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 / 목사·'당대비평' 편집주간
'저자의 죽음'이 일반화된 요즘, 저자의 강렬한 힘이 돋보이는 두 권의 자전적 저술에 관한 글을 쓰자니 감회가 새롭다. 평안북도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게이오대에서 수학하고, 해방 후 미국으로 건너가 경제학 교수로 지내면서 한국 정권사에도 관여한 최기일 박사의 회고록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
그리고 미분기하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로 남민전 사건 등 2번이나 옥살이를 한 양심적 지식인 안재구 박사가 출옥 후의 여생에서 아들과 함께 쓴 자전적 기록 '아버지, 당신은 산입니다'가 그것이다.
아름답지만 불온해보이는 기억의 정치
우선 자전적 저술은, 저자가 우회적이거나 은폐적이기보다는 공공연히 자기를 드러냄으로써 글의 의미 구성에 개입하는 특징을 갖는다. 이때 저자는 '기억'을 활용한다. 기억하는 시점은 항상 '지금 여기'지만 기억의 대상은 항상 '과거'다. 기억한다는 것은 현재의 시점으로 과거를 소환하는 작업이다. 이것은 현재로 소환되지 않는 과거의 요소도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우리가 '망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요컨대 '기억하기'와 '망각하기'는 저자의 의식·무의식적인 편집 작업의 결과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이러한 기억의 편집이 필요한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저자의 '현재의 욕망'을 떠올린다. 그것은 지금 욕망이 억눌려 있음을 의미하며, 이는 '과거'의 소산이다. 과거에서 현재로 이르는 역사 때문에 자신의 욕망이 억눌려 있다는 문제의식, 그 욕망에 대한 '기억의 정치'라는 관점에서 자전적 글쓰기가 요청된 것이다.
이 두 책은 바로 그러한 자전적 저술에 속한다. 특히 친일이 청산되지 않은 채 전개된 역사는 그들의 억눌린 욕망의 공통 기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어온 모든 삶의 질곡을 하나의 문제에서 기인한 것으로 단순하게 환원시키고 있다. 개인사의 모든 위기는 '침탈당한 민족'이라는 역사의 위기의 반영에 다름 아니라는 얘기겠다. 이것은 자신을 민족과 동일시하면서, 민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자신의 아픔을 민족의 아픔으로 이해하는 志士적인 공동체주의 태도와 연결된다.
아마도 이러한 사실이, 이 책들이 독자의 관심을 끌 것이라는 출판인들의 판단에 주된 영향을 끼친 요소였을 듯싶다. 한 사람은 비교적 온건한 개혁주의자이고, 다른 사람은 매우 급진적인 혁신주의자임에도, 그 현격한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자신의 좌절된 현실의 욕망과 동일시할 알리바이를 이 두 저자의 삶에서 얻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그들은 당대의 대단한 지식인이었음에도, 민족의 좌절된 운명처럼 억눌린 욕망의 '슬픈 주체'가 돼야 했던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실감나는 영웅들
이러한 종교적 구원의 메커니즘은, 책에 접한 독자들만이 아니라, 글 속에서 저자들 자신들에게도 작동되고 있음을 나는 본다. 저자들은 공교롭게도 자신의 민족에 대한 지사적 신념, 민족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고 아픔과 기쁨을 함께 하는 신념적 정당화의 계보를 그들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로부터 얻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이때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는 현실의 구체적인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이상화되고 절대화된 존재의 이미지다. 그리하여 아버지-아들의 계보, 혹은 할아버지-손자의 계보는 곧 민족의 계보이며, 그들이 꿈꾸는 민주주의의 계보이기도 하고, 내일의 종국적 해방을 향한 구원론적 계보이기도 하다.
이 대목은 여성주의자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남성 가부장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의 부성적 계보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들이 추구하는 이러한 가치들에서 '어머니' 혹은 여성은 항상 부재하는 이름이며 결핍의 존재라는 점이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