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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교수
‘가짜’ 교수
  • 이덕환 논설위원/서강대·화학
  • 승인 2018.08.06 09:4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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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이덕환 논설위원/서강대·화학

사기꾼들이 개최하는 ‘가짜 학술회의’(fake conference)를 단골로 찾아다니는 교수들에 대한 충격적인 보도가 있었다. 법학·교육학·정치학에서 과학기술과 문화·예술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학문 분야를 망라하는 가짜 학술회의의 단골 중에는 명문대 교수들과 대학원 학생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십여 명씩 떼를 지어 참가하는 우리 교수들의 진기한 모습을 외국 언론이 주목할 정도다. 돈만 내면 무엇이나 그럴듯한 학술논문으로 둔갑시켜주는 가짜 학술지(fake journal)도 있다.

언론이 폭로한 WASET의 가짜 학술회의는 단순히 수준이 낮은 저질 학술회의가 아니다. 주제나 분야가 특별히 정해져 있지도 않은 난장판에 불과한 것이다. 사기꾼이 마련해준 호텔의 작은 회의실에서 전혀 다른 전공의 참가자들 십여 명이 모여 앉아 각자 황당한 ‘원맨쇼’를 하고, 단체 사진을 찍는 것이 전부다. 그럴듯한 참가 증명서를 발급받는 것이 진짜 목적이다. 가짜 학술대회에서 ‘최우수 논문 발표상’을 받았다고 언론에 떠들썩하게 홍보하는 유명 대학의 교수도 있다. 

가짜 학술회의에 참가한 교수들의 변명은 몹시 부끄럽고 옹색하다. 정체를 몰랐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가짜에 이골이 난 대부분의 단골 참가자들은 회의장을 찾는 수고조차 아까워하는 것이 현실이다. 가짜 학술회의에서의 영어 발표는 학생들에게 절대 요구할 수 없는 反교육적 경험이다. 가짜가 국내 학술단체들이 개최하는 학술회의보다 수준이 높다는 주장도 모욕적인 것이다. BK21과 같은 지원 제도가 가짜에 대한 유혹을 부추긴다는 주장도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가짜 학술회의를 개최하는 사기꾼이 노리는 것은 학자들의 업적을 ‘質’이 아닌 ‘量’으로 평가하는 왜곡된 평가 제도다. 계량화된 평가 제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학자들의 입장이 난처한 것은 사실이다. 임용·승진·재임용은 물론 보수까지 논문·특허의 수와 학술회의 참가 횟수, 그리고 연구비 규모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에서는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가짜 학술회의 참석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언론이 고발한 WASET의 가짜 학술회의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SCIGen이나 애플 iOS로 만들어낸 엉터리 가짜 논문(fake paper)을 실어주는 ‘가짜 학술지’(fake journal)도 있다. 멀티미디어 기술과 인터넷 때문에 발생하는 심각한 부작용이다. 엉터리 단체들의 ‘약탈적 출판’(predatory publishing)은 이미 미국·캐나다·호주 등에서도 심각한 사회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미국의 연방통상위원회(FTC)가 OMICS, iMedPub, 컨퍼런스 시리즈 등을 사법기관에 고발해놓은 상황이다. 사이언스 퍼블리싱그룹도 의심스러운 단체로 알려지고 있다.

가짜 학술회의에 참가한 학자들에 대한 확실한 대책이 필요하다. 국가 예산을 낭비한 것도 문제이고, 엉터리 업적으로 평가 제도를 훼손한 것도 심각하다. 학자적 양심과 자존심을 포기하고, 학생들에게 반교육적 경험을 강요한 것은 쉽게 용납하기 어렵다. 가짜 학술회의 참가에 낭비한 연구비를 회수하고, 엉터리 업적이 반영된 평가도 바로 잡는 노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 대학의 자정 노력에만 맡겨두기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학술단체들의 학술회의와 학술지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관리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정확한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운 소규모 영세 학술단체를 과감하게 정비해야 한다. 학문의 자유를 핑계로 만들어놓은 불필요한 칸막이는 제거해야 한다. 수준 이하의 학술회의와 학술지 때문에 낭비하는 비용과 시간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렵다. 정부의 지원금을 받아내기 위한 세계적 학술지 발간 정책도 수정이 필요하다. 진정한 학문적 전통을 바로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이덕환 논설위원
이덕환 논설위원

 

 

이덕환 논설위원/서강대·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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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a 2018-08-09 00:19:32
애플iOS는 SCIGen과 동의어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