중 1명이 비만이라는 2001년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사결과가 있는가 하면, 전국 병의원에서 비만으로 분류해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진료비를 청구한 환자 수도 1999년 1천2백여 명에서 2001년에는 약 1만 7천명으로 늘어, 무려 열 세배가 넘게 급증했다. 20대에서 40대만 놓고 보면 비만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은 사람은 2년 새 30배가 넘게 증가했다.

질병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비만

이처럼 비만이 질병으로서 주목받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생활습관의 변화이다. 그 어느 때보다 고열량의 식사를 하면서도 운동량은 부족한 사람이 늘어나면서 전례없이 급작스런 비만화가 진행되고 있다.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하는 사무직 노동자들의 경우 비만은 일종의 직업병이다. 개발도상국에서 증가하고 있는 비만은, 예전처럼 활발하게 움직일 공간을 없애는 도시개발 방식과 '정크 푸드'의 확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애초에 이러한 비만에 대한 관심은 '군살'없는 날씬한 몸매를 원하는 이들의 다이어트 열병에서부터 비롯됐다. 그러나 의학 연구에서 비만을 고혈압이나, 동맥경화증, 당뇨병, 뇌졸중, 심장병, 간·담낭질환, 골·관절증 등의 원인으로 지적하면서, 비만은 건강을 위험하는 요인을 넘어서 질병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이 대중화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96년에 WHO는 비만을 질병으로 보는 인식의 전환이 이뤄지고 있음을 지적했고, 1997년 보고서를 통해 선진국에서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에도 비만인구가 '전염병처럼 번져가고' 있다는 경고신호를 보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9년 WHO 아·태지부와 대한비만학회에서 서구의 기준보다 동양인의 비만기준을 강화해 발표하면서 비만의 위험성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동양인은 서구인에 비해 같은 체격에도 근육이 적으므로 합병증의 위험이 더욱 크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 기준에 따르면 1백75cm의 키라면 76.6kg만 넘어도 비만으로 봐야 한다. 기준이 엄격해진만큼, 의학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할 '비만인'의 규모가 대폭 늘어난 것이다. 그리고 2002년 한 해 동안 의사협회에서 비만을 "의사와의 상의"를 통해 "치료해야할 만성 질병"으로 규정하고, '비만의 날'을 선포하는 한편 비만약을 생산하는 다국적 제약회사의 협찬을 받아 대대적인 비만퇴치 캠페인을 벌이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비만 = 치료해야할 질병'이라는 주장이 대중적으로 확산됐다.

이런 의학계의 주장은 이전보다 체중이 불어난 사람들은 물론 건강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많은 현대인들에게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줬다. 비만 때문에 건강이 나빠진 사람들은 기존의 식이요법이나 운동으로는 부족했던 부분을 약물치료나 수술 등 본격적인 의료행위를 통해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질병의 가지는 복합적인 원인

그러나 비만은 곧 질병이라는 압도적인 의학담론에도 불구하고 한켠에서는 비만을 과연 질병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 조심스러운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2001년 7월 런던에서 열린 비만학회에서 미국 과학자 스티븐 블레어는, "몸이 튼튼하면서 비만인 사람과 날씬하지만 튼튼하지 않은 사람의 당뇨병에 걸릴 확률을 비교하면 비슷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비만도보다는 튼튼한 몸상태가 더욱 중요하다는 주장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한편 미국의 '건강 심리학'紙 2002년 11월호에서는 화를 심하게 내는 것이 흡연, 비만, 고콜레스테롤 등 일반적으로 알려진 위험요인들보다 심장질환의 가능성을 더욱 높인다고 보고하고 있다. 많은 의학계 종사자들이 동의하듯 질병은 대부분 복합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매우 복잡한 현상이며, 어디부터 질병으로 규정하고 의학적 치료를 해야할지 결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논란은 그야말로 사소한 시비 정도로 취급되고 있다. 질병으로서의 비만 담론을 이끌고, 한편으로 이 담론 덕을 보고 있는 현상은 바로 비만 시장의 성장이다. 최근 비만 시장은 연평균 신장률이 20%가 넘게,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연간 20조 원에 달한다는 위궤양 치료제 시장에 비해서는 아직 걸음마 단계지만, 2001년 1조 6천억 원 가량의 시장을 형성한 비만치료제 시장의 규모는 2010년이 되면 10조 원 가량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한국에서도 비만치료제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다. 2001년 판매가 시작된 한 비만치료제는 1백일 동안 95억 어치 가량 팔려나가면서 비아그라의 기록을 깨는 기염을 토했을 정도. 1조원대 규모로 추정되는 국내 다이어트 시장에 앞으로 비만'치료'는 식이요법이나 운동, 또는 '비과학적인' 다이어트 식품들보다는 '의학의 권위'를 등에 업은 약물의 위상이 한층 높아질 전망이다.


그러나 식욕억제제로 처방되다가 1995년의 대규모 국제적 연구를 통해 그 심각한 부작용이 밝혀져 4년 뒤인 1999년에 사용이 금지된 한 비만치료제 사건에서 보듯 약물 치료가 지닌 위험성에 대해서는 충분한 주의가 필요한 실정이다. 비만은 생활습관, 사회적 환경에 의해 야기되는 현상으로 접근해야 하며 비만 자체를 질병으로 취급하는 것은 오히려 현재 비만인에게 가해지는 사회적인 차별과 혐오의 시선을 확대, 재생산토록 하는 '과학적인 근거'로 작용할 위험성 또한 제기될 수 있다.


의료산업뿐만 아니라 식품·음료산업, 직장 및 여가생활의 패턴 또한 비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회적인 대책 또한 요구되는 상태가 바로 비만이라는 성찰이 없다면, 예전의 '비과학적인' 다이어트를 '과학적인' 비만치료로 전환한다고 해도 행복해지는 비만인의 수보다 불행해지는 비만인의 수가 늘어나지 않을까. '환자를 생산하는 사회'에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안성우 과학객원기자 swah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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