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새들만 날아서 남과 북을 오간다고 말하는가
누가 새들만 날아서 남과 북을 오간다고 말하는가
  •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통일인문학연구단
  • 승인 2018.06.25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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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서 강화까지 경계에 핀 꽃, DMZ 접경지역을 만나다_ 13-②두타연
그림으로 그린 두타연 사진제공=양구군청

번뇌를 깨치는 청정수행터 

‘頭陀’는 속세의 번뇌, 망상, 탐욕을 버리고 불도를 닦는 수행을 일컫는다. 원래 이 말은 ‘버리다, 씻다, 닦다’라는 뜻을 가진 산스크리트어 dhuta의 음역어인데, 부처의 으뜸 제자들 중 한 명인 摩訶迦葉을 수식하는 頭陀第一이란 말로 널리 알려졌다. 이 말은 이후 음차한 한자의 의미가 더해져 머리를 흔들며 번뇌를 떨쳐 내고 청정하게 정진한다는 불가의 頭陀行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엄격히 의식주를 절제하는 두타의 수행법 12가지는 ‘십이두타행’으로 불리는데, 그 중 첫 번째가 ‘在阿蘭若處’, 즉 마을과 떨어진 조용한 산림 속에서 사는 것이다. 

조각공원과 두타정 사잇길에는 두타사 터 팻말이 서 있다. 고요한 심산유곡인 이곳에 터를 잡았던 ‘두타사’는 심신을 청신하게 닦는 山寺의 이름으로 더없이 좋았으리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개돼 있는 두타사는 고려 시대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며, 적어도 17세기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근에서 축대, 와편, 도자기편 등이 수습되었지만 절의 규모를 알 수 있는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두타연 오른쪽에 넓은 입구를 가진 움푹한 천연동굴은 ‘보덕굴’로 불린다. 이 두타사 보덕굴은 동쪽의 낙산사 홍련암, 서쪽의 강화도 보문사, 남쪽의 남해 보리암과 더불어 예부터 ‘4대 관음성지’로 불린 북쪽의 이름난 도량터다. 두타사의 창건 설화는 두타연이라는 이름의 연원뿐만 아니라, 그토록 만나고 싶던 관세음보살의 현신과 부부가 되어 함께 살았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한 어느 수도승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불도의 깨달음을 전해준다. 두타연과 보덕굴의 풍경 속에 영험한 힘을 불어넣는 그 이야기는 이러하다. 

금강산 송라암에서 수행하며 천일관음기도를 드리던 회정선사는 관세음보살을 직접 볼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천일기도를 하루 앞둔 날, 그의 꿈에는 한 여인이 나타나 관세음보살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친히 일러주었다. 양구의 방산 건솔리에 사는 몰골옹이라는 노인을 찾아가 해명방이라는 어른의 행방을 물으면 관세음보살을 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급히 길을 떠난 회정은 보름 후 양구에 도착해 몰골옹을 만났고, 그가 일러준 곳으로 가서 다시 해명방을 만났다. 해명방은 회정에게 자신의 딸인 보덕과 부부의 연을 맺으라고 권유했는데, 관세음보살을 보기 위해 일심으로 기도하던 회정은 그의 말을 따라 보덕과 부부로 3년 넘게 살며 숯을 팔아 생활했다.

