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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호수였다가, 평화로운 마을이었다가, 전쟁터였던 그곳  
그 옛날 호수였다가, 평화로운 마을이었다가, 전쟁터였던 그곳  
  •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연구단
  • 승인 2018.08.20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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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서 강화까지 경계에 핀 꽃, DMZ 접경지역을 만나다_ 15-① 돌산령터널-펀치볼마을-당물골-양구통일관-을지전망대
을지전망대에서 바라본 흐린 겨울 아침의 해안분지
을지전망대에서 바라본 흐린 겨울 아침의 해안분지

강원도 양구군 亥安面은 하나의 침식분지(erosion basin) 지형으로만 이루어진 유일한 면 행정구역이다. ‘펀치볼(punch bowl)’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해안분지’는 인제군 서화면과 양구군 동면의 경계에 걸쳐 있다. 인제에서 갈 때는 산을 굽이굽이 돌아 넘지만 양구읍에서 가자면 31번 국도와 453번 지방도를 타고 들어가는 길이 완만하다. 수 km 떨어진 곳에서 봐도 럭비공 모양의 해안분지를 둘러싼 거대한 산등성은 눈앞의 성벽처럼 시야를 가로막는다. 해발 1천100m를 넘나드는 봉우리들이 어깨를 맞대고 진을 치고 있는 형상이니 그 우람한 실루엣에 괜히 주눅이 들 것만 같다. 돌산령터널을 통과하니 거인국의 城砦 안으로 들어간 걸리버의 시선처럼 사방이 산에 둘러싸여 있다.

그런데 해안면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거대한 분지는 어느새 새 둥지 속에 들어온 것처럼 아늑한 보금자리의 느낌을 준다. 머리에 구름을 두르고 우뚝 서 있는 대암산(1천304m), 도솔산(1천148m), 대우산(1천179m)의 고봉들은 밖에서 볼 때는 위압적이지만, 분지 내부에선 든든한 장벽이다. 분지 바닥의 평균고도가 해발 400m 정도이니 높이 700m 이상의 벽을 두르고 있는 셈이다. 해안분지의 크기는 남북으로 11.95km, 동서로 6.6km에 이른다. 백두산 천지와 비교하자면 해안면(61.52㎢)의 면적은 천지(9.17㎢)보다 6배 더 넓고 둘레는 8km 더 길다. 그런데 이 천혜의 ‘산골 요새’의 인구밀도는 전쟁 전이나 지금이나 낮아서 6개의 里에 1천408명(2015년)이 거주한다. 

한국전쟁 당시 주변 능선에서 일어난 치열한 전투들을 보도하던 어느 미국 종군기자는 넓고 움푹한 이 특별한 지형에 ‘펀치볼(Punch Bowl)’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토착민들의 눈에 거대한 함지박 같아 보이던 분지는 이젠 서양 화채 그릇 모양으로 보인다.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격렬하게 반복됐던 전투 과정에서 희생된 젊은이들의 핏물은 지금도 그 밑바닥에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전쟁 후 수많은 포탄이 떨어졌던 분지 안은 초토화됐고 38선 이북 지역이던 이곳의 원주민들은 모두 사라졌다. 전쟁 전 고요한 오지였던 이곳은 전쟁 후 일종의 ‘전리품’ 같은 수복지역이자 DMZ와 마주해 북을 향한 선전마을이 들어서게 되는 최전방 접경지역이 됐다.

뱀을 쫓아낸 돼지

특이하게도 돼지 해(亥)를 쓰는 해안면의 한자 지명에는 재미난 유래가 있다. 원래 해안 땅은 바다 해(海)를 써서 海安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런데 분지 안쪽 산기슭의 땅은 통풍이 원활하지 않아 음습한 곳이 많았고 뱀이 자주 눈에 띄었다. 마음 편히 밖에 집밖을 나가지 못할 정도로 뱀이 많아지자, 사람들은 뱀을 잡아먹거나 쫓아내곤 하는 돼지를 풀어서 키웠다. 뱀이 사라지자 해안분지는 그 이름의 한자처럼 편안한 땅이 되었고, 지역 이름에도 海 대신 음이 같은 亥를 쓰기 시작했다.

