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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의 戰績碑,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양구의 戰績碑, 우리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연구단
  • 승인 2018.07.09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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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서 강화까지 경계에 핀 꽃, DMZ 접경지역을 만나다_ 14. 도솔산지구 전투 위령비 - ‘피의 능선’ 전투 전적비 - ‘펀치볼’지구 전투 전적비 - 백석산지구 전투 전적비 - 양구통일관

빨리 끝나야만 했던, 하지만 쉽게 끝나지 않았던 高地戰 

2011년에 개봉돼 흥행한 영화 「고지전」(감독 장훈)의 마지막 전투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리는 빨갱이랑 싸우는 게 아니고 전쟁이랑 싸우는 거야.” 전쟁이라는 행위 자체가 전쟁의 대상이 돼버리는, 이 모순적 상황은 영화 전체를 걸쳐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주인공은 彼我의 ‘구분 없이’ 뒤섞인 시체가 쌓여 있는 고지를 비틀거리며 내려온다. 적은 ‘적’이 아니고, 승리는 결코 ‘승리’가 될 수 없는 전쟁에서 결국 남는 것은 이름 모를 고지 그 자체였다. 이렇듯 고지쟁탈을 위해 벌어진 전투들은 6·25전쟁의 핵심에 위치한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피아를 막론하고 결코 그 마지막 전투를 원하지 않았다. 휴전 조인과 협정 발효 사이의 12시간 동안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지탈환전에 내몰렸던 생명들의 비참함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였다. 그런데 영화가 단순히 영화로만 관람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그려내는 내용이 실제와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6·25전쟁은 3년 1개월이나 되는 전쟁 기간의 약 70%를, 현재 군사분계선 일대의 소모적인 전투로 채운 특이한 양상의 전쟁이었다. 그래서 오늘날의 군사분계선 일대는 1951년 7월 10일 휴전교섭 이래 정전에 대비해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해야만 했던’ 치열한 고지전이 밤낮으로 진행됐던 공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양구의 주요 능선과 골짜기들은 6·25전쟁 중 가장 처참하고 치열했던 ‘高地戰’이 벌어졌던 장소들이었다. 특히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6.25전쟁에 참여한 미국 종군기자에 의해 이름 붙여진 ‘펀치볼(Punch-Bowl)’로만 기억되는, 양구 ‘亥安盆地’를 둘러싼 고지들은 지지부지한 휴전협상 속에서 수많은 이들의 생이 의미 없이 사라져갔던 비극의 장소였다. 그래서일까. 다른 격전지와 달리 양구의 격전지에 대한 표현은 더욱 직접적이다. 철원의 ‘백마고지’가 은유적 표현이라면, 양구 지역은 ‘피의 능선((Bloody Ridge)’과 ‘斷腸의 능선’ 같이 그 비극성이 뚜렷하게 직감되는 직접적인 표현의 전적지가 다수이다.  

양구 펀치볼 전경

실제로 6·25전쟁사는 양구 해안분지의 고지들에서 약 221일 동안 벌어졌던 주요 전투를 9개, 사상자 수를 약 25만 여명으로 압축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들은 백석산, 펀치볼, 도솔산, 피의 능선 등 핵심 전투들이 벌어진 고지들의 이름을 딴 ‘전적비’ 속에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전쟁기념물은 특정한 관점에 의해 선별되고 구성된 기억을 보존하고 전달하려는 목적이 전제돼 있다. 그래서 그것은 종종 전쟁이 남긴 상처와 고통에 대한 성찰적 기억보다는, 전쟁 승리의 영광과 환희를 채색하는 방식과 가깝게 만들어지곤 한다. 탑과 비석은 그러한 목적달성에 가장 적합한 전쟁기념물이었다. 2017년 기준 한국의 전쟁기념물 1155개 중 86%인 1002개를 탑과 비석이 차지하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 참고). 그렇다면 이제 다시 물어야 한다. 우리들은 이 전적비를 통해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참혹한 고지전의 시작, ‘도솔산지구 전투 위령비’

양구의 31번 국도를 따라 해안면 방향으로 진입하다보면 ‘돌산령터널’을 마주하게 된다. 이 터널 옆에 있는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몇 킬로 오르다보면 ‘도솔산지구 전투 위령비’를 만나게 된다. 원래 이 위령비는 1981년 ‘도솔산지구 전적비’란 이름으로 도솔산 정상에 세워졌으나, 이곳이 민간인통제구역이 관계로 1999년 6월 현 위치에 높이 3.5m 둘레 4m의 ‘도솔산지구 전투 위령비’로 재건립하게 된 것이다.  

