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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학술서 베스트셀러를 돌아본다
기획 : 학술서 베스트셀러를 돌아본다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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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론서·교양서 중심…교과서 안 사는 분위기 탓 시장 줄어

한국 학술출판도 1백년을 맞았다. 학술서 베스트셀러가 어렵다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유수한 명저들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라 있다. 그 흐름들을 일별해보면 베스트셀러는 학술서가 획득한 학문적 성과와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물론 한 선비의 전생애가 투자된 책들도 있지만, 대부분 개론서, 이야기성이 높은 역사서, 문법책, 기타 설명서들이 대종을 이룬다. 심지어 표절서도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 書評의 역사가 학술서에 대한 정사라면, 베스트셀러를 통해서 보는 학술의 풍경은 秘史에 가깝다. 거기엔 우리 학문이 성장해온 응달과 양달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학술도서는 베스트셀러가 될 운명을 타고나지 못했다. 베스트셀러는 소설과 수필의 몫인 것이다. 책으로서는 다소 가혹한 것 같기도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학술이라는 딱지를 이마에 붙이고도 洛陽의 紙價를 올린 책들이 있다. 시대와의 절묘한 조화, 기막힌 우연들이 간혹 학술서를 날개돋친 듯 팔려나가게 했다.

근대출판여명기엔 학술서도 종종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독자층이 아직 식자층에서 일반 대중으로 분화하지 않았던 시절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근대 이후 최초의 학술서 베스트셀러는 단연 유길준의 '西遊見聞'(1895)이다. 국립출판사 박문국에서 펴낸 이 책은 서양의 문물을 처음으로 국내에 널리 알리고 갑오개혁의 사상적 배경이 되기도 한 혁명의 책이다. 우리에겐 '국한문혼용체'로만 기억되고 있는 이 책이 꽤 '짭짤했던' 책이라는 사실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이 시기에는 각종 번안 역사물들이 인기를 끌었다. '미국독립사', '법국혁신전사', '월남망국사', '이태리건국삼걸전' 등 교양적 계몽을 담은 책들이 널리 읽혔는데 모두 외국인의 지적 노동에 의한 것이었다.

최초의 학술베스트셀러 '西遊見聞'
인쇄기가 많이 도입되고 민간출판이 활성화된 일제시기부터 베스트셀러 목록은 소설이 독점하다시피 한다. 1930년대 중반에 오면 당대 최고의 인쇄업자이자 계몽운동가, 에디터이자 문필가인 최남선이 히트작을 하나 터뜨린다. '조선역사'(1931)가 그것이다. 1962년 동아일보가 정리한 각 시기별 베스트셀러 목록에 따르면 최남선의 책은 '고사통'을 포함해 두권이나 올라있다. '조선역사'는 조선일보에 실린 연재물 '조선상고사' 시리즈를 엮은 것으로 민족의 기원을 보듬어 안으려는 애국적인 저술이었다. 후에 삼중당에서 재출간 돼 총 6만부가 팔려나가는 등 생명을 이어갔다. '이조실록', '조선과학사' 등도 꽤 읽혔던 책들이고, 이와 함께 한글 관련서들도 인기가 좋았다. 대표적으로는 정인승의 '한글독본', 최현배의 '한글갈', 한글학회의 '표준말모음'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당시 조선역사와 말에 대한 독자대중의 飢渴은 다음과 같은 증언에서 여실히 확인된다.

"45년 어느날 오후였다. 내가 경영하던 서적도매상 유길서점 앞에 난데없이 트럭 한 대가 멎더니 30세 전후로 보이는 청년들이 내렸다. '선생님, 여기 돈 10가마니 싣고 왔으니 조선어와 조선역사에 관한 책 한 트럭분만 실어 주십시오.' 트럭의 적재함에는 정말 돈 10가마니가 실려 있었다. 휴지를 쑤셔박아 놓은 것처럼 꾹꾹 눌러 담아놓은 돈이 자그마치 10가마니! 청년들은 함흥에서 왔다고 했다."(신재영, '독서신문', 1972. 2. 29.)

