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夢想의 시간 촉발하는 바슐라르의 촛불
夢想의 시간 촉발하는 바슐라르의 촛불
  • 이찬규 숭실대·불어불문학과
  • 승인 2018.08.06 11:1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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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읽기_ 『촛불』(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김병욱 옮김, 마음의 숲)

인터넷에서 찾아본 촛불의 가장 많은 연관 검색어는 ‘집회’와 ‘광장’입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합니다. 2002년 6월 두 명의 여중생 효순이, 미선이가 주한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사망했지요. 그 죽음에 분노했으나, 우리들은 죽음 이전과 이후에도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촛불집회는 그렇게 광화문에서 시작됐습니다.

프랑스 리옹에서도 매년 12월 8일이 오면 사람들이 사는 창가마다 촛불들이 켜지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도시 전체의 창가에서 촛불들이 타오르니, 겨울 거리가 따스할 정도였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그날 리옹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됩니다. 이백 오십년 전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 때, 리옹 시민들은 벨쿠르 광장으로 모였었지요. 그들은 촛불을 하나씩 밝힌 채 이 도시에서 흑사병을 쫓아내달라고 성모에게 기도했습니다. 병이 사라졌고, 그들은 지금까지 이를 ‘리옹의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흑사병이든, 박근혜 전 대통령이든 그들이 사라지는 동안 광장에 모여들었던 촛불의 거대한 행렬들을 우리는 잊지 못합니다. 바슐라르의 마지막 저서인 『촛불』은 ‘집회’와 ‘광장’으로 이어지는 촛불의 또 다른 세계를 소환합니다. 그러니까 촛불이 단독으로 켜져 있던 세계와 그 시간에 대해서입니다. 바슐라르의 책은 또한 홀로 어둠을 밝혀내던 촛불이 하나씩 모여들어 세계에서 유례없는 평화시위의 본보기를 만들어낸 그 연유에 대해서도 헤아리게 합니다.

초의 불꽃은 어둠을 밝히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능적 측면의 정점에는 전등이 있을 것이나, 바슐라르는 촛불 혹은 램프와 전등의 다른 점을 분명히 합니다. “결코 전등은 기름으로 빛을 만들던 그 살아 있는 램프의 몽상들을 우리에게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빛이 관리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의 유일한 역할은 스위치를 돌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만 기계적인 동작의 기계적 주체일 뿐이다. 긍지를 품고서, 우리 자신을 ‘불을 켜다’라는 동사의 주어로 구성하는 그 행위의 덕을 더는 볼 수 없다.”(112쪽) 어제의 심지와는 다른 오늘의 심지를 알맞게 돋우고, 거기에 두 손을 모아 조심스레 불을 켜는 ‘행위의 덕’은 기능적인 측면의 이점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현관문을 열면 자동으로 전등이 켜지는 오늘날, 전등 스위치를 손가락으로 무심코 올리는 인간을 “기계적인 동작의 기계적 주체일 뿐”이라고 한 바슐라르의 한탄은 무색합니다. 이제 우리는 AI를 따라 인간이 온전하게 ‘기계적 객체’가 되는 시대를 바라보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촛불이 전등과 다른 근본적인 차이는 촛불이 몽상의 시간을 촉발한다는 점입니다. 촛불이 몽상일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등을 직접 바라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러한 바라보기는 주위를 밝혀주는 당초의 기능에서 우리를 멀어져 버리게 합니다. 니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랴.” 그러니까 촛불은 빛의 깊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촛불을 마주하면서 빛 보다는 빛의 깊이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빛의 깊이는 “밤의 어둠의 깊이”를 해치지 않기에, 우리는 몽상의 시간으로 들어갑니다. 주위를 밝혀주면서도, 어둠의 깊이를 고즈넉하게 머물도록 하는 것이지요. 17세기 프랑스 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는 한평생 이러한 어둠의 깊이를 화폭 속에 담기위해 촛불을 바라보는 소년과 여인들을 그렸다고 하지요.

