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안료 사용한 유일한 달항아리…公衆浮揚하듯 떠오르는 자태
청화안료 사용한 유일한 달항아리…公衆浮揚하듯 떠오르는 자태
  •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 승인 2018.07.02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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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75. 백자달항아리(白磁大壺)

우리민족은 선사시대부터 고조선, 삼한시대, 삼국시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음식이나 곡식을 저장이나 비축하기위한 커다란 항아리를 만들어 사용해왔다. 시대에 따라서 항아리의 모양이나 제작방법과 용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커다란 陶器에서 甕器, 陶磁器까지 수 천년동안 항아리의 맥은 이어져 내려왔다. 

특히 삼국시대 저장용 구덩이에 커다란 도기항아리를 사용한 것은 흉년이나 어려울 때를 미리 대비하려는 先祖들의 특별한 지혜가 담겨있다. 저장 공에 곡식이나 음식을 저장하는 방법은 땅속의 서늘하고 일정한 온도가 저장물의 신선도를 오래 유지하기 때문이며 김장김치 항아리를 땅에 묻는 방법이 최근까지 이용돼온 것도 이런 전통의 한 가지 사례이다. 

항아리의 형태와 재질, 용도는 시대에 따라서 더욱 세분화되고 정교하게 제작됐으며 특히 세계적인 요업기술을 발휘한 고려시대부터는 高麗陶工들의 끊임없는 실험과 노력으로 다양한 종류의 항아리들이 탄생하게 됐다.  

조선시대 백자는 前期부터 後期까지 한결같이 항아리를 제작했는데 몸통이 위아래로 길게 선 항아리(立壺)와 공처럼 둥근 항아리(圓壺)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사진1~4). 이 항아리들 중에서 일명 ‘달항아리’로 불리는 백자항아리는 조선후기(17세기말~18세기중옆)에 王室官窯에서 제작된 몸체가 둥근 항아리(圓壺)를 말한다(사진4). 

맨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조선전기의 입호(국립중앙박물관), 조선후기의 입호(일본 민예관), 조선전기의 원호, 조선후기의 원호(일본 고려미술관).

이 시기의 왕실관요는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금사리’에서 발견되는 여러 기의 가마터에서 확인되는데 1721년에서 1751년까지 약 30년간 관요백자가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후기 문예부흥기의 중심인 영조대왕(1694년~1776년)의 치세기간 동안이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제작된 백자는 눈처럼 흰 雪白色의 고급백자가 주류를 이루고 간혹 간략한 청화안료를 사용한 청화백자도 제작했다(당시 청화안료의 국산화가 활발하지 못해 청화안료가 매우 귀했음). 일본 민예관에 소장된 (사진5)와 (사진6)은 금사리 왕실관요에서 제작된 靑畵白磁로 매우 귀한 작품이며 高價의 청화안료를 최대한 아껴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달항아리’가 제작된 시기에는 청화안료가 귀해 특별한 경우에만 그림이나 문양화 된 글씨를 되도록 가늘고 적게 안료를 아껴가며 도자기에 그려 넣게 된 것이고 큰항아리에는 立壺에만 청화안료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제작된 ‘백자청화운용문호’(사진7)은 청화안료를 사용한 유일한 달항아리로 故 이홍근 선생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작품이다. 정선된 백토로 잘 성형된 몸통에 구름 속에서 비상하는 龍을 활달한 필치로 그려 넣었다. 물론 왕실 화원화가의 그림으로 생각되며 특별히 주문 제작된 최상품의 왕실용 ‘달항아리’일 것이다. 국가문화재로 지정받아 마땅한 중요문화재이다.   