여기까지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이야기라면, 이 지명과 관련된 전설은 이것을 이렇게 비틀어 전한다. 때는 조선 초기, 주민들은 時祭를 지내러 온 덕망 높은 스님에게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뱀으로 인한 고통을 토로하고 퇴치 방법을 물었다. 스님이 일러준 비법은 고장의 지명을 바다(海) 대신 뱀과 相剋으로 알려진 돼지(亥)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그 후 주민들이 글자를 바꿔 쓰자 뱀이 이내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설화에 권위를 부여하는 주술적 효과는 돼지의 습성이 아니라 글자에서 나온 셈이다.

한편 돼지라는 동물은 이곳의 독특한 자연환경에 적응해 살아가던 사람들의 무던하고 인내심 많은 심성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전통적 관념에서 꾀 많은 동물의 표상인 뱀이 상황을 자기 식대로 통제하려는 태도를 드러낸다면, 돼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충실하고 순응하는 가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척박한 분지 지형에서 터를 닦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춥고 습한 이곳의 기후를 극복하는 것은 생존의 첫째 과제였다.

바다 같던 호수가 터지던 날

그런데 원래 해안이라는 이름에 왜 海가 쓰였을까? 오늘날 양구 사람들은 ‘한반도의 배꼽’을 자임하는데 먼 옛날의 이곳 사람들은 태백산맥 너머의 바다라도 보았던 것일까. 현재의 모습만 전부라고 믿으니 이렇게 시야가 좁아진다. 이곳의 지질 조건과 자연환경을 잠깐 살펴보면 정녕 사라진 것은 뱀이 아니라 ‘바다 같이 넓은 호수’였다는 점을 떠올릴 수 있다.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물은 둥그스름한 바위그릇 같은 분지 안에 가득 채워졌을 것이다. 둘레 22km에 수백m의 수심을 가진 大湖는 외부와 분리된 독자적인 생태계를 갖춘 영험한 산정호수의 경관이었으리라. 지금도 남아 있다면 아마 그 호수는 백두산 천지의 명성에 버금가는 한반도 중부의 ‘배꼽 우물’로 불렸을 것 같다. 태어나서 한 번도 바다를 보지 못한 뭇 생명들에게 그 호수는 바다의 너른 품을 가르쳐줬을 것이다. 

해안분지 들녘 안에서 바라본 풍경
해안분지 들녘 안에서 바라본 풍경

그런데 아주 오래 전 운명처럼 닥쳐 온 그 날, 약한 부위의 균열이 점점 심해지다가 산등성 한 쪽이 터져버렸을 것이다. 붕괴되는 댐처럼 호수의 물은 급류가 돼 단 하나의 물골로 빠져 나갔으리라. 지금도 나 있는 동쪽의 ‘당물골’은 사방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이 작은 개천들로 흐르다가 분지 중앙에서 합류해 흘러나가는 길이다. 그 해안분지의 물길은 군사분계선을 곁에 두고 흘러가서 인제군 서화면에서 소양강의 지류가 되고, 소양강은 흘러가 다시 북한강과 한 몸이 되어 서해까지 흘러간다. 지금도 분지 안쪽 600~700m 산비탈에서는 조개껍데기가 심심찮게 발견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해안면의 옛 이름에는 바다 같이 넓고 푸르렀을 호수에 대한 사람들의 그리움 또는 상상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호수가 사라지자 다양한 육지 생물과 함께 인간도 이곳에 걸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펀치볼을 처음 찾았던 선사시대 원주민들은 아마 한강을 거슬러 올라오다가 여기까지 다다랐을 것이다. 거대한 분지는 안으로 들어와서 아웅다웅 살아가는 생명들을 넉넉히 품어 안았다. 자연 지형이 방어벽을 구축하고 외부와 차단된 독자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해안분지는 그들에게 매력적인 삶터였을 것이다. 그래서 구석기 시대부터 초기철기 시대에 이르는 선사유적이 한 곳에서 층을 두고 발견된다. 과거의 호수 바닥은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오랜 생활 터전을 거쳐, 전쟁 이후 이곳에 들어온 주민들이 피땀으로 일군 논밭이 됐다.

