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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굴에 갇힌 음악
토굴에 갇힌 음악
  • 배병삼 영산대
  • 승인 2003.06.1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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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김명환이라는 鼓手가 있었다. ‘일고수 이명창’이라는 말에 꼭 들어맞을 당대 최고의 북잡이였다. 30여년 전 유신정권 말기, 그가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요즘 정치가 어떻느니 해싸도, 우리나라가 앞으로는 괜찮을 것”이라던 예언이 생각난다. ‘우리나라가 앞으로 괜찮을 이유’로써 그는 사람들이 점차 애조 띤 半音이 아니라 밝은 正音을 즐기려는 풍조를 들었다. 특히 젊은이들이 슬프고 가슴 저미는 哀聲이 아니라 밝고 명랑한 소리를 좋아하더라는 것.

그러고 보면 지난 1970∼80년대만 해도 우리 주변의 대중음악은 애조 띤 곡조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경쾌하고 발랄한 음악들이 풍미하고 있다. 또 노래가사도 사랑과 이별을 둘러싼 한탄이나 애상 대신, 도리어 떠나간 상대에 대한 저주(?)나 홀로서기의 다짐을 씩씩하게 표현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역시나 나라살림도 옛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으니 두루 김명환의 예언은 들어맞았던 셈이라고 할까. 실제 그의 삶은 죽는 날까지 곤고하였지만.

얼마 전 작곡가 백영호 선생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도 한국 대중음악의 한 굽이가 끝나고 있음을 알리는 계기다. 하긴 백영호라고 해서는 누군지 잘 모르리라. ‘동백아가씨’(이미자), ‘추억의 소야곡’(남인수), ‘동숙의 노래’(문주란) 그리고 ‘해운대 엘레지’(손인호)의 작곡가라고 하면 흐릿하게나마 느낌이 잡힐 테다. 남긴 곡이 1천 곡을 훌쩍 넘는다는 이른바 ‘트로트’풍의 대표적인 가요 작곡가였던 것.

고수 김명환의 예언처럼 오늘날은 밝고 리듬이 빠른 음악의 시대가 돼, 애절하고 유장한 3/4박자 트로트 풍은 맥을 쓰지 못하게 됐으니 그의 죽음은 기껏 흘러간 세월을 추억하는 늙다리들에게나 인식될 따름인지 몰랐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와 6·25동란 그리고 5·16쿠데타로 대표되는 굴곡진 근대사를 살아온 대중들에게 신산한 삶을 어루만지면서 ‘낭만’을 제공한 그 공덕은 적지 않은 것이다. 헌데 한 시대를 증거하던 대중 음악가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바치는 추념의 정은 너무 메말랐다. 기껏 ‘가요무대’라는 가요 프로그램에서 추모특집을 편성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에 비하자면 수년전 일본의 엔카 가수 미소라 히바리에 대한 國葬에 버금가는 대접은 실로 부러운 것이다.

전래의 예악론에 따르면 음악이란 구성원들 간의 分節을 소통, 회통시킴으로써 공동체를 부드럽게 만드는 기제다. 음악은 그러므로 ‘부르기’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듣기’도 함께 할 때에야 완성된다. 伯牙絶絃이라, 거문고 명인의 연주도 들을 줄 아는 귀가 사라지면 곳줄을 뜯어 업을 폐하는 법이다. 이처럼 소리가 입과 귀를 오고가는 가운데 화음(和)이 형성되기에, 음악은 입(口)의 예술일 뿐만 아니라 귀(耳)의 예술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듣기’와 ‘부르기’가 서로 단절돼 버렸다. 그저께 노래방에 갔다온 체험을 두고 말하자면, 노래방은 그야말로 노래만 하는 곳이다. 남의 노래를 들을 여가가 없다. 시간에 쫓겨 순서대로 노래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남이 노래하는 틈에 노래책을 뒤지고 또 노래번호를 찾아 입력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가 노래 부르고 싶어 동서 옆구리 찌른다’는 속담도 있듯, 부른다커니 못부른다커니 승강이를 벌이고, “안나오면 쳐 들어간다”면서 노래를 강청하는 의식 따위는 노래방에서는 미덕이 아니라 도리어 폐를 끼치는 짓이 된다. 이렇게 되면 노래방은 즐기는 곳이 아니라 일하는 곳이다.

한편 지하철이나 버스 속에서 젊은이들은 귀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다. 가까이 귀를 대보면 그 속에서 자글자글 하는 소리가 새나오는 것으로 봐 템포가 빠른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는 귀를 막음으로써 눈도 의식도 다 주변으로부터 철수시킨 상태다. 더욱이 그는 오로지 듣기만 할 뿐 그것을 흥겨움으로 표출시키지 못한다. 만일 혼자 듣는 노래를 흥얼거리기만 해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친 녀석’ 취급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그는 ‘듣기’에 꽁꽁 묶인 상태다.

이처럼 오늘날 음악은 밖으로 튀어나가지 못하고 토굴(노래방)이나 귓속(이어폰)에서 꽉 막혀있다. 부르기와 듣기의 사이가 단절되면 음악은 사람을 자유롭고 신명나게 만들기는커녕 거기다 얽어매 버린다. 부르고 듣는 것이 서로 교통하면서 나와 남 사이에 스며들어 화합하는 마당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도리어 음악은 사람을 소외시키기 십상인 것이다. 소통하지 않는 음악은 죽은 것이요 살아있는 음악이 아닌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옛날 대학가 막걸리집에서 고래고래 부르던 노래와 다재다능하던 ‘카수들’이 더욱 그리운 늦은 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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