‘달항아리’의 특별한 제작기법은 몸통을 양분해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별도로 성형한 후에 붙여서 燒成하는 방법으로 몸통이 커서 성형하기 힘든 작업을 슬기롭게 해결한 것이다. 그래서 몸통의 중심부에는 서로 이어붙인 흔적이 보이며 조선 전기의 圓壺처럼 깔끔한 원형의 형태가 쉽게 나오지 않고 둥글넓적한 자연스러움이 베인 항아리로 만들어진다. 아울러 바닥 굽의 지름이 입구의 지름보다 짧아서 안정감이 없이 불안하게 서 있는데 오히려 이러한 불안정한 느낌이 항아리를 뒤뚱뒤뚱하게 空中浮揚하는 느낌을 주어 마치 달이 떠오르는 것 같은 묘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당시 ‘달항아리’를 제작하던 陶工들이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만들었을 리는 만무하고 후세 평론가들에 의한 감상법 일 뿐이다.  

맨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백자청화철화화조문호(일본 민예관), 백자청화매화문호(일본 민예관), 백자청화운용문호(국립중앙박물관), 백자대호(호놀룰루미술관).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민예부흥운동을 주도한 영국인 도예가 버나드 리치(1887년~1979년)는 1935년 일제강점기의 한국을 방문하여 달항아리를 구입해 가면서 “나는 행복을 안고 갑니다”라고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달항아리’는 현재 대영제국박물관 한국실에 전시돼있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재의 가치를 느낄 작은 여유조차 없던 시절에는 이방인 文化耽美者들에 의해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이 조금씩 밝혀지는 단계를 밟게 되며 해외로 반출되면서 미국 호노룰루미술관(사진8),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사진9), 일본 고려미술관(사진10) 등에 중요 소장품으로 전시되게 된다.  

王室官窯에서 제작된 ‘달항아리’는 애당초 庶民用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며 왕실과 양반의 상류층을 위한 전유물이었다. 그러므로 ‘달항아리’에서 소탈한 서민적인 느낌을 받기는 힘들 것이다. 다만 금사리 왕실요에서 제작된 도자기 중에서 최고의 上品은 아니었고 커다란 몸집 탓에 몸통이 기울어진 것이 많고 유약이 잘 익지 않은 것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사진11). 그러나 다분히 귀족적이며 제한적인 작품으로 희소성도 높은 편이다. 18세기 말에 이르면 금사리 관요에서 분원의 관요로 이동하면서 ‘달항아리’는 자연스럽게 둥그런 형태에서 길쭉한 형태로 변모하게 된다(사진12). 

맨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백자대호(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 백자대호(고려미술관), 백자대호, 백자대호(19세기 분원).

‘달항아리’의 용도는 확실하게 밝혀진 내용은 없으나 그때그때 사용자의 기호에 맞게 다용도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금을 담으면 소금항아리가 된 것이고 과일을 담으면 과일 항아리가 됐을 것이다.  

지난 5월 27일 홍콩에서 열린 미술품경매장에서 과거 일본으로 반출됐던 ‘달항아리’가 약25억원에 낙찰돼 팔렸다.(사진13)

홍콩경매에 출품된 백자대호.
홍콩경매에 출품된 백자대호.

‘달항아리’의 인기는 국내외를 불문하고 여전히 높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에 편승해 항아리의 굽과 입지름의 비례를 산술적으로 계산해 최상의 비례를 論하기도 하고 몸통의 높이와 폭의 비례를 따지는 등 온갖 美辭麗句를 총 동원해 극찬하기도 하며 명품의 조건을 제시한다. 심지어 일본의 “조선 막사발 명품의 조건”처럼 여러 가지 명품의 조건을 만들어서 ‘달항아리’에도 인위적 감상법의 잘못된 관행을 답습하려는 경향이 있다.

문화재를 감상하는 방법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그 느낌은 사람마다 모두 같을 수 없고 느낌의 깊이와 폭도 다르다. 과연 물질만능과 세속에 빠진 현대의 평론가들이  ‘달항아리’에 스며있는 진정한 내면의 아름다움과 속뜻을 찾아낼 수 있을까?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알림: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가 기고해 온 「김대환의 文響」 기획 시리즈는 이번 75회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종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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