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을 잇다, 사람을 잇다
학문을 잇다, 사람을 잇다
  • 박지윤 서울대·법학연구소 선임연구원
  • 승인 2018.07.16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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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할머니 집은 초가지붕이었다. 소박하지만 생명이 움트고 숨이 오가는 살아 있는 지붕이었다. 초가지붕 아래서는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라 굼벵이와 쥐도 살고 제비도 둥지를 틀었다. 어린 내 눈에 보기에 기와지붕이 양반들의 관을 닮았다면, 초가지붕은 산등성이와 어미들의 젖을 닮아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초가지붕은 손이 많이 가는 지붕이기도 하였다. 때를 맞추어 지붕을 새로 이으려면 잘 매인 짚단과 새끼로 이어야 한다.

자, 그러면 새끼는 어떻게 꼬느냐. 낱낱이 떨어진 짚을 잘 잡아서 한데 설설 엮으면 새끼줄이 된다. 글로는 이렇게 쉽게 썼지만 몸으로 배우지 않으면 새끼를 만들기 어렵다. 지푸라기 한 줌 손에 넣고 한껏 애써 비벼 보았자 전부 흩어진다. 초가지붕을 엮고 매는 것도 마찬가지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마을 사람들이 지붕을 오르내리며 함께 해주어야 한다. 애석하지만 점차 시골의 지붕이 슬레이트로 바뀌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나자 초가지붕은 물론이고 여기에 관한 지식도 끊겼고 오늘은 이렇게 글로만 기려질 뿐이다.

나는 문자를 몰랐던 몸에 담겼던 지식과, 학(學)이 되지 못한 술(術)과, 내게로 이어져오는 당신의 삶을 담아낼 연결고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 생각은 여느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책상 앞에서만이 아니라 바닥을 닦고 밥을 하며 갓난아이를 돌보는 동안에도, 그리고 원로 선생님들과 스승님의 지도와 동료 연구자들의 만남 속에서도 계속되었다. 특히 아이의 나이만큼 경력이 단절되었던 어머니 연구자들의 눈물겨운 자매애가 없었더라면 섣불리 연구를 계속할 용기조차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흩어지는 시간을 붙잡아 부비는 듯 간절히 서로를 위해 빌어 주었고 그 시간을 동아줄 삼아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연구도 맥을 잡아갈 수 있었다.

테크네와 아르스

고대 희랍에서 술(術)은 테크네(techne)를 뜻한다. 예를 들면, 우리 할아버지의 새끼 꼬는 비법과 솜씨도 테크네에 해당하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테크네는 “엮다, 얽어서 짜다, 꼬이게 하다. 생산하다, 저술하다. 자식을 낳다”는 뜻의 인도-유럽어 어근 텍(tek)에서 파생된 단어로, 후에 라틴어 아르스(ars)로 번역되었으며 “결합하다, 연결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르(ar)를 어근으로 오늘날 예술을 의미하는 영어 아트(art)가 되었다. 애초에 테크네는 제작자의 작업에 의해 주어진 재료를 규칙에 따라 만들어내는 지적인 활동과 관련이 있었다. 그런데 아르스(ars)에는 학적인 의미가 가해져서 기예, 예술만이 아니라 학술의 의미까지 담기게 되었다. 테크네와 아르스가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법의 테크네’와 ‘법의 아르스’라는 점에서 양자를 함께 논의해 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법령과 법리의 대입이 아니라, 사안과 법을 엮어서 산출물을 만들어가는 법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게 된다. 특히 로마인들은 법학을 성립시키는 과정에서 법을 아르스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키케로는 법이 융숭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져야 함을 천명하며 인간다운 삶과 법이 분리되는 것을 막기 위해 새롭게 학문영역을 만들기까지 하였는데, 그것이 인문학의 시작이 되었다. 이후로도 법을 아르스로 파악하려는 시도는 법이 지나치게 형식화되어 인간다운 삶과 동떨어질 때 다시 일어나게 된다. 오늘날 법학교육 및 법교육에서 법인문학, 법문학, 교양법학 등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도 ‘아르스가 되는 법’이라는 기획과 무관하지 않다. 

나는 아르스로서의 법의 기획이 법을 통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지붕을 세우는 것이라고 가늠해 본다. 지붕은 섣불리 하늘을 대신하지 않고 머리 위를 덮어서 사람으로 살 공간을 마련해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지붕은 자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내어야 하는 것이다. 지붕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생존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 속에서는 관계를 맺기조차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그 가운데에서 한국연구재단은 이제 첫 발을 내딛는 학문후속세대에게 좋은 기회를 열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연구자들의 현실을 떠올려 볼 때면 지속적으로 연구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또 다른 방안이 없을지 여전히 고민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자기 머리 위만 가린다고 해서 그것을 지붕이라고 할 수도 없고, 각자가 우산 하나에 의지해서 비바람을 오래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어려운 때일수록 서로를 격려하며 모두가 살 수 있는 지붕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기회는 순식간이고 경험은 믿을 수 없으며 판단은 어려운 데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이 때의 예술이 뜻하는 것이 바로 아르스다. 우리의 아르스로 사람이 함께 살 수 있는 지붕을 엮으라.

박지윤 서울대·법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이화여대에서 법철학으로 박사를 했다. 법에서 감성의 역할에 주목하며 아르스로서의 법과 문화예술법이론에 대해서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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