아, 화장실에 앉아 전등이 아니라 스마트폰의 푸르스름한 화면을 줄곧 바라보고 계신다구요?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지만, 앞에서 언급한 빛의 깊이와 정보의 바다는 다릅니다. 이제 정보와 댓글의 바다에서 심신이 곤궁하고 굳어가지는 않으신지 안부 묻습니다. 좀 더 질문을 넓히자면, AI가 인간의 몽상까지 대신할 수 있을까요? 옮긴이는 바슐라르의 “시적 몽상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 뿐만 아니라 “엷은 안개에 감싸인 듯한 그의 시적 문장들”에 한 번 더 놀란다고 술회합니다. AI가 “엷은 안개에 감싸인 듯한” 문장들을 생겨나게 하거나, 그 문장들을 읽으며 감탄할 수 있을까요. 『촛불』의 첫 장 제목은 「촛불들의 과거」입니다. 거기에서 어떤 ‘時節’에 대해 이야기하는 구절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이 사유하면서 꿈꾸고 꿈꾸면서 사유하던 시절, 촛불은 영혼의 고요를 재는 압력계일 수 있었고, 결이 고운 평온,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내려가는 평온의 척도일 수 있었다. 평온해지고 싶은가? 조용히 빛의 작업을 수행하는 가벼운 불꽃 앞에서 가만히 숨 쉬어보라.”(33쪽)         

옮긴이는 ‘관습적인 세계를 넘어서 좀 더 높은 超의식’에 이르는 두 개의 방식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는 과학적 사유를 통해 ‘개념’에 도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적 몽상을 통해 ‘이미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140-141쪽) 이미지란 무엇일까요? 권혁웅은 “주체의 감각이 세계와 맞닥뜨려 생성한 접면, 이것이 이미지”( 『시론』, 541쪽)라고 합니다. 촛불과 마주한 주체의 감각은 무엇보다 시각적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보도록 강요한다.”(11쪽) 하지만 바슐라르에게 있어서 좀 더 흥미로운 점은 그가 탈-시각적인 감각들을 통해서도 우리를 光物의 접면, 즉 촛불의 이미지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슐라르적 글쓰기의 출발점이 되는 ‘질료적 상상력’ 또한 대상을 단순하게 형태로 값을 매기는 시각적 차원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일상적인 의자를 가리키며 바슐라르가 “저건 의자가 아니고 공기야”라고 언명할 때, 세계는 조금 더 신나 보입니다. 

바슐라르의 촛불 또한 “이미지가 곧 시각적 이미지라는 고정관념”(홍명희,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67쪽)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합니다. “시각은 값싼 통일을 제공한다. 반면에, 불꽃의 미미한 속삭임은 요약되지 않는다.”(57쪽) 그러니까 그는 감각의 일원화를 넘어서 光物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촉구합니다. 퐁티 식으로 말하자면, “시각적 경험과 청각적 경험이 서로에게 잉태적인 유기체의 상태”(Ponty, 『Ph?nom?nologie de la Perception』, p.271)야 말로 ‘최초의 순수지각’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촛불은 불꽃으로 타오르며 자신을 소멸시킵니다. 주위를 밝히는 대신 소멸하는 것, 촛불로부터 촛농으로 흘러내리는 그 소리를 바슐라르는 “뜨거운 눈물의 쉬락거리는 소리(le Schrac des larrmes chaudes)”라고 부릅니다.

그날, 그때, 불꽃이 뜨거운 눈물이 되고, 그 눈물의 행렬이 함성이 되는 바를 광화문 광장에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LED 인조 촛불을 마다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아, 그리고 요즈음 향초라는 것이 유행인가 봅니다. 초가 타오르며 방향하는 것인데, 제가 싫어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너무 짙은 냄새는 초의 불꽃을 온전하게 바라보기 어렵게 합니다. 촛불에는 순수한 공기를 태우면서 내는 고유한 냄새가 있는 것이지요. 언젠가 김천 고향의 부엌에서 막 나오시는 할머니를 껴안았을 때, 치마에서 나던 그 불 냄새 같은 거 말입니다. 그때 할머니 말씀이 기억납니다. “에고, 우리 강아지 불 냄새 묻는다. 얼른 밥 묵자.”

이찬규 숭실대·불어불문학과.
프랑스 리옹 제2대에서 프랑스 현대시로 박사를 했다. 대표 논문으로 「알베르 카뮈와 김훈: 재난의 장소에 대하여」, 대표 저서로는 『불온한 문화, 프랑스 시인을 찾아서-랭보에서 키냐르까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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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선 2018-08-06 18:49:17
어쩌다 읽다보니 어느 새 끝까지 다 읽어버렸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