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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말에서는 왜 ‘로동당’, ‘랭면’일까? 
북한말에서는 왜 ‘로동당’, ‘랭면’일까? 
  • 교수신문
  • 승인 2018.07.16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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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_ 언어적 차별화를 통한 정체성 만들기

남한 사람들이 북한말을 들었을 때, “아! 저 사람, 북한에서 온 사람이네!”라고 판단하는 첫 번째 기준은 그 사람이 구사하는 억양이다. 억양의 특색과 함께 북한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로동당’이나 ‘랭면’처럼 단어의 첫소리에서 ㄹ(=어두 ㄹ)을 발음하는 것이다. 남한 사람들은 이 발음만 들어도 바로 북한말임을 안다. 남한에서는 이 어두 ㄹ을 ㄴ으로 바꿔 ‘냉면’, ‘노동당’으로 발음하기 때문에, ‘랭면’이나 ‘로동당’과 같은 발음은 청각적으로 뚜렷하게  인지되는 북한말의 특징이다.

북한말은 왜 남한말과 달리 어두 ㄹ을 발음할까?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을까? 아니다. 이 발음은 1946년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1946년 8월에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합당하여 탄생한 조선로동당의 명칭이 어두 ㄹ 발음의 그 출발점이다. 당시 당의 명칭을 ‘노동당’으로 할 것인지, ‘로동당’으로 할 것인지 논의하다가 ‘로동당’이 채택됐다. ‘조선로동당’으로 결정되면서 신문의 이름도 ‘로동신문’(1946.9)으로 바뀌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당시에 북한은 남한과 같이 「한글 마춤법 통일안」(1933년)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 통일안 규정에는 어두 ㄹ을 모두 ㄴ으로 발음하도록 한 이른바 두음법칙이 있었다. 그런데 ‘로동당’과 ‘로동신문’이 확정되면서 이 규정도 바꿀 필요가 있었다. 이 일에는 북한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국어학자 김수경이 나섰다. 김수경은 1947년에 「로동신문」을 통해 「한글 마춤법 통일안」을 비판하면서 어두에 ㄹ(ㄴ포함)을 표기하고 발음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1948년에 「조선어 신철자법」을 제정하면서 어두에서 ㄹ과 ㄴ을 살려 쓰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에 따라 북한에서는 남한과 달리 ‘로동’과 ‘랭면’, ‘녀성’과 ‘념원’으로 쓰고 발음하게 되었다. 1966년 5월 14일에 발표된 김일성의 담화에서는 서울말을 중심으로 한 ‘표준어’를 버리고, 평양말을 중심으로 한 ‘문화어’로 “조선어의 민족적 특성을 옳게 살려 나갈 데”를 강조했다. 이 담화는 이른바 ‘주체사상’과 직결돼 있다. 1970년대부터 전개된 문화어 정책은 남한과 차별화된 북한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방편의 하나였다. 남한의 ‘표준어’와 차별화시키면서, 북한 문화어만의 정체성 드러내기 위해 어두 ㄹ과 ㄴ을 가진 한자음을 本音대로 표기하고 발음하는 규정을 만들었던 것이다. 북한은 남한과 달리 어두의 ㄹ과 ㄴ을 표기하고 발음함으로써 남한과 차별화된 언어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북한 정권의 주체성을 세우려 했다. 

언어적 차별화는 글이 아니라 말소리의 차이를 통해 가장 분명하게 달성할 수 있다. 눈으로 읽는 문자보다는 귀에 들리는 말소리가 언어 정체성을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쓰는 말소리를 듣고 출신지를 알 수 있고, 그의 교육 정도나 사회적 지위까지 짐작해 낼 수 있다. 이처럼 말소리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뚜렷한 징표이다. 그래서 북한은 어두의 ㄹ과 ㄴ을 글로 표기할 뿐 아니라 발음하는 의무 규정을 두고, 이 규정에 따라 발음하도록 교육과 방송매체를 통해 강력히 실천해 갔다. 이후 5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오늘날의 북한말에서는 어두 ㄹ과 ㄴ의 표기와 발음이 상당한 수준으로 자리 잡게 됐다. 어두에서 ㄹ과 ㄴ을 표기하고 발음토록 한 북한의 어문규정은 남한말과의 차별성을 확보하면서 북한말의 정체성을 만들어 낸 것이다. 북한의 언어 차별화 정책은 일단 성공한 듯이 보인다.

어두 ㄹ과 ㄴ을 살려 써야 한다는 북한의 주장은 ‘勞·冷·女’ 한자음이 본래 [로,랭,녀]라는 사실을 명분으로 삼았다. 북한은 [로,랭,녀]야말로 ‘올바른 발음’, 즉 正音이라 했다. 이와 비슷한 명분은 조선후기의 평안도 방언에서 ㄷ>ㅈ, ㅌ>ㅊ과 같은 구개음화 발음을 실현하지 않았던 역사적 사실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조선의 다른 지역에서는 ‘天地’를 ‘천지’라고 발음했지만 평안도에서는 ‘턴디’로 발음해 ㄷ 구개음화를 수용하지 않았다. 평안도 출신으로 벼슬길에 나아간 백경해(1765~1842)는 ?我東方言正變說?이란 논설문에서 조선의 七道가 모두 세종이 정한 정음을 벗어났지만 평안도 사람들은 그것을 지켜오고 있음을 강조하며 자부심과 긍지를 강하게 표현했다. 평안도 사람들의 이러한 언어 태도에는 평안도에 대한 정치적 차별(오수창 참고)과 이를 극복하려는 집단의식이 깔려 있다. 조선시대 평안도 사람들은 ‘正音’을 지켜낸다는 명분으로 ㄷ구개음화를 거부해 발음상의 차별화를 만들어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평안방언의 ㄷ구개음화 미실현과 현대 북한어에서의 어두 ㄹ의 실현은 언어적 차별화를 통한 정체성 구축이라는 측면에서 공통성이 뚜렷하다. ㄷ>ㅈ 변화를 거부하고 다른 지역과의 언어적 차별화를 꾀한 평안도 사람들의 역사적 경험이 현대 북한에서 새롭게 변용돼 나타난 것이 바로 어두에 ㄹ을 발음하는 ‘로동당’과 ‘랭면’이다. 그리고 어두 ㄹ을 표기하고 발음토록 한 북한의 어문규정은 문화어의 언어적 차별화를 이루어내면서 북한이 의도한 주체성 만들기 정책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안미애 동국대 교수(파라미타칼리지), 홍미주 경북대 강사(국어국문학), 백두현 경북대 교수(국어국문학과)가 공동으로 발표한 「북한 문화어의 어두 ㄹ, ㄴ 규정을 통해서 본 언어 정체성 구축과 차별화 방식 연구」(<어문론총>76호, 한국문학언어학회, 2018.7)를 바탕으로 풀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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