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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파베르의 역설 … 근대성 너머의 기술은 가능한가
호모 파베르의 역설 … 근대성 너머의 기술은 가능한가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8.06.18 1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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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동서 문명과 근대’_ 손화철 한동대 교수(글로벌리더십학부)의 「기술의 시대, 인간의 자리」

네이버문화재단 ‘열린연단_ 문화의 안과 밖’의 다섯 번째 강연 시리즈 ‘동서 문명과 근대’가 매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번 강연은 동서양 근대성의 한계와 가능성을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검토하는 취지에서 기획됐으며 올해 50회 강연이 예정돼 있다. 손화철 한동대 교수(글로벌리더십학부)의 「기술의 시대, 인간의 자리」 강연 중 주요대목을 발췌·요약해 소개한다.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기술의 시대에 인간이 근대가 추구했던 지배자의 자리에 안착하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과, 기술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다고 해서 인간이 기술을 만든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이 자율적이 됐다”는 자끄 엘륄(Jacques Ellul)의 급진적인 주장도 결국은 기술 사회의 구조 안에서 인간이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는 점을 지적한 것일 뿐, 기술을 만드는 것이 인간임을 부인한 것은 아니다.

미디어학자 옹은 “기술은 인공적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인공성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본성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 그가 염두에 둔 기술은 물론 문자다. 이 말을 그가 천착한 문자의 큰 영향력과 합쳐서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여기에 두 가지 역설이 있다. 하나는 인공성이 본성적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공적인 것을 통해 본성적인 것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문자를 통해 가능하게 된 체계적인 생각이 인간의 본성이 바뀐 것이냐는 물음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로 이해할 때의 그 생각은 문자의 사용 이후에 가능하게 된 철학자의 생각이 아니었을까. 근대가 추구한 자연의 지배도 길게 보면 문자의 사용에서 비롯된 셈이니, 기술과 관련해서 인공성과 자연성은 일종의 변증법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관계를 발표자는 ‘호모 파베르의 역설’이라 부르려 한다. 호모 파베르의 역설은 인간이 기술을 만들고, 기술이 다시 인간을 만드는 상호 형성의 관계를 강조하는 개념이다. 이는 자연 지배의 주체가 되려 하다가 도리어 그 지배의 객체가 되어버린 근대인, 그리고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즉, 하이데거와 엘륄이 비판한 기술 사회의 문제점이 사실 기술-인간의 관계의 본질과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어 현대 기술에 대한 비판이 지나친 비관으로 치닫지 않도록 할 수 있다. 인간이 기술을 만든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것은 기술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물음에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가는 데에도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다.

손화철 교수.
손화철 교수.

근대성 너머의 기술

근대의 이상은 이미 힘을 잃었는데 기술만 홀로 남아 강고하게 버티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근대의 실패와 공존하는 기술의 성공은 위태롭다. 과연 근대를 극복하는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는 오늘날 기술의 미래는 어떤 지향을 가져야 할 것인가? 근대의 성취를 상징하는 기술이 근대의 한계들을 넘어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연 근대성 너머의 기술이 가능한가?

이 물음은 얼핏 거창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구체적인 실천의 문제다. 기술철학 연구를 통해 기술 사회를 진단하고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탐색하는 것은 결국 오늘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이다. 기술은 브레이크가 없는 기관차처럼 진보의 길을 가고 있다. 그 진보의 목적이 무엇이며 끝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간의 자연 지배라는 근대의 궁극적 목표는 인간이 자연의 자리에 들어가면서 그 내용이 전체적으로 꼬이게 됐다. 

그리하여 마치 인간과 기술이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엘륄이 기술이 자율적이 되고 인간이 자유를 상실했다고 한 것이나, 소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간과 로봇이 일자리를 두고 다투게 되는 것으로 묘사하는 신문 기사나, 범용 인공지능에게 인격을 인정해야 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술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관점의 변화는 우리나라의 경우에 더욱 절실하다.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은 선진국들을 모방하고 추격하는 데 전력을 다했고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지난한 노력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과학기술 발전의 방향을 고민해야 할 경우는 별로 없었다. 추격자는 선도자의 뒤를 쫓을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 선택도 하지 않고 맹목적인 추격에 매진한 것은 아니지만, 주어진 선택지도 다른 나라들의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추격자의 자리를 벗어나 선도자의 위치로 이동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 정책과 개발 계획의 기본적인 틀은 여전히 추격자의 위치를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 과학기술의 사회적 책임이나 윤리에 대한 논의가 부차적이고 지엽적이며 사치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추격자에서 선도자로의 전환이 일어나는 때에 과학기술 정책과 개발의 기조를 바꾸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호모 파베르의 역설에서 인간이 만드는 기술의 측면을 더 부각하기 위해서는 과학자와 공학자를 비롯한 전문가와 과학기술 정책 수립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과학기술이 전문화되고 거대화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학기술과 수동적인 관계를 맺게 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현주소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과학기술의 발전 방향을 인류 전체에게 유익한 쪽으로 이끌고 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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