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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노르만 그리고 영국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系譜
바이킹, 노르만 그리고 영국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系譜
  • 교수신문
  • 승인 2018.06.18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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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학교_ 3강 양정무 한예종 교수(미술이론가)의 「시각예술 예술을 지배한 자, 그대 이름은 바이킹」

“왜 21세기에 중세를 알아야 하는가?” 움베르토 에코가 세상에 던진 질문이다. 이에 중세 전문가 5인이 ‘중세학교’를 통해 역사, 문학, 시각예술, 역사, 철학의 측면에서 이 질문에 답한다. ‘중세 학교’는 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한 『중세』(시공사 刊 ) 시리즈 완간을 기념해 마련된 특별 강연으로 지난달 25일에부터 오는 22일까지 5주간 매 금요일 저녁 7시 30분에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진행된다. 세 번째 강의를 맡은 양정무 한예종 교수(미술이론과)의 강의록을 소개한다. 다음 강의는 이희수 한양대 ERICA 캠퍼스 교수의 「1453, 콘스탄티노플 혹은 이스탄불」이다.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전통을 중시하는 나라, 영국? 

얼마 전 영국 황실의 결혼식이 화제가 되었다.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손자인 해리 윈저가 주인공이다. 왕위 계승 서열 6위(1위는 엘리자베스의 아들 찰스, 2위는 찰스의 장자인 윌리엄, 그리고 3위부터 5위까지는 윌리엄의 3남매)인 해리 왕자가 영국 왕관을 차지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큰 화제가 된 것은 그의 아내가 된 메건 마클 때문이다. 연상녀에 이혼녀, 게다가 흑인 혼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 할리우드와 TV시리즈에도 얼굴을 비춘 연예인이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영국 왕실에서 이런 결혼식이 가능할까도 싶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바이킹, 노르만, 그리고 영국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계보 말이다. 

바이킹의 시대

중세 유럽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인공이 바이킹이다. 바이킹이라면 양쪽으로 뿔이 달린 투구를 쓰고 도끼를 휘두르는 야만족으로 자주 묘사되는데, 이들은 원래 유럽의 최북단인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덴마크에 퍼져 살던 민족으로 북쪽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노르만이라고도 부른다. 춥고 험준한 환경 때문에 육로보다 뱃길을 적극적으로 개척했고 자연스럽게 배를 만드는 기술과 항해술이 발전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와 식량을 구하다 자연스럽게 해적으로 변신했다. 본격적으로 바이킹의 악명이 알려진 것은 793년의 일이다. 이후 전 유럽을 유린하면서 수백 년간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간다. 당시 다른 나라들은 배를 타고 먼 바다까지 나갈 능력이 없었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록 바이킹은 대담해졌고 대서양뿐만 아니라 지중해 깊숙한 곳까지 진출했다. 콜럼버스에 앞서 신대륙까지 도달했다는 설도 있다. 

이렇게 8세기부터 중세 유럽은 대위기에 빠진다. 이슬람 세력과 훈족 계통의 마자르족이 침입해 오면서 혼란은 가중됐다. 유럽에서는 샤를마뉴부터 오토 1세까지 강력한 황제들이 외적의 공격에 맞섰지만 치러야 할 대가가 아주 컸다. 10세기에 접어들면 바이킹은 기존의 침략 방식을 바꾼다. 일시적 노략질이 아니라 아예 한 곳에서 몇 년씩 정착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어차피 이들을 힘으로 누를 수 없다고 생각한 프랑스의 ‘단순왕’ 샤를 3세는 아예 바이킹에게 땅을 떼어 주고 대신 충성 서약을 받아서 주종 관계를 맺는다. 이때부터 바이킹들이 자리한 센 강 하류의 땅은 북쪽 사람들의 땅이라는 뜻으로 노르망디라고 불렸다. 그리고 프랑스 왕족이나 귀족의 딸과 결혼하면서 점차 프랑스 귀족으로 변모한다. 11세기에 이탈리아 남부까지 세력을 넓혀서는 노르만 왕국을 만들고 원래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이슬람, 비잔티움 예술을 받아들여 독특한 문화를 꽃피운다. 이때부터는 바이킹이 아니라 노르만족이 된다. 

양정무 한예종 교수(미술이론과)가 '중세학교' 세 번째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양정무 한예종 교수(미술이론과)가 '중세학교' 세 번째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예술 애호가, 노르만 

노르망디에 자리 잡은 바이킹, 즉 노르만 민족은 유럽 대륙에서 생겨난 로마네스크 미술을 받아들여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킨다. 워낙에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살아 왔던 민족답게 무엇보다 건축 영역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일례로 노르웨이에 있는 스타브 교회는 12세기에 지어져 800년간 깔끔하게 보존돼 있다. 해양 민족 특유의 개방성에 기술력이 더해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 몽생미셸이다. 고즈넉한 해변과 아름다운 섬이 어우러져 프랑스를 찾는 관광객에게 사랑받는 여행지다. 하지만 전쟁이 잦았던 중세 때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원래는 수도사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그런데 노르만족이 이곳을 점령해 요새로 만들었다. 섬의 맨 위에 자리 잡은 건축물은 생 미셸 수도원이고 그 아래에 암굴의 성모 교회가 있는데 노르만족이 정착하고 나서 지은 교회다. 장식이 거의 없는 단순한 구성인데 아치 활용이 눈에 띈다. 소박하지만 목조 건물을 짓던 노르만족이 돌로 짓는 건축에 대해 배워 가는 과정이 보인다고 하겠다. 주목할 점은 불과 100년이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기술과 예술적 성숙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캉에 있는 ‘쌍둥이 교회’도 그러하다. 