해방공간에 오면 이른바 경성제대에서 연마된 제도권 학술서들이 본격 등장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학술서들이 가내에서 이어져온 조선학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 때의 책들은 근대적 학문 방법론에 따라 수행된 학술연구를 담았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다르다. 양주동의 '고가연구'(박문출판사 刊, 1954), 진단학회의 '한국사' 가 해방공간의 주요 베스트셀러다. 복간된 최현배의 '우리말본'(1945), 권덕규의 '조선역사'(이상 정음사 刊, 1946)는 금새 베스트셀러가 됐다. 1954년 나온 유진 전 서울대 교수의 '영어구문론'(경문사 刊)은 국내학자로는 처음으로 본격적인 영어참고서를 쓴 것으로 여러 출판사들이 집필과정에서 원고 교섭을 벌였으나 자신이 직접 경문사라는 출판사를 차려 펴냈다. 초판 3천권이 삽시간에 팔려나갔고 주문이 쇄도하자 아예 1만부씩을 수시로 찍어냈다. 책의 인기가 오르자 복사 위조품이 생겨나 위조범을 잡는 데 10만환의 현상금이 걸리기도 했다. 1958년 10월 붙들린 범인을 두고 한국일보는 "지금까지 저작권 침해로 구속된 첫 케이스"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진 교수의 책을 학술서로 보기는 힘들 것 같다. 그와 반면 한 선비의 전생애가 담긴 '우리말본'은 국어 문법학의 금자탑이 또한 최고의 지가를 올린 행복한 사례다. "이 책을 한 짐만 지고 북으로 가면 명태를 한 달구지나 가져올 수 있었다"는 말처럼 인기였다. 책을 쓸 당시는 일제의 감시가 심할 때라 원고를 쓰는 대로 독에 넣어 마당에 묻으며 외솔은 부인에게 "불이 나서 내가 죽더라도 이 원고만은 살려두라"고 당부했다. 이 책 초판의 정가는 10엔으로 당시 하숙비에 해당될 만큼 매우 비싼 편이었다. 당시 동래고보를 다녔던 허웅 전 서울대 교수는 "당장 사고 싶어 아주머니에게 하숙비 한 달을 미뤄달라고 부탁했다"라고 회고한다. 이런 인기의 요인은 이 책의 학문적 우수성과 또한 식민지 대중에게 심어줄 수 있었던 자부심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대학교양강좌 덕본 학술 개론서들
1960년대로 넘어오면 학술서 시장은 교과서와 전집류로 크게 양분된다. 출판사들은 '방문판매'라는 방법을 고안해서, 전집 같은 대형물을 기획해 장안의 돈을 끌어모았다. 이 당시 인기가 높았던 학술서로는 '현대사상강좌', '생물학총서'(이상 동양출판사 刊), 진단학회의 '한국사'(을유문화사 刊) 등을 들 수 있다. 1970년대로 넘어서서는 '한국논저해제'(고대민연 刊), '한국학대백과사전'(을유문화사 刊) 등 한국학 관련 사전류들이 널리 읽혔고, 변태섭의 '한국사통론', 한우근의 '한국통사' 등도 전문학술서로는 선전을 펼쳤다. 예술 쪽의 학술출판으로는 '한국미술'(동화출판공사 刊), '한국의 고미술'(광명출판사 刊) 등의 원색 호화출판물이 역시 '방판'을 통해서 각 가정마다 자리를 잡았다.

