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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 … 존재물의 相依相關性에 대한 불교적 명제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 … 존재물의 相依相關性에 대한 불교적 명제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8.07.0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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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음식-음식의 문화사_ 22. 국수와 인간의 인연① 밀을 만나다
▲네덜란드 황금기의 화가 얀 베르미어 반 우트레흐트(Vermeer van Utrecht, 1630~1696)의 작품 '국수를 먹는 남자'(바르샤바 국립박물관 소장). 사진 출처=https://en.wikipedia.org/wiki/Noodle
▲네덜란드 황금기의 화가 얀 베르미어 반 우트레흐트(Vermeer van Utrecht, 1630~1696)의 작품 '국수를 먹는 남자'(바르샤바 국립박물관 소장). 사진 출처=https://en.wikipedia.org/wiki/Noodle

오래 전부터 국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이란에 가서 현지 국수를 먹고, 이집트를 위시한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에 가서도 수크(suq or souk, ‘아랍 재래시장’) 국수집 앞을 서성대고,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 국가에 가서도 라그만이라는 이름의 우리네 얼큰 칼국수 비슷한 면류 먹기에 앞장을 서고,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시아 국가는 물론 거대한 대륙 중국과 근성이 우리와 사뭇 다른 일본에 가서도 여차하면 국수로 끼니를 해결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수 이야기를 꼭 쓰고 싶었다. 

 

▲우즈베키스탄의 대표적 국수 라그만(lagman). 면발이 꼭 우리네 가락우동 같다.
사진출처=구글 이미지

중국 서남부 변방 운남성. 그곳 남부 시샹반나에서 소수민족 야오족의 정겨운 장조판 풍습을 목격한 일도 나의 욕구를 강화했다. 문화는 다른 듯 닮은 점이 많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과거 강릉 일대에서 봄철 농사일을 끝낸 뒤 일꾼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우의를 나누는 차원에서 열리던 질먹기(길먹기의 와전) 풍습이 장조판의 내용과 다를 바 없다고 본다. 마을 공터나 골목길에 식탁을 연이어 늘어놓고 그 위에 집집마다 준비한 음식을 차려서 함께 나눠먹는 모습은 매우 흥미롭다. 

한편 채식주의자로서 僧笑(국수의 婉曲語)의 연유를 알고 싶었다. 사찰 大衆供養으로 승려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물국수(잔치국수라고도 함)나 비빔국수가 과연 도 닦는 法器들을 미소 짓게 하기에 족한가 궁금했다. 수년 전 입적하신 법정 스님이 하루 두 끼 식사 중 한 끼는 국수를 드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백석 시인의 「국수」라는 시를 만나 읽으며 조만간 문화사적 측면에서 흥미롭고 의미 있는 국수 이야기를 쓰리라 재차 다짐했다. 작품성과는 별도로 작가로서의 성실성과 인간으로서의 진정성 때문에 좀 좋아하는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국수」라는 글을 썼다는 소식을 듣고는 선수를 뺏겼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좀 그랬다. 모든 걸 다 떠나 사람들이 국수에 반하는 연유가 무엇인가를 파헤쳐 알고 싶었다. 백석은 도대체 국수를 얼마나 좋아했던가.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심심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익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긇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백석 시 「국수」 중에서) 

백석 시인의 시가 일품요리 같다면 아래 하루키의 산문은 간식 같다.

“오늘 점심은 메밀국수나 먹을까, 할 때가 있다. 공복감은 그리 없지만 뭔가 가볍게 배를 채우고 싶은 경우. 그런데 외국에 거주할 때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특별한 도시를 제외하면 국수 가게도 없고 또 메밀국수에 상응하는 음식도 없다. 그럴 때 나는 곧잘 시저스 샐러드를 주문한다. 미국 레스토랑에서 시저스 샐러드는 대체로 가벼운 메인 요리로 메뉴에 올라 있고, 이것만 먹으면 대충 메밀국수를 먹은 것과 비슷한 ‘섭취감’을 얻을 수 있다. 물론 맛에는 꽤 차이가 있지만, (하략).”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시저스 샐러드」 중에서)

