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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 받지 않은 열정
강요 받지 않은 열정
  • 최순원 서울대·수의과 연구교수
  • 승인 2018.08.20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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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독일로 유학을 하러 갔다. 그리고 독일에서 10년간의 대학교와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새천년의 시작을 알리는 '밀레니엄 데이'가 있던 2000년 당시만 해도 독일 유학의 목적은 법률, 종교, 언어 등 인문사회계열이 주류였다. 나처럼 바이오 생명과학을 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하러 가는 사람은 없었다. 또한, 나를 바라보는 독일 정부의 시각은 가난한 한국에서 온 유학생 정도였다. 겁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한 유학이었다. 

독일 현지에서 일 년간 대입 어학능력시험을 준비하면서 바이오 생명과학 분야에서 우수한 학교를 알아봤고, 생물학 분야에 강점 있는 대학의 입학 허가를 받아 '디플롬'이라 불리는 독일의 독특한 학·석사 통합과정을 시작했다. 디플롬 마지막 학기가 됐을 즈음, 나는 막연했던 과학자라는 길에서 보다 구체적인 줄기세포 연구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이 결정에는 연구실에서 수행한 많은 인턴십, 여러 독일 교수님들로부터 구한 조언이 큰 도움이 됐다. 

유학생으로서 최대 고민거리였던 군 복무 때문에 독일 지도교수님께 허락을 받아 만 28세 생일 전까지는 꼭 귀국하겠다는 서약 공문을 발송함으로써 입대를 최대한 연기해 박사학위를 끝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독일 박사학위를 한국연구재단 외국 박사학위 신고 시스템에 등록할 때 만끽한 기쁨도 잠시, 내 앞에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과정들이 여전히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대학원 과정 때는 정해진 논문 및 학술대회 발표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면, 박사학위를 받은 뒤에는 연구 주제를 자율적으로 탐색해 실질적인 연구성과를 추가로 내놔야 했다. 당장, 한국에서 3년간의 전문연구요원으로 근무할 곳도 찾아야 했다. 이때 졸업 전 한국 연구자와의 다양한 교류는 굳이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큰 도움이 됐다. 

이 정도 선에서 나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고 독일과 한국의 연구 시스템, 분위기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요즘 한국에서 중요시하는 '워라벨'은 독일 연구환경에서는 이미 정착된 것이다. 특히 회자되는-우리나라에서는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9to5' 시스템은 독일에서 대학생 시절을 보낸 나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시스템이다. 모든 학생이 지각없이 9시 이전에 출근해, 자기 할 일을 일과시간 내에 모두 수행한 뒤 5시가 되면 하나둘 집으로 간다. 주말에는 쉬고 회의는 항상 일과 시간 내에 진행한다. 물론 일과 시간 중에 잡답이나 간단한 다과 시간 등의 휴식시간이 없는 건 아니지만, 누구도 시간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으면 독일의 워라벨에 대해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정시 퇴근과 저녁 있는 삶이 워라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편적인 이해다. 일과 시간 및 저녁 시간을 본인의 의지대로 계획해 채우는 것이 워라벨의 완성이라고 생각한다. 

연구 특성상, 단기간에 집중해 진행해야 하는 실험이 있고, 실험이 끝난 뒤에도 결과 분석 및 추가 실험을 진행해야 하는 실험이 있다. 독일 유학 시절을 돌아보면, 나는 배아줄기세포 실험실에 있었고, 이 세포는 매일 관리를 해줘야 했다. 독일 동료들은 자발적으로 주말에도 나왔고, 24시간이 필요한 실험은 밤을 새우며 진행했다. 이런 연구 주제와 실험 방법을 선택한 본인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나는 독일에서의 9to5가 존재할 수 있는 배경은 강요받지 않은 열정과 그로 인한 능률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나 또한 스스로 9to5 시스템을 버리고 한국식의 '야근'을 매일 같이 했지만, 남들보다 더 많은 연구 성과를 위해 부족한 기초 지식 및 실험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것이었다. 

논외일지 모르지만, 독일의 PI(연구책임자)들도 9to5 시스템에 만족해하는 학생보다는 좀 더 열정을 보이는 동양인 학생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한국의 워라벨이 단순히 9to5를 통한 시간적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9to5로 확보한 시간을 통한 개인의 발전과 연구 성과 달성이라는 행복을 추구하는 진정한 워라벨이 되길 바란다.

최순원 서울대·수의과대 연구교수.
독일 뷔르츠부르크대에서 줄기세포 관련 연구로 박사학위를 했다. 신경세포로의 분화 및 직접교차분화에 대한 여러 편의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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