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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스승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 승인 2018.06.25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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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한국정치사

평생 책을 읽으면서, “공부도 팔자에 타고난 것”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이제 늙고 병들어 되돌아보니, ‘아, 그때 그건 운명이었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이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생에서의 인연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헤어지는 인연이 만나는 인연보다 더 소중하다고 여기며 살았습니다. 감수성이 높은 젊은 날에 훌륭한 사람과 인연을 맺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그 만남이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와 그 장인과의 관계가 그랬습니다. 마치 이민하는 사람은 비행장에 마중 나온 사람과 같은 직업을 갖게 되듯이, 학자가 되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학문이나 대학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학자의 운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학문이 고대 사회에서는 귀족들의, 중세에는 천재들의 영역이었습니다. 문예부흥기를 지나 근대에 들어왔을 때 학문은 가슴으로 하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 시대의 학자들은 이성과 열정과 연민을 가슴에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자본주의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현대의 학문은 財力이 성패를 좌우했습니다. 연구비를 많이 끌어오는 학자가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학자들은 연구에 전념한다는 미명으로 가르침에 소홀했으며, 연구비의 헌터(hunter)로 전락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연구비가 공평하고 능력에 따라 배분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꾼’들의 좋은 먹잇감이었을 뿐입니다.

위와 같은 흐름으로 볼 때 학문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고 끝까지 고집했던 저는 시대착오론자였으며, 너무 늦게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돈을 죄악처럼 여기지는 않았으나 정년퇴직을 하고 사회의 거친 바람 앞에 내몰렸을 때 저는 문득 삶의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지난날의 삶을 후회한 것은 아니지만 왜 내 아내와 자식마저 가난하게 살아야 했나? 하는 미안함이 밀물처럼 다가왔습니다. 동료들과 담론의 자리에서, 골프의 핸디니, 몇 년산 포도주니, 팰리스 타워의 時價며,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메뉴를 결정할 때면 저는 늘 우두커니 촌뜨기가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몸은 현대를 살면서 마음은 중·근세적 인간이었습니다. 제가 끝까지 그런 고집을 피운 데에는 저의 師承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역사학을 좋아했던 저는 그쪽 과목을 많이 盜講했습니다. 그 무렵 사학과에는 한국민족주의사학의 일세대인 박형표(朴亨杓) 교수님이 계셨는데, 이 나라의 수난사를 얘기할 때면 얼굴에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사회정책론을 강의하신 김정중(金正中) 교수님은 억눌리며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말씀하실 때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말을 끊고 천장을 쳐다보실 때가 많았습니다. 요즘에도 눈물을 흘리며 강의하는 교수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저에게 가장 깊은 교훈을 주신 분은 조재관(趙在瓘) 교수님이었습니다. 그 무렵 저는 그분의 원고 정리를 도와드리려 댁을 자주 찾아뵀는데, 쉬는 시간이면 당신의 젊은 날의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연세대 주변의 자취방에는 전기가 가설되지 않아 촛불을 켜고 공부를 했는데, 졸음이 올 때면 면도칼로 손가락을 베었고, 그것이 덧나지 않도록 촛불로 지지며 공부해 2학년 때 외무고등고시에 합격하셨습니다.

조재관 교수님은 그때 흘린 피로 半折紙에 ‘태평양의 등대’라는 혈서를 썼는데, 저는 그것을 보면서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분은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知天命의 연세에 저에게 묘비명을 부탁하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그분은 학교 대강당에 모든 제자를 모아놓고 마지막 강의를 한 다음 곧 운명하셨습니다. 그는 “인생을 치열하게 살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저는 그분에게서 학자란 얼마나 혹독하게 공부해야 하는가를 보았습니다.

이제 곧 방학입니다. 재충전이라는 이름의 휴식보다는 지식의 재충전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권면의 말씀을 드리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교수의 길을 열어주시면 학문에 뼈를 묻겠다고 약속하던 스승 앞에서 초심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한국정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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