영동지방 장칼국수와의 만남

1981년 3월. 동해안 칼국수를 처음 맛 본 때다. 아침은 거르고 一日二食을 행하던 시기. 저녁은 거의 늘 칼국수였다. 처음에는 칼국수 국물 빛깔이 빨간 것이 이상하고 눈에 거슬렸다. 고추장을 푼 때문이었다. 맛은 칼칼하고 구수했다. 부속물로 쓰인 강원도 감자에서 우러나온 구수함이 장칼국수의 감칠맛을 돋웠다. 대관령 이서 진부 버스 정류소 앞 칼국수가 장 없이 순전히 얇게 썬 감자만의 구수함으로 맛의 승부수를 던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만남이 깊어지면 정이 드는 법이다. 연일 먹다시피 하다 보니 장이 빠진 칼국수는 심심하게 느껴지게 됐다. 자주 먹어 익숙해지고 정이든 것이다. 사람은 이렇게 맛에 길들여진다. 그리고 개인의 음식이 집단의 음식이 되고, 지역을 대표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음식문화라는 것이 형성된다. 색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경우 우리는 그를 독자적 문화라고 한다. 영동지방 장칼국수도 장을 푼다는 점에서 다른 지방이 갖고 있지 않은 특이성을 지닌 고유한 음식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장칼국수가 문화가 된 사연

문화는 보편성이 있는가하면, 문화마다 특이하거나 색다른 고유성 혹은 독자성이 있다. 국수문화는 특히 지역적 특성이 배태된 고유한 레시피와 미각을 지니고 있다. 출생의 사연이랄까, 가난이나 여타의 숨어있는 탄생비사를 감안하면 국수의 命運도 다양하고 따라서 구구절절 할 말이 많다. 안동국시가 그러하고 부산의 밀면도 남다르다. 내가 청소년기와 젊은 시절을 보낸 청주에는 냄비우동이란 게 있다. 흔히 각기우동이라고 부르는 가케우동(掛け??; かけうどん)에 쑥갓과 유부 등을 넣어 쑥갓의 향기와 유부의 멜로우(mellow, 감미로운·달콤한)한 맛을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먹거리다. 강원도 동해안의 장칼국수도 남다른 사연을 지니고 있다. 처음부터 장을 푸는 국수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문화의 변화가능성(changeability)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아니 1988년 서울 올림픽 때까지도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웠다. 농업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식량생산이 불충분했다. 따라서 농촌지역 사람들조차 제대로 배불리 먹고 산다는 건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런 판에 바닷가 사람들은 물고기 외에는 달리 섭취할 식품이 없었다. 밀가루는 굉장히 귀한 식자재였다. 허다한 날을 생선국만 끓여먹다 보니 바닷가 사람들 입안에서는 줄곧 물고기 비린내가 났다. 생선만이 아닌 뭔가 다른 걸 먹고 싶었다. 색다른 씹는 즐거움이 필요했다. 어민들은 꽁치를 삶아 살을 발라 완자 모양으로 뭉쳐두었다. 그리고 물을 끓인 뒤 완자 모양의 꽁치살을 조심스레 탕수 속으로 집어넣었다. 지긋한 비린내를 잡기 위해서는 고추장을 풀었다. 장칼국수는 그런 배경 속에서 만들어지고 영동지방 사람들의 음식문화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문화의 전승적 속성에 따라 당분간 계승될 것이다.

지금도 속초 중앙시장이나 강릉과 주문진 어시장에서는 뭉친 꽁치살을 판다. 바닷가가 고향인 사람들은 문득 옛날 생각이 나면 칼국수를 끓일 때 장을 푸는 건 기본이고, 좋아하는 생선을 아예 통째로 넣고 끓여 매운맛 속에 숨은 비린내를 먹는다. 그리고 장칼국수를 나이롱국이라 부르며 회상에 잠긴다. 나이롱국은 밀가루로 만든 진정한 수제비 대신 꽁치살을 넣어 끓인 사이비 수제비에 대한 희화적 명칭이다. 

