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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 오늘의 노을이 지겹지 않은 이유
'변산‘, 오늘의 노을이 지겹지 않은 이유
  • 문광호 기자
  • 승인 2018.07.26 16: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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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건 노을밖에 없네."

영화 「변산」을 관통하는 시 한 구절. 사람들이 더 이상 찾지 않는 고을에도 자연은 황금빛 노을을 선사한다. 「변산」은 도시의 때 묻음을 태워버릴 수 있는 노을로 가득 찬 '고향'으로 그려진다. 주인공 학수는 동맥처럼 뻥뻥 뚫린 강남보다 얼기설기 실핏줄처럼 골목으로 이어진 강북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삶이란 더럽고 치사하지만 그럼에도 뜨거운 감정이 살아 숨 쉬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꿈에 대한 열정을 좌절시키는 서울은 어느새 떠나야할 곳. 초등학교 동창 선미의 부름에, 아버지의 와병에 고민을 하면서도 결국 「변산」으로 향함은 그의 내면에 고향에 대한 진심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변산」에서 이준익 감독은 우리에게 잘 포장된 고향을 선물한다. 신애에게 밀양이, 「살인의 추억」에서 화성이, 종구에게 곡성이 그러하듯 추악한 인간의 본성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으로 시골의 풍경은 우리에게 익숙한 클리셰다. 이준익 감독은 구태여 이 클리셰를 뒤집으려 하지 않는다. 「변산」은 마찬가지로 일견 순수한 사람들의 도시이며, 실은 각자의 본능에 충실한 사람들의 터전이다. 다만, 「변산」이 다른 영화 속 지역의 모습과 다른 점은 변산에서의 갈등은 증폭되지 않으며 곧잘 화해의 길로 접어든다는 점이다.

극 중 가장 큰 갈등은 학수와 아버지에게서 비롯된다. 떠나려 해도 떠나지 못하는 학수와 붙잡고 싶어도 붙잡을 수 없는 아버지 사이의 기묘한 긴장은 극적 서사에 의해 간신히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 이별을 고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긴장 속에서 영화는 학수와 아버지를 붙들어 놓는다. 그리고 그 긴장을 붙들어 놓는 매개는 선미다. 서울에서 ‘배려놓은 호로 자식’, 학수에게 아버지의 진심을 전하려는 선미의 노력은 조심스럽지만 강렬하다. 용대와 결판을 지으러 떠나는 학수의 차에 선미가 무작정 올라타는 장면은 그 하나로 영화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 처음 시를 쓰던 때의 순수한 마음을 그 순간 그대로 사랑해온 선미는 학수에게 10년 만에 발견한 타임머신과 다름없다. 선미와 아버지 그리고 「변산」을 밀어내려 해도 밀어낼 수 없는 이유가 결국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영화는 긴장의 끈을 놓아준다.

자극적인 장면 없이도 긴장을 이어갈 수 있는 서사의 힘은 영화의 장점이다. 그러나 그 장점이 독이 되기도 한다. 자극 없이 끌어온 갈등의 해결은 여전히 자극적일 수 없으며 따라서 대단히 작위적이다. 처절해야할 갯벌에서 학수와 용대의 싸움은 어릴 적 철부지들의 주먹다짐으로 묘사된다. 소식을 듣고 삼삼오오 모여든 동창들이 교가를 부르며 학수와 용대를 응원하는 장면은 급작스럽다. 이 장면을 통해 감독은 「변산」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떻게 바라봐야하는지 관객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다. 

학수가 스스로 고백하듯 금의환향 콤플렉스는 「변산」을 지배하는 키워드다. 세상을 경험하고 돌아온 내지인은 고향에 거부당하거나 거부하지만 결국 고향을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닫는 지식인의 각성. 무진기행 류의 동경과 사랑 이야기도 선미와 학수의 관계에서 반복된다는 점에서 「변산」은 기존의 문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지식인이 랩퍼로, 순수한 시골 소녀가 소설가로 나오는 점은 시대적 변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변산」이 사랑스러운 이유는 지독한 클리셰의 반복을 반짝이는 감수성으로 승화시키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풀어내는 학수의 랩은 그의 사투리만큼이나 진심이 담겨 있다. 지고지순한 선미의 사랑은 스스로를 감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답답하지 않다. 무엇보다 감수성을 무리 없이 담아내는 그들의 연기가 「변산」을 빛낸다. 때문에 「변산」의 신파는 슬프지만 과하지 않고, 「변산」의 웃음은 즐겁지만 산만하지 않다. 이웃의 이야기를 듣듯 편안한 감정의 흐름에 마음을 놓아도 좋다. 그리고 그것은 매일 마주하는 노을이 지겹지 않은 이유와 다르지 않다. 차가운 일상에 마음을 녹일 노을 진 풍경이 필요할 때, 영화 「변산」으로 잠시 휴가를 떠나보는 건 어떨까. 

문광호 기자 moonlit@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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