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와 페미니즘
하루키와 페미니즘
  • 조영일 문학평론가
  • 승인 2018.08.06 10:1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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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남문학’이라는 표현이 유행하고 페미니즘문학이 낡은 한국문학의 대안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박범신, 김승옥, 김훈의 소설들이 비판을 받았고, 그 불똥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까지 옮겨갔다. 하루키 소설이란 따지고 보면 순전히 남성판타지로 구축된 ‘아재문학’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통계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는 것 같다. 일단 30-40대의 독자들이 많긴 하지만, 소위 ‘하루키 세대’라고 불리는 40대와 하루키를 잘 모르는 20대의 차이가 생각보다 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녀비율을 놓고 보았을 때도 거의 전 연령대에서 여성독자가 남성독자를 능가한다. 이는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 그것은 물론 한국남자와 비교됨으로써 생긴 후광 덕분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그래도 하루키는 혼자 요리도 하고 다림질도 할 줄 안다는 것이다. 

확실히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하루키도 결국 남성중심주의적 작가로 분류될 만한 하다. 하지만 하루키 역시도 소위 정치적으로 올바른(PC주의적) 페미니즘에 대해 일찍부터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미국의 한 강연장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당신은 이제껏 남성작가만 번역했습니다. 의식적으로 그런 겁니까? 왜 여성작가의 작품은 번역하지 않았습니까?” 이에 대해 그는 번역할 작품을 선택할 때 작가의 성별은 고려대상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작품 자체라고 말한다.

한국의 한 칼럼리스트는 바로 이 에피소드를 문제 삼으며 물론 하루키가 일부러 남성작가만 번역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선택된 작품 대부분이 ‘결과적으로’ 남성작가라면, 그것은 무의식적으로나마 여성작가를 열등한 존재로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고 비판한다. 논리적으로 보면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우리는 문학을 읽을 때, 의식적으로 언어와 지역을 고르게 분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편집자주: 하루키 산문에 자주 등장하는 대상은 고양이, 아내, 재즈, 소설 등이다. 위는 하루키의 산문집 중 하나인 『이윽고 슬픈 외국어』(문학사상)의 표지. 본문에서 다뤄진 하루키 에피소드는 「건강한 여성들에 대한 고찰」에 등장한다.
편집자주: 하루키 산문에 자주 등장하는 대상은 고양이, 아내, 재즈, 소설 등이다. 위는 하루키의 산문집 중 하나인 『이윽고 슬픈 외국어』(문학사상)의 표지. 본문에서 다뤄진 하루키 에피소드는 「건강한 여성들에 대한 고찰」에 등장한다.

그런데 하루키는 이 에피소드 이전에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먼저 들고 있다. 그것은 “부인은 무슨 일을 하느냐”고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곤혹스러움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가정주부죠”하고 말했는데 상대방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개인비서와 편집자 역할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작업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지만 책표지에는 당신 이름만 나오지 않느냐’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고 한다.

요컨대 그들의 눈에는 하루키라는 작가는 아내를 비서나 하녀로 부리면서 자신의 이름만 드러내는 가부장적 남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실비아 플러스나 카미유 클로델을 호출하여 그들의 비극적 생애를 환기시키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하루키는 이 문제에 대해 비서를 채용하여 잡무를 맡기고 아내로 하여금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며, 만약 그렇게 함으로써 아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에 대해 자신은 다른 의견이 없다고 말한다. 다만 아내가 아직까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한 신문사의 여기자는 하루키의 부인을 부러워하며 “대체 전생에 뭔 공을 쌓았기에 이런 남편을 얻은 거야?”라고 물은 적이 있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이런 비판을 가할 수 있다. 하루키 부인이 아직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실제 우리는 최근 ‘페미니즘의 세례’ 덕분에 지난날의 경험이 착취나 폭력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고백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매우 근대문학적인 방식이지만 말이다.

이에 대한 하루키의 대답은 대충 다음과 같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각자 사정이 있으며 전 세계의 모든 여성이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당신은 제대로 인생을 살고 있느니 없느니 단언할 수 있는가? 나는 주장하는 사상이 옳든 그르든 무언가를 등에 업고 무턱대고 큰소리치며 거들먹거리는 사람은(남자든 여자든) 기본적으로 신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조영일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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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lsjwka 2018-08-06 12:48:38
이게 무슨 미친 소리에요
페미니즘 문학이 한국 문학의 대안?
평론가 맞습니까?
그런 불쏘시개를 무라가미 하루키 소설들이랑
비교하다니 너무하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