한국인은 세계 어느 민족 못지않게 면 식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칼국수, 잔치국수, 비빔국수, 콩국수, 우동, 짬뽕, 짜장면, 울면 등 밀을 소재로 한 면류는 물론 메밀로 만든 메밀국수, 냉면, 막국수, 심지어는 도토리 막국수도 만들어 먹는다. 더운 여름날이면 제철음식으로 시원한 물냉면을 즐긴다. 관건은 식초와 겨자, 설탕을 알맞게 첨가한 뒤 면과 함께 휘저어 최고의 맛을 내도록 하는 일이다. 겨울철에 이름난 냉면전문집을 찾아가보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냉면 애호가들이 얼음 조각 띄운 평양냉면을 “후루룩. 쩝쩝”거리면서 맛있게 먹곤 한다. 

밀의 동진, 메소포타미아에서 투르판까지

국수의 재료인 밀은 언제 어떻게 사람의 곁에 와 무한 사랑을 받게 된 것일까? 중국 측 자료에 의하면 고대 황하 중류의 彩陶를 동반한 신석기 농경문화인 仰韶文化 시기(기원전 5~3천년)까지만 해도 사람이 식용으로 먹는 식물성 식품은 조, 기장, 벼(稻)의 세 종류만 있었다. 사람들은 이 곡물을 쪄서 먹었다. 시루를 발이 셋에 속은 빈 력(?, 솥)위에 올려놓고 곡식을 익혀 먹은 것이다. 시루와 솥을 하나로 합친 즉 발이 달린 시루인 언(?, 시루)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 지역 사람들에게 밀은 아직 식품이 아니었다. 

밀의 원산지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7천년 경부터 이곳 주민들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밀 경작을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아니면 어떤 집단이 동쪽으로 이주하며 밀의 동진이 이뤄진다. 이 시기를 대략 기원전 3000년경으로 추정하는데, 나로서는 이런 추정의 과학적 근거나 방법에 영 신뢰가 가지 않는다. 반대로 고고학자들은 나의 추론에 대해 비약이 심하다거나 논리적 근거가 약하다고 하겠지만, 나는 기원전 2천300년경 이란 고원 서부를 거점으로 메소포타미아의 지배자였던 바빌로니아 왕국을 수 차 공격하고 점령했던 구티족(Guti)이 밀의 동진을 촉발한 주인공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근거는 이렇다. 바빌론을 점령까지 했던 구티족이 기원전 2천082년 수메르인들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근동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다. 

▲자그로스 산맥의 최고봉 데나(Dena). 해발 4천409m.
▲자그로스 산맥의 최고봉 데나(Dena). 해발 4천409m.

구티족은 기원전 2230년경 우루크(Uruk)의 왕 멜렘(우르우트)의 치세 말 남부 메소포타미아를 차지하고 있던 바빌로니아에 쳐들어가 아카드 제국을 전복시키고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전 2130년까지 약 1세기 가량 집권한 세력이다. 본래 중부 자그로스 산맥 하마단 주변에 거주했다. 기원전 2130년 우루크 왕조의 우투 헹갈(Utu-hengal, ‘어부’라는 뜻, 치세: 기원전 2055~2048년)이 구티 왕조의 마지막 18대 왕 티리간(Tirigan)과 싸워 승리함으로 구티 왕조가 멸망하고 그 주민들이 동쪽으로 멀고도 긴 유랑의 길에 오르게 된다. 일부 학자들은 이들이 바빌론을 떠나 멀고도 험한 여정 끝에 타림분지 동단 오아시스 지역에 당도한 것으로 본다. 오랜 시간이 걸린 동진 도중 일부는 소그디아나에 정착했을 것이고, 또 다른 일부는 천산산맥이나 이식쿨 호수 혹은 일리 평원에 삶을 의탁하기로 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투르판 분지는 열사의 땅이지만 과거에는 기후 조건이 지금과는 딴판이었다. 자연환경도 사뭇 달랐다. 강과 호수가 있었고 숲이 우거진 비옥한 땅이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여기 건조 지대 곳곳에 강물이 흐르고 롭 노르(롭 호수)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초원을 떠돌며 유목생활을 하던 새로운 이주민들은 더 이상의 유랑을 원치 않았다. 그렇게 해서 이곳 투르판 일대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사람들은 떠나온 곳에서와 같이 밀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두 강을 끼고 발달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본거지에서 유래한 밀농사가 새로운 땅에 이식된 것이다. 고고학적 유물이 그런 사실을 증거한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 최초의 국수가 탄생한다. (다음에 계속)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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