도솔산지구 전투 위령비  사진출처=건국대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연구단

도솔산은 양구군 동면 팔랑리와 해안면 만대리의 경계에 있는 1천148미터의 산이자 해안분지를 둘러싼 대표적인 봉우리였다. 그런데 양구의 해안분지는 6.25전쟁 중 중동부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여의도 면적의 6배가 넘는 해안분지의 평지는 작전수행을 위한 병력과 물자의 집결이 가능했고, 또한 이 곳을 둘러싼 봉우리들은 양구를 거쳐 인제를 관통하거나 북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피차간 반드시 차지해야만 했던 공간이었다. 이런 까닭에 이 도솔산은 남과 북 사이에서 반드시 차지해야만 했던 중요한 요충지 중 요충지였다. 

6·25전쟁사에 있어서 이러한 도솔산 전투는 양구의 해안분지를 둘러싼 여러 고지들에서 앞으로 2년간 이어질 참혹한 고지전의 서막을 알린 전투였다. 도솔산 전투가 시작된 1951년 6월은 중공군 참전 이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시기이자 이것을 돌파하고자 군 작전과 전력이 정비되던 시기였다. 1951년 6월 4일 북이 차지하고 있던 도솔산에 대한 공격 명력이 해병대 제1연대에 하달되었다. 6월 19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도솔산의 24개 고지들이 수많은 생명들의 사라짐 속에서 하나씩 ‘점령됐다’. 

‘해병대 전통의 금자탑을 이루는 5대 작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무적해병이라는 휘호를 하사받은 전투’는 이 전투를 설명하는 서술이다. 하지만 17일간 피아를 합쳐 4천여 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한 전투를 상기한다면, 무언가 마음에 편치 않는 서술이다. ‘慰靈이 없는’ 위령비라고 한다면 너무한 표현일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승리한 전쟁에 대한 기록만이 아니다, 고귀한 생명의 스러짐은 결코 수치화된 ‘戰績’이나 절절한 애국심으로 표현될 수 없다. 도솔산지구 전투위령비 앞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양구 해안분지가 ‘그것 그대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괜한 이유에서만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간직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피의 능선’ 전투 전적비

다시 방향을 바꿔 31번 국도로 진입하여 내려오면 양구 월운저수지 맞은편에 있는 ‘피의 능선 전투 전적비’를 만나게 된다. 이 한적한 저수지 앞에 전적비 표지판이 놓여 있는 모습은 생경하기만 하다. 그런데 1980년 11월에 세워진 이 전적비는 6·25전쟁의 최대 격전 중 하나인 ‘피의 능선’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표지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전적비를 마주하니 꽤 높다. 2미터의 기단 위에 올라와 있는 3미터 높이의 비석에는 먹물색이 세월의 흔적처럼 물들어져 있다.    

피의능선 전투전적비  사진출처=건국대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연구단

‘피의 능선’은 전쟁사적으로 양구 지역에서 벌어진 고지전의 두 번째를 차지하는 장소이자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감독 강제규)에서 나오는 마지막 전투의 배경이 되는 장소이다. 일설에 따르면 미군 지휘관이 ‘한국전 발발 후 가장 많은 포를 쐈다’고 회고하는 피의 능선 전투는 하루 최대 3만발의 포탄이 떨어졌으며 이로 인해 세 봉우리 중 가장 높았던 985고지의 높이가 2미터나 낮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으론 전쟁의 참혹함을 그대로 담아낼 수 없다. 8월 18일 전투개시와 9월 5일 전투종료의 19일간 국군과 미군 약 4,000여 명, 북한군 약 15,000여 명 등 약 1만9천여 명이 이 능선에서 자신의 고귀한 생을 마감했다. 

