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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자율성에 대해
학문 자율성에 대해
  • 이지환 서강대 박사과정생·국문과    
  • 승인 2018.07.02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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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생들의 一聲 ⑩

나는 대학원생으로서 항상 놀란다. 학계에 자기 이론을 만드는 사람은 왜 이리 적은가? 누구의 전문가는 있는데, 내가 무엇인가를 만들었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없다. 누군가가 새로운 이야기를 하면, 그에 대한 비관적 태도(비판적 태도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참으로 어디에나 포자처럼 있고, 잠시라도 방심하면 냉소와 무시로 변해있다. 현재의 교수들이나 학계, 국가 제도가 문제인 것이 아니다. 그 전부터 자유를 억누르도록 돼 있다. 케케묵은 논쟁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우리는 다양할 준비가 돼있는가?” 자유를 사유하는 것은 어떤 정신의 복잡한 작용에 대해 다른 정신이 예측이나 제어가 불가능함을 인정하는 해석적 효과이다. 다시 말해 자유는 정신 간의 관계에서 구성되지, 한 정신에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다양성은 역동성과 함께 이 정신 작용의 기능적 특성이다. 그러한 전제에서 나는 대학원생을 위한 학문 다양성 보장의 격률을 주장하고 싶다. 먼저, 우리가 ‘쓰든 말든, 놀든 말든, 주제를 정하든 말든 내버려두라.’ 대학원생은 자율적으로 탐구하는 사유 체계, 곧 독립적인 하나의 학자이다. 교수와 대학원생 모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자율성은 자연스럽게 억압되며, 이에는 몇 가지 단계가 있다. 먼저 연구 주제를 교수가 선정해주는 경우가 있다. 그 다음으로 연구에 대해, 방식에 대해, 계속해서 세세하게 지적하고, 강제로 공부를 시키고, 가는 학회마다 데리고 다니는 교수가 있다. 소위 헬리콥터 교수이다. 이들은 학생이 얼마나 공부했는지 감시한다. 주요 개념을 외우고 있는지 시험한다. 최악의 경우에 ‘혼내는 경우’가 있다. 이 분들은 대학원생이라는 개념에 마치 그가 학자가 아직 아니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가 학위 논문을 쓰지 못하거나 혹은 통과하지 못하는 것은 교수의 부담일 수 없다. 아니, 애초에 교수의 자존심 문제가 전혀 아니다. 그것은 학생의 책임이고, 학생의 자존심이다. 논문을 쓰지 못하는 학자는 스스로 고민하면 되는 것이다. 그가 모르는 것이 있다면, 그가 필요할 때 배울 것이다. 교수는 걱정이나 조바심을 버려야한다. 역으로 학생은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애초에 연구의 다양성이나 자유의 보장이라는 기치는 헛된 것일 뿐이다. 연구 주제를 정해주는 순간, 개개인의 자유로운 탐구 방향은 억제되고, 새로운 담론의 가능성은 소진된다. 주제를 정하지 못해 고민하도록, 방황하도록 내버려두라. 

다음으로, 우리는 ‘교수 하려고 연구하지말자.’ 교수는 애초에 대학이라는 제도에 종속된 ‘기관’이다. 그리고 국가는 대학과 교수를 지원한다. 결정된 학과, 교수 자리, 세부 분야에 맞춰서 공부하는데,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난 다양한 학문이 나올 수 있는가? 당연한 이야기다. 학문의 다양성과 자유를 원한다면, 교수되는 것만을 최고 목적으로 두는 것을 우리 스스로 그만두어야 한다. 자발적으로 탐구해, 사회적으로 결과물을 나누는 정신이 돼야 한다. 그렇다. 학자부터 돼야 한다. 교수되기를 포기하고 학자가 되기 시작하면, 교수라는 자리가 권력이나 권위를 가질 수 없다. 그때부터 진정한 학자간의 관계가 시작된다. 믿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학자가 부탁하는 일이니, 조언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억압적인 교수의 불필요한 간섭이나 직무에 싫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때는, 교수가 내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없을 때이다. 그래서 자유는 교수가 내 미래에 끼칠 수 있는 영향, 내 미래에 대한 그의 성급한 판단을 차단하는 것에서 온다. 우리는 궁금한 것을 더 알려고 온 것이다. 대학원은 진정으로 궁금한 것을 향해 가는 길을 ‘어렴풋이’ 알려주는 곳일 뿐이다. 보다 긍정적인 경우에는 대학원은 몰랐거나 애매했던 그 궁금한 것을 만들고, 보다 확실하게 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것뿐이다. 

대학원과 학회는 유지돼야 한다. 중요한 것은 유지되는 방식이다. 그것이 젊은 학자의 노동과 연구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유지가 총체적으로 잘못돼 있다면, 그것은 대학원과 학회를 모욕한다. 유지되는 방식이 다시 잘못된 방식으로 강요되고 있다면, 대학원과 학회의 구조가 왜곡된다. 그리고 그렇게 된 곳들은 대체로 위험하다. 나는 강압적이고, 착취적인 방식이, 학문 공동체를 공격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는 옳은 목적을 위해 힘썼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백혈병 속의 백혈구의 자아 인식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학자의 인격과 신체, 그리고 가장 중요한 ‘호기심, 혹은 탐구욕’을 무너뜨린다. 학문 공동체의 기본적인 유지를 위한 속성은 다원적인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이다. 억압적인 자가 많으면 지금 당장이야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어떻게든 굴러갈 것이다. 꽤 오래 현상이 유지될 수도 있다. 그 속에서 교수되기를 포기하는 우리들이 많아진다. 그리고 교수되는 것을 포기해버린 우리들이 많아질수록, 궁금해서 미칠 것 같은 우리들이 많아질수록, 노동력과 연구물들은 자유롭게 더 좋은 곳으로 유동해가며 그곳에서 대화한다. 학자와 학자의 진정한 관계를 맺어주지 못하는 공동체는 점차 존속력을 소진한다. 
 

 

이지환 서강대 박사과정생·국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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