노르만족의 역사가 시작되다

영국은 지금까지 미술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중요하게 언급된 적이 없는 곳이다. 그런 영국이 서기 1,000년경부터 중세 역사의 새로운 무대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여러 정복자들의 대결 장소가 됐기 때문이다. 영국 왕위를 놓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는데, 그 전쟁의 최종 승리자가 프랑스 북부에 자리한 노르만 공국의 지배자 윌리엄 공작이다. 바이킹의 피를 이어받아 욕심도 많고 왕성한 활동을 했던 그는 프랑크 왕국의 왕 아래서 일개 영주로 사는 삶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휘하의 노르만족 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영국으로 원정을 떠난 모험가이기도 했다. 덕분에 영국에 노르만 왕조의 시대가 열린다. 현재 영국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윈저 가문도 거슬러 올라가면 노르만 왕조와 맞닿아 있다. 따라서 영국의 역사가 그로부터 시작됐다고도 볼 수 있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태피스트리에 남겨졌는데 노르망디 공국의 영토였던 프랑스 바이외 지역에 있어 ‘바이외 태피스트리’라고도 한다. 천 위에 직접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정교한 작품이다.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높이가 50센티미터 정도고 전체 길이가 7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작품이다. 여기에는 58개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물론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편파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으나 그 예술적 가치만은 인정할 만하다. 

노르만족의 정복 이후 영국의 미술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다. 사회 지배층이 변하다 보니 미술품과 건축의 모습까지 바뀐 것이다. 새로운 건축 양식을 도입한다는 것은 새로운 지배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아주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 결과 이전까지 유럽 대륙에서만 볼 수 있던 건축물들이 영국에 새워지는데 대표적인 것이 런던탑이다.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한 다음 가장 먼저 지은 성이다. 지금 우리 눈으로는 왜 탑인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높은 건축물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생경했다. 높이가 27미터니 현대인의 눈으로도 상당히 웅장한 건물이다. 

더럼 대성당과 고딕의 시작 

노르만족의 주도하에 시작된 새로운 건축의 흐름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더럼 대성이다. 영국 북동부의 더럼이라는 도시에 있는 성당으로, 더럼 강이 대성당과 주변 마음을 감싸고 흐르는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유명한 성당이 강으로 둘러싸여서 접근이 어려운 곳에 들어섰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이 장소는 원래 앵글로색슨족이 모여 살던 곳이었는데 노르만 정복자들이 이곳을 완전히 불태운 다음 자신들의 땅으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더럼 지역에는 언제나 반란의 위험이 도사렸다. 스코틀랜드 국경과 가까웠기에 외적에게 공격당할 가능성도 높았다. 그래서 이곳 주교는 종교 지도자인 동시에 군사령관 역할까지 맡아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따라서 대성당의 외형이 요새처럼 지어진 것이다. 

또한 더럼 대성당은 미술사적으로도 매우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영국은 더럼 대성당이 훗날 등장하는 고딕 양식의 원조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영국은 오랜 기간 고딕에 대한 원조 논쟁을 벌여 왔다. 보통 첨두아치, 늑골 궁륭, 공중 부벽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고딕 건축의 3요소다. 더럼 대성당의 천장에서 늑골 궁륭을 볼 수 있다. 로마네스크 성당의 천장은 대체로 터널식 아치인데 이 시대에 오면 늑골 궁륭을 바뀐다. 1100년경에 유럽 건축가들이 가장 신경 쓴 곳이 천장이다. 어떻게 하면 돌을 재료로 하면서도 높고 튼튼하게 지을지 고심했던 것이다. 그 최종 결론이 이 우산살 같은 천장이다. 당시의 최첨단 공법으로 뼈대 같은 돌들이 힘을 받아 높은 천장이 무너지지 않고 수백 년을 버텨 오고 있다. 또한 뾰족한 모양의 아치인 첨두아치도 있다. 둥근 아치에 비해 공간을 넓어 보이게 하고 하늘을 향해 상승하는 듯한 효과도 준다. 게다가 공중 부벽과 비슷한 구조물도 숨겨져 있어 이 때문에 영국 사람들은 더럼 대성당을 근거로 영국에서 고딕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거시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고딕 건축의 진정한 매력은 늑골 궁륭이나 공중 부벽과 같은 구조적 요소가 아니라 그것이 주는 종합적인 효과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확실히 프랑스가 한 발 나가 있다. 하지만 프랑스도 자신들이 구축한 고딕의 효과에 도달하는 데 노르만족이 영국에서 보여 준 건축 실험도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영국에 대한 선입견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해리 왕자의 결혼식 또한 어찌 보면 아주 오랜 선조의 그것과 맞닿아 있는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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