1970년대 들어 대학에 활발히 개설된 교양강좌는 개설서들의 르네상스를 불러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기백 전 한림대 교수의 '한국사신론'(일조각 刊)이다. 이 책은 현재까지 약 30만부가 팔려나가는 등 신기록에 가까운 판매부수를 자랑하고 있다. 이 교수의 학문적 영향력과 대학 역사교양강좌의 절묘한 조화가 일궈낸 결과다. 김진우 일리노이대 교수의 '언어'(탑출판사 刊) 또한 이에 버금가는 히트작이다. 이 책은 출간된 197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매년 3∼4천부 정도를 찍고 있는데, 계산을 해보면 약 10만부를 상회한다. 이런 류의 베스트셀러 교과서들은 헤아려보면 박종홍 전 서울대 교수의 '한국철학사' 등 꽤 많은 목록을 발견할 수 있다. 국문학에서는 조동일의 '한국문학통사'(지식산업사 刊), 김윤식의 '한국문예비평사연구'(일지사 刊)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한편, 권위주의적 출판활성기가 본격화된 1980년대에는 학술서들이 '지하출판물'로 널리 읽혔다. 한울아카데미의 '한국사강의', 한길사의 '해방전후사의 인식', 강만길 상지대 총장의 '고쳐쓴 한국현대사'(창작과비평사 刊) 같은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풀빛의 '한국민중사'는 1986년에 나왔는데 이 책의 공동저자들이 구속됨으로써 책의 가치가 더 올라간 사례다. 기존 왕조 중심의 제도사를 민중 중심의 역사로 고쳐 쓴 이 책은 故 박현채 교수 등 양심적 지식인들이 성명서를 발표하고 서명을 받기도 하는 등 자연스럽게 광고가 이뤄져 대학 사회과학서점을 중심으로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1990년대 이후 스러져가는 분위기
1980년대에 오면 어문학, 역사학 중심의 학술 교과서들이 그 영역을 일반 사회과학으로 넓혀 교재시장이 대폭 커졌다. 조순·정운찬의 '경제학원론'(율곡출판사 刊), 안국신 등의 '현대경제학원론'(박영사 刊), 권영성의 '헌법학원론'(법문사 刊), 이극찬의 '정치학'(법문사 刊) 등이 대학교양교재, 고시생들의 필독서로 읽히면서 기본 10쇄 이상을 찍으며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학지사, 교육과학사 등 대학교재를 찍어내는 출판사들의 유수한 '탑-셀러'들도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규석 전남대 교수의 '사회심리학의 이해', 송명자 동아대 교수의 '발달심리학'(이상 학지사 刊) 등이 적게는 2만부에서 많게는 10만부 가까이 판매고를 올리고 있으며, 김신일 서울대 교수의 '교육사회학'(교육과학사 刊), '매스미디어와 사회'(나남출판 刊)도 2만5천부 정도의 기록을 갖고 있다.

그러나 대학교재로 쓰이는 학술서들 가운데는 베스트셀러가 돼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김 아무개 교수의 베스트셀러 '민법강의'(법문사 刊)는 곽윤직 서울대 명예교수의 네권의 저작을 군데군데 표절한 것으로 드러나 물의를 빚은 바 있다. 김 교수의 책은 1993년 초판 발행 이후 매년 3만부 이상 팔려나갈 정도로 빅셀러였지만 표절서로 드러나 여러 관계자들에게 허탈감을 안겨줬다. 모르긴 해도 이런 짜깁기형 탑셀러 교재들이 대학가를 떠돌고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인 것 같다.

근래에는 학술서 출판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책을 찾기 힘들다. 각 분야마다 워낙 많은 책들이 나와있고 그 때문에 시장이 조각조각 났기 때문이다. 많이 팔려봐야 5천부 정도에 그치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의 히트 도서로는 도서출판 거름에서 나온 이정우 박사의 '시뮬라크르의 시대'가 2만부, 박명림 연세대 교수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나남출판 刊)이 상하권 합쳐서 1만부 정도를 기록중이다.

요즘은 대학교재도 많이 팔리질 않는다. 학생들에게 책을 사보라 권할 수 없고, 구내서점이 툭 하면 망해서 제대로 된 판매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게 대학교재 출판사들의 불만이다. 본격 학술서는 아니지만 '해설서'(interpretive book)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교양서들 또한 시장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최근 도서출판 산처럼에서 출간한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박천홍 지음)은 국내 거의 모든 일간지들이 크게 리뷰를 실어 보도했지만, 출판사에 쌓여있는 초판은 좀체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이 출판사 윤양미 대표는 밝히고 있다. 여러 가지 핑계가 있겠지만 학술이라는 영역이 시대정신을 이끌지 못한다는 증거인 것 같아 아쉽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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