그런데 아무리 믿고 기다려도 관세음보살의 현신을 마주하지 못해 낙담한 그는 어느 날, 부녀에게 이별을 전하고 몰골옹을 찾아가 자신의 답답함을 토로했다. 몰골옹은 지긋이 웃으며 그 부녀가 바로 보현보살과 관세음보살이라고 전하며, 자신은 문수보살의 화신임을 일깨웠다. 이 말을 들은 회정이 급히 돌아가 봤지만 함께 살던 집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회정이 실망하고 자책하며 다시 몰골옹을 찾았지만 그 집도 연기처럼 사라진 후였다. 회정은 자신의 우매함과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하늘을 보며 관세음보살을 목놓아 부르자, 관세음보살이 허공에 나타나 산 중턱으로 그를 이끌었다. 회정은 쫓아갔지만 관세음보살의 형상은 멀리 사라지고, 그곳엔 두건이 벗겨진 관세음보살의 형상을 한 바위가 서 있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한 회정은 송라암으로 갔다가, 다시 양구로 돌아와서 두타연 바위굴에서 7일 낮과 밤 동안 계족정신으로 두타행을 실천했다. 고행을 하던 그의 앞에는 어느 순간 바위굴이 커다란 거울이 돼 나타났고, 맑은 거울엔 보덕과 자신의 모습이 뚜렷이 비춰졌다. 회정선사는 이 바위굴 맞은 편에 터를 잡고 사찰을 세웠으니 그 이름을 두타사라고 하였다. 

이성계 발원 백자, 양구에서 빚어져 금강산으로 간 새 나라에 대한 염원

조각공원 한 쪽에는 깨어진 백자 사발 2개를 겹쳐서 엎어 높은 모양의 작은 건물 크기 조형물이 보인다. 굽과 손잡이가 달린 백자 사발은 ‘소원이 이루어지는 항아리’로 불린다. 내부에는 뻥 뚫린 하늘을 향해 올라가려는 나무들이 뿌리를 내렸고. 절 처마 끝에 매다는 풍경들이 원을 그리며 달려 있다. 

 

두타연 조각공원 조각물

두타연 상류의 생태탐방로는 호젓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오솔길이다. 봄기운이 탄력을 받으면 지뢰 경고 팻말이 걸린 철조망 사이에서도 만개하는 야생화의 향연이 펼쳐진다. 초대 받지 않은 손님들이 된 방문자들은 오솔길을 거닐며 그 연약하고 아름다운 것들에게 저마다의 이름을 불러줄 수 없어 괜히 미안할 따름이다. 흩어진 수박씨 같은 산양의 배설물도 보이는데, 뭉툭한 통나무 조각으로 만든 동물 형상들도 풀꽃들 사이에선 살아있는 것처럼 생기가 돈다. ‘DMZ에 묻힌 박수근 그림 항아리’ 팻말은 방문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양구가 낳은 민초들의 화가, 박수근의 초기 작품 수백 편을 부인 김복순 씨가 피난 중 항아리에 담아 중동부 DMZ 일대 어딘가에 묻었다는 이야기다. 최근 호당 수억 원을 호가하는 박수근의 그림 가격을 고려할 때 만약 그 항아리가 온전히 묻혀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항아리가 될 것 같다.

두타연 근처 산책로

박수근의 그림 항아리나 천 년 전 창건됐다는 두타사의 흔적은 찾을 수 없지만, 두타연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은 중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관음보살에 대한 회정선사의 발원처럼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염원과 희망이다. 눈으로 소리를 듣고 귀로도 사물을 볼 수 있는 관음보살은 가엾고 착한 중생의 소원을 들어주며 그들을 구제한다. 600년 전, 태조 이성계도 여기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발원을 담아 ‘미륵의 세계’에 대한 지극한 기도를 올렸다. 조선왕조의 개국이라는 대업을 준비하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려던 이성계는 그를 따르던 많은 이들의 염원을 담아 양구 방산면의 백토로 백자를 빚어 금강산 월출봉에서 발원사리구를 봉안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보물 1925호)’

1932년 금강산에서 산불 저지선 공사를 하던 인부들은 사리를 담은 백자 그릇들과 은제도금 용기를 발견한다. 이것이 바로 금강산 출토 유물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보물 1925호)’이다. 여기엔 조선 개국 1년 전인 1391년 이성계와 그의 두 번째 부인 강씨, 승려 월암 등이 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금강산 월출봉에 사리갖춤을 안치하며 미륵을 기다린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석가여래가 입멸한 후 2천여 년이 지난 홍무 연간에 월암과 송헌시중(이성계) 등 만여 명이 함께 발원하여 금강산에 봉안하며 곧 미륵의 세상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역성혁명의 야망과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나라에 대한 정치적 염원은 역설적이게도 이 두타연과 금강산을 잇는 佛國土, 곧 미륵의 세계를 꿈꾸는 민중들의 신실한 종교적 발원의 형태로 담겨 있다. 