화강암이 사라지고 수십억 살 변성암만 남는 시간

지질학적으로 보자면 해안분지는 억겁의 시간차를 두고 서로 다른 구성 물질과 밀도로 만들어진 암석들이 차별침식(differential erosion)되면서 만들어진 분지의 발달 과정을 잘 보여준다. 화채 그릇 모양의 바깥쪽을 이루는 높은 산지는 45억4천만 년 전에서 5억4천300만 년 전까지를 총칭하는 선캄브리아기(Precambrian time)에 형성된 변성암으로 구성돼 있다. 이에 반해 오목하게 침식된 바닥은 그보다 훨씬 이후의 지질시대인 2억2천500만 년 전~6천500만 년 전 중생대(Mesozoic Era)의 화강암이다. 즉 약 2억 년 전 지하 약 20km에서 마그마가 기존 암석인 변성암을 파고들며 형성된 화강암은 변성암과의 경계에서 균열, 침식, 풍화, 융기를 차례로 겪으며 분지의 바닥층을 이뤘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바닥이 침식될수록 변성암의 테두리 부위만 1천m 이상의 봉우리들로 남고, 분지에서 산등성까지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며 그곳에 고인 물도 웅숭깊어졌으리라.

을지전망대
을지전망대

그런데 분지 안에만 있다 보면 누구나 이곳을 한 눈에 조망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양구통일관’을 둘러보고 민통선 출입절차를 거쳐 꼬불꼬불한 도로를 올라가는 ‘을지전망대’는 펀치볼 전체를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가칠봉(1천242m) 능선에 자리한 이곳은 군사분계선에서 약 1km 후방에 있다. 가벼운 뭉게구름쯤은 날려버릴 듯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날 전망대에 올랐을 때, 가슴이 탁 트이는 그 장관 앞에서 느껴지는 청량한 기분은 화각과 조리개를 아무리 조정해도 카메라에 도저히 담아올 수 없다. 육안에 한 번에 담을 수도 없는 그 풍경을 멍하니 보고 있노라면 그 옛날 호수였다가, 평화로운 마을이었다가, 전쟁터였다가 다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접경지역이 된 이곳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런데 이곳 산군님 성미는 어찌나 야박하신지, 一望無際의 철원평야를 선사하는 소이산 정상 못지않게 쨍하게 맑은 아래 풍경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분지 아래는 그저 흐린 날씨 정도인데 전망대에서는 바로 눈앞의 풍경도 안개 속에 갇혀버리기 일쑤다. 운 좋게 해안분지 전체를 굽어보고 가는 사람들은 ‘내가 덕을 쌓았나 보다’는 작은 위안을 받고 하산한다. 

한편 해안분지는 한반도 중부 DMZ 지역의 지질·지형 유산인 ‘강원평화지역지질공원’으로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유네스코에서 지원하는 ‘지질공원’은 지역의 희귀한 지질·지형 유산과 그곳에서 서식하는 동·식물의 특성, 지역 사람들의 문화·역사 등 땅 위의 모든 것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자연환경보전제도를 일컫는다. 강원도의 지질 네트워크는 철원의 용암대지로부터 시작해 한탄강과 고석정을 거쳐 화천의 파로호, 양구의 해안분지와 두타연, 인제의 대암산 용늪, 고성의 화진포와 능파대에 이르기까지 20여 곳 넘도록 이어진다.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평화지역’이란 이름이 현실과 동떨어져 보였던 강원도의 지질공원은 2018년 봄부터 도래한 ‘한반도의 봄’ 이후 명실상부한 ‘생명과 평화의 공간’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연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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