19일 간의 전투기간 중 19,000여 명의 사상자, 그러니까 하루 평균 1천여 명이 생을 달리한  이 전투의 이유는 사실 아주 간단했다. 이 능선을 차지해야만 ‘양구와 인제를 잇는 측방도로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측방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고지를 탈환하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명령은 끝끝내 성공적으로 완수됐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 사실을 기억하기보다, 이 전투의 마지막을 기억해야 한다. 피의 능선 전투를 모티브로 하는 「태극기 휘날리며」의 마지막 모습은 폐허로 변한 고지 속에서 ‘피아의 구분 없는’ 이름 모를 수많은 뭇 생명들의 쓰러짐이었다.   

1980년 11월 세워진 비문의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다. “피로써 되찾은 이 땅 다시는 더럽히지 말자. 그리고 소중히 간직하자.” 하지만 진정으로 소중히 간직해야 할 것은 단순히 국가로 귀속되는 영토일 순 없다. 오히려 무수히 사라져간 생명들에 대한 애도와 다시는 이러한 일이 또 다시 벌어져선 안 된다는 평화에 대한 결심일 것이다. 

‘잃어버린’ 地名 속 ‘공식화’ 된 전투, ‘펀치볼지구 전투 전적비’

다시 길을 떠난다. 월운저수지를 지나 31번 국도에서 453번 지방도로로 접어드니 얼마 못가 산을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바로 ‘펀치볼지구 전투전적비’로 향하는 길이다. 이 전적비가 기념하는 펀치볼 전투는 1951년 6월 4일부터 6월 19일까지의 ‘도솔산 전투’, 1951년 8월 18일부터 9월 7일까지의 ‘피의 능선 전투’ 이후 벌어진 고지전으로서 1951년 8월 29일부터 9월 30일까지 진행됐다. 

가칠봉, 대우산, 도솔산, 대암산 등 해발 1천m가 넘는 봉우리로 둘러싸인 타원형의 분지가 외국 종군기자의 눈에는 ‘화채 그릇(Punch Bowl)’과 같이 보였나보다. 화천의 ‘파로호’가 그러하듯 6.25전쟁으로 인해 지역명이 바뀐 곳이 비단 이 곳만의 일은 아니었겠지만, 그 모습뿐만 아니라 그 이름 역시 지역의 장구한 역사와 고유한 문화를 담고 있는 ‘해안분지’가 단지 ‘화채 그릇’으로 표현되는 것은 두고두고 아쉬울 뿐이다.   

펀치볼 전투가 발발한 시기는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정전협정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미군은 양구 해안분지의 북쪽 高地群을 작전통제선으로 설정하고, 이를 차지하기 위한 공격을 시작했다. 미군 해병 1사단과 국군 해병 1연대는 그 중에서도 해안분지 북쪽의 1026고지, 924고지와 북동쪽의 702, 660고지에 대한 점령을 명령받았다. 특히나 당시 북쪽의 1026고지는 ‘모택동 고지’ 그리고 924고지는 ‘김일성 고지’로 命名될 만큼이나 고지 점령은 절대적인 임무였다. 기록이 상이하긴 하지만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에 의하면 약 3주간에 걸친 이 전투의 결과는 북한군 사살 3,739명, 포로 767명, 아군 전사 506명, 부상 1, 602명, 실종 11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펀치볼지구 전투전적비  사진출처=건국대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연구단

눈에 띄는 표지판도 없이 지방도로 옆 좁은 계단 위에 세워진 이 전적비는 1958년 건립 이후 올해로 딱 60년째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임들의 몸이 방패가 되어 우리 민족을 살렸고, 임들의 흘리신 피는 조국애의 일편단심으로 이 나라를 건졌도다”란 전적비의 구절 역시 60년 동안 그대로 간직되고 있다. 이렇듯 ‘민족과 조국’은 이 전투에 참여한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데 사용된다. 하지만 곧 마음 한 켠이 아려온다.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누군가의 아버지였던 이들은 전쟁 기간 중 사랑하는 가족과 정겨운 고향을 떠나 이름도 알 수 없는 양구의 어느 고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민족과 조국을 위해서’라는 거창한 명분보다는,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살아남길 원했을 이들은 결국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偉勳과 功勳으로 기록되는 이들의 희생 속에서 죽음에 대한 진정한 애도는 먼 발치에 서 있을 뿐이다.
 
