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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라이프
원더풀 라이프
  • 송호빈 성균관대·대동문화연구원 박사후연구원
  • 승인 2018.08.06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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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죽으면 ‘림보’로 간다. 천국도 지옥도, 심지어 연옥도 거짓말이다. 죽은 이는 그곳에서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주일을 머문다. 첫 사흘 동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추억 단 하나를 고른다. 남은 며칠 동안 림보의 직원들은 그 하나의 추억을 가능한 실제에 가깝게 재현해서 짧은 영화로 만든다. 마지막 날 극장에 다함께 모여 그 한 도막의 영화를 관람하고, 죽은 이는 그 한 장면만을 가슴에 품고서 영원히 저 세상으로 간다.

그 한 장면을, 어떤 이는 어렵지 않게 결정하고 어떤 사람은 좀처럼 찾아내지 못한다. 어떤 이는 쉼 없이 딴소리를 하며 말을 돌리고 어떤 이는 선택한 추억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어떤 이는 오래도록 침묵을 지키고 어떤 사람은 거짓, 그러니까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을 말한다. 그것은 비행 연습 중 조종석 창밖으로 빛나던 구름이거나, 어린 시절 오빠 친구들과 함께 갔던 무도회이거나, 통학 전차의 창밖으로 내민 머리칼에 스치던 바람, 멋진 남자와의 근사한 데이트 같은 것들이다.

그 한 장면을 이끌어내기 위해 림보의 직원들은 죽은 이와 끊임없이 대화한다. 때로는 가만히 듣기만 하고 이따금은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흔해빠진 추억을 너무 쉽게 선택한 소녀에게는 조금 더 뜻깊은 기억이 있을 거라고 조언해주기도 하고, 내 삶은 그저 무미하고 건조했다며 도무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노인에게는 기록과 기억은 다르니 참고만 해달라며 일생의 장면들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특별히 제공한다. 침묵에는 이따금 침묵으로 기다리며, 때로는 꾸며낸 이야기도 눈감아준다.

림보 직원들의 이 모든 과정은 기록에 의거한다. 죽은 이와의 첫 대면은 서류에 적힌 신상명세를 확인하는 일이다. 죽은 이가 구술하는 자신의 일생이나 선택한 추억의 배경․인물․사물․사건들을 종이 위에 하나하나 기록한다. 그것은 글이기도 하고 그림이기도 하다. 그러나 애초의 서류와 죽은 이의 말에만 의지하지는 않는다. 정확하고 리얼한 재구를 위해 그들은 관련된 자료들을 조사하고 검토하며 대조하고 고증한다. 그 자료들은 문서나 책이기도 하고 사진이나 영상이기도 하다.

그들은 밤늦도록 모여 앉아,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죽은 이의 삶과 그가 선택한 추억에 대해 보고하고 토론하고 정리한다. 일은 일이니 죽은 이의 추억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키지 말라고 선임은 후임에게 충고한다. 사전 로케이션을 갔다가 엉뚱한 풍경만 카메라에 담아와 혼이 난 후배는 선배에게 대든다. 또한 그들은 개개인의 추억을 실제와 가깝게 표현해낼 구체적인 방법과 기술을 연구한다. 실제라고는 하지만 그건 사실, 죽은 이의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기억, 그가 살았던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환경, 그리고 지금 여기서 구현 가능한 테크닉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내는 일이기도 하다.

이상은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 1962~) 감독의 1998년 작 「원더풀 라이프」의 이야기다. 한문학(漢文學)을 공부하는 나는 이 영화를 보며, 림보의 직원들이 하는 일이 한문학자의 그것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림보의 직원은 삶과 죽음, 그 중간 세계의 존재들이다. 그들은 이미 죽었으되 아주 죽지는 못하고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일한다. 그 까닭은, 정작 자신의 추억은 찾아내지 못해 림보에 남겨졌기 때문이다. 자신은 스스로의 삶을 대변할 그 한 장면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아내지 못한 채 ― 혹은 짐짓 외면하며 ― 죽은 이의 그것을 찾아주기 위해 죽은 이와 끊임없이 대화하고 자료를 뒤적이며 또다시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 속에서 마음의 평정과 감정의 기복을 오가며 어쩌다 문득 제 삶의 소중한 한 컷을 깨닫기도 하는 것, 이도 어쩌면 한문학자의 삶과 닮기도 했다.

송호빈 성균관대·대동문화연구원 박사후연구원.
고려대에서 『화동창수집(華東唱酬集)』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메이지대(明治大) 문학부 초빙연구원, 일본 동양문고(東洋文庫) 외래연구원 등을 지냈다. 현재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박사후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강의하며, 『『화동창수집』의 세계 — 근대전환기, 취산(聚散)하는 한문문헌의 마지막 풍경』을 집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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