하야교 물길처럼 금강산 가던 길을 열어라  

방문객들이 두타연 탐방로를 평화롭게 돌아나가는 것이 뭔가 허전했을까? 연못 아래엔 노약자와 임산부의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가 붙은 ‘지뢰체험장’이 설치돼 있다. 이처럼 안전하게 이곳을 둘러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이곳을 뒤덮고 있던 지뢰를 제거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뢰라는 흉악한 무기 자체를 ‘체험’하는 것을 통해 그것이 매설되고 다시 걷어진 이 땅의 역사와 아픔을 ‘기억’하는 것도 미래 세대에게 중요한 책임이리라. 그런데 돌아서는 뒷맛이 개운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각종 지뢰의 파괴력을 설명하는 안내문과 요란한 폭발음을 담은 음향 장치와 사람이 직접 올라타고 폭발의 진동을 체험할 수 있는 시설 등은 과연 이것이 우리가 두타연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까 고민하게 만든다. 이 아름다운 두타연을 자연과 사람의 상생, 생명과 역사의 조화, 분단의 고통에 대한 치유를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가꿔볼 수는 없을까 생각해본다. 

두타연 인근 지뢰체험장

발길을 다시 생태탐방로로 돌려 동쪽으로 물길을 따라 12km 구간을 3시간 거슬러 올라가면 길은 비득안내소에 닫는다. 군사도로로 쓰이던 거친 비포장 길 중간에 나무로 난간을 장식한 두타1교와 두타2교가 멋드러진 풍경을 선사하며 트레킹하는 사람들에게 휴식을 제공한다. 조금 더 올라가면 만나는 하야교 밑으로는 금강산에서 흘러 온 하천이 자연스레 남쪽의 물길과 합류한다.

‘누가 새들만 날아서 남과 북을 오간다고 말하는가/금강산 가는 옛 길목 하야교 삼거리에서는/윗녘 물줄기와 아랫녘 물줄기가 소리치며 흘러와 하나로 합쳐지느니/혹시나 하여 조심히 딛는 발자국소리에도/어디에선가 흙무더기 솟구치며 터져오를 것만 같은/검푸른 산빛 속에 촘촘이 묻힌 지뢰밭,/그 속에서 이끼 묻은 쪽동백 고로쇠 물박달/돌배나무들이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머루 다래 칡넝쿨들과 어우러져 살고 있다니’ (양성우의 시, 「두타연 숲길에서」 중)

하야교삼거리 좌측은 금강산 가던 옛길의 길목이다. 물론 그 길은 철문으로 막혀 있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걸어갈 수 있을 듯 아련하다. 두타연을 거쳐 다시 시작되는 금강산으로 가는 도보 길은 32km로 알려져 있다. 이 길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반에 개통된 금강산전기철도가 놓이기 천 몇 백년 전부터 서쪽에 살던 사람들이 금강산으로 가던 옛 길이다. 양구읍에서 5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금강산 장안사로 가는 길은 한양에서 내금강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금강산 가는 길’ 팻말이 보이는 곳에 앉아서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을 기다리니, 루쉰의 말이 머리를 스쳐 지난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의 발원이 모이면 길이 보일 것이요,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함께 걷는 발걸음이 길을 더 단단히 다질 것이다. 다시 출발지점으로 돌아 와 운동화에 묻은 흙을 턴다. 처음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눈에 들어온다. 관람 안내문 옆에 주렁주렁 걸려 있는 열목어 모양의 나무 조각들엔 방문객들의 소원들이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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