고지전의 마지막 전투, ‘백석산지구 전투 전적비’

백석산지구 전투전적비 사진출처=건국대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연구단

양구 지역에서 벌어졌던 그 참혹한 고지전도 이제 끝을 향해가고 있다. 양구군청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오르다보면 460번 지방도를 만나게 된다. 계속해서 가다보면 양구의 명소 두타연 입구의 고방산 교차로를 볼 수 있는데 교차로 오른편에 ‘백석산지구 전투 전적비’가 있다. 입구 혹은 방벽과 같은 느낌이 나는 검붉은 빛의 철제 구조물을 세워 두었기에 한눈에 찾을 수 있는 곳이다.

‘백석산 지구 전투’는 1951년 8월 하순부터 10월 하순까지 국군 제7사단과 제8사단이 북한의 제12사단과 제32사단을 상대로 백석산 정상을 탈환하기 위해 치른 전투를 일컫는다. 약 2달이라는 기간 동안 고지를 뺏고 뺏기기가 6차례나 지속되는 사이에 피아의 사상자는 3천여 명이나 발생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전투는 양구에서 벌어진 고지전의 마지막 전투이기도 한 동시에, 이 전투로 인해 중동부 전선이 4km 이상 북상되어 휴전협정 조인 시까지 유지되다가 오늘날의 군사분계선으로 고정된 마지막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앞 선 ‘펀치볼지구 전투 전적비’와 마찬가지로 1958년에 세워진 ‘백석산지구 전투 전적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이들 전 장병의 영웅적인 감투정신을 높이 찬양하고 이 지구에서 애석하게도 호국의 신으로 산화한 장병들의 명복을 두 손 모아 빌며 자손만대에 길이 그 위훈을 전하고자 여기에 전적비를 세워 기념하노라“. ‘영웅적인 감투정신’과 ‘호국의 신’이라는 단어 사이에서 ‘冥福’이라는 단어가 왜소해 보인다. 전적비에 적힌 서사(narrative)들은 여전히 특정 관점이 주도하고 있다. 피아의 적대적인 이분법과 戰功에 대한 신화적 표현 속에서, 생명의 존엄성과 그 희생에 대한 진심어린 애도, 간절한 남북의 평화에 대한 바램, 상처를 간직한 이들에 대한 진정한 치유 등에 관한 서사는 자리를 찾지 못하고 浮游할 뿐이다.            

양구 통일관 앞 그리팅맨  사진출처=건국대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연구단

記憶과 忘却 사이에서, ‘양구전쟁기념관’ 

마지막 장소로 발길을 옮긴다. ‘양구전쟁기념관’이다. 어찌 보면 양구전쟁기념관은 여러 의미들이 혼재되어 있는 공간이다. 기념관 입구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보이는 미사일과 지금이라도 굉음을 울리고 나아갈 것만 같은 전차가 전시돼 있다. 하지만 조금 안쪽으로 걸어가면 머리를 숙이고 인사하는 모습의 거대한 조각상 ‘그리팅맨(Greeting Man)’이 보인다. 이 조각상은 자신을 낮춰 상대를 존중하고 마음을 연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으며, 따라서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뒤에는 ‘양구 통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전쟁’, ‘평화’, ‘통일’이 양구전쟁기념관에 모두 담겨져 있다. 

다시 양구전쟁기념관 주위를 찬찬히 둘러본다. 기념관 외부 한쪽에, 양구 지역에서 벌어졌던 9개 주요 전투를 소개하는 표지판이 전시되어 있다. 크리스마스고지 전투, 피의 능선 전투, 펀치볼 전투, 백석산 전투, 도솔산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가칠봉 전투, 대우산 전투, 949고지 전투 등이다. 이 모두 참혹했던 고지전들이다. 

이 앞에 이르러 지금껏 살펴본 4개의 전적비를 다시금 떠올려 본다. 우리는 전쟁의 어떠한 면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일까? 전쟁은 彼와 我를 구분하고, 우리가 아닌 대상을 소멸시킨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적도, 아군도 생명의 불빛을 잃게 된다. 분명 지금 우리의 평화로운 삶은 수많은 이들의 생명 위에 일궈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어떠한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수많은 비석들은 신화화된 방식으로, 때론 거창한 명분을 붙여가면서 보여주고 싶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속에서 망각되는 것은 무엇일까. 혹 생명이 참혹하게 사라지는 비극 그리고 남겨진 이들의 아픔에 대한 애도는 아닐까.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연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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