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정본·공인·가독성 두고 '설전'…심도 깊은 ‘학술적 논쟁’으로 나아갈까?
최초·정본·공인·가독성 두고 '설전'…심도 깊은 ‘학술적 논쟁’으로 나아갈까?
  • 양도웅
  • 승인 2018.06.16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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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칸트전집』 논쟁에서 주목해야 할 4가지 쟁점

철학계가 오랜만에 논쟁으로 시끌시끌하다. 지난달 25일 1차분(총 16권 중 3권)이 발간된 『칸트전집』(이하 칸트전집) 때문이다. 한 학자로부터 ‘晩時之歎’이라는 감상까지 받은 이번 전집이 그런데 왜 철학계를 논쟁에 빠뜨린 것일까? 

지난 4일 전집을 출판한 한길사는 언론사에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이번에 한길사가 선보이는 『칸트전집』은 우리나라 최초의 『칸트전집』일 뿐만 아니라, 한국칸트학회라는 칸트철학 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권위자들(34인)이 모인 집단이 책임지고 기획·번역한 ‘정본’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라고 설명했다. 같은 날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이충진 한국칸트학회 회장(한성대)은 이번 번역 작업에서 가장 신경 쓴 부분 중 하나로 ‘가독성’을 꼽았다. 이어 이번 전집이 ‘한국칸트학회의 공인’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논쟁은 바로 이 지점, 칸트전집을 소개하며 사용된 △최초 △정본 △공인 △가독성 때문에 촉발됐다. 

지난달 25일 한길사에서 출판된 한국칸트학회 기획·번역의 『칸트전집』 1차분의 모습. 사진 제공=한길사

‘최초 전집’이라는 타이틀

한국에서 칸트를 공부하며 故 최재희 서울대 명예교수와 백종현 서울대 명예교수를 마주치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1914년생인 최 교수는 지난 1957년에 칸트의 비판 3부작 중 하나인 『실천이성비판』을, 1972년에 『순수이성비판』을 청구출판사와 박영사에서 각각 번역 출간했다(최 교수는 1955년에 『순수이성비판』(상)을 신태양사에서 출판한 바 있다). 박영사판 『순수이성비판』 출판 과정에서 백종현 교수는 박영사로 출근해 최 교수의 번역작업을 한 달 간 돕기도 했다. 하지만 최 교수는 전집의 형태로 칸트의 저서들을 번역 출간하진 않았다.

이 전집 출간이라는 몫은 국내 학자 가운데 최초로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백 교수에게로 돌아갔다. 백 교수는 지난 2002년에 아카넷에서 『실천이성비판』을 출간한 뒤, 2018년 6월 현재까지 총 10종 11권의 칸트 저서를 번역했다. 이 책들은 2014년에 ‘아카넷의 한국어 칸트전집’이라는 타이틀로 묶여 현재 출간 중이다. 백 교수는 향후 10년 동안 8종 13권을 다른 학자들과 함께 추가로 번역해 ‘아카넷판 한국어 칸트전집’을 완성할 계획이다. 

정리하면 칸트의 저서를 국내에서 최초로 번역한(소개가 아니라) 이는 최재희 서울대 명예교수이고, 국내에서 최초로 칸트전집을 기획해 번역작업을 ‘진행중’인 이는 백종현 서울대 명예교수다. 물론 아카넷 판 칸트전집은 2020년을 훌쩍 지나 완성될 예정이지만, 이번에 한국칸트학회가 기획·번역해 한길사에서 출판한 전집은 내년까지 남은 13권이 모두 출간돼 완간될 예정이다. 혹여 문제가 있다면 이 지점이다. 최초의 칸트 전집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는 쪽은 어디일까. 먼저 출판하기 시작한 쪽일까, 아니면 먼저 출판 완료한 쪽일까. 

왼쪽은 최재희 교수가 번역해 1972년에 박영사에서 출판한 『순수이성비판』. 오른쪽은 아카넷 한국어판 『칸트전집』 가운데 가장 최근에 번역 출판된 『교육학』, 백종현 교수가 번역했다. 사진 출처=박영사 홈페이지, 아카넷 홈페이지

번역본에 定本을 붙일 수 있을까? 

도서출판b에서 일본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컬렉션을 기획·번역해 출판하고 있는 조영일 주간은 “만약 번역 대상이 ‘정본’이라면, 그 정본을 번역한 저작물 앞에 ‘정본’을 붙여 정본 번역본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번역물에 정본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경우가 과연 있는지, 붙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조영일 주간이 말하는 정본은 正本이 아니라 定本이다. 대개 전자는 최초에 작성된 저작을 말한다. 후자는 전자보다 정의내리기 복잡하다. 만약 ㄱ라는 작가가 A라는 작품을 작성한 후, A라는 작품을 여러 번 수정해 여러 출판사에서 그것을 출판했을 때, A라는 작품에 여러 판본이 존재하게 되고 여러 판본의 A들 가운데 어떤 A가 가장 적절한 A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특히 ㄱ라는 작가에 대해 연구를 할 때나 ㄱ라는 작가의 전집을 만들 때 그런 문제는 두드러진다. 이 경우 작가인 ㄱ이 결정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하지만 ㄱ이 사망했다면? 그때는 문제가 더욱 복잡해진다. 전문가 혹은 직계가족이 나서 가장 정확한 작품 A를 합의에 의해 선정하는 것이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 혹은 正本을 定本으로 삼을 수 있다.

칸트의 저작도 이와 유사하다. 칸트의 저작도 여러 판본이 존재한다. 그 중 定本이 무엇인지는 칸트만이 알고 있다. 하지만 칸트가 일일이 그것을 결정하지 못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의 합의가 정본 결정 방법의 한 방편일 수 있다. 그러나 번역본의 경우에는 조건이 하나 더 붙는다. 왜냐하면 번역은 독일에서 결정된 칸트의 定本을 번역했다 하더라도, 역자에 따라 다르게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재희 교수의 번역본에도, 백종현 교수의 번역본에도 ‘정본’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백 교수는 “정본은 원저에 대해서만 쓸 수 있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학문 영역에서 公認의 문제

이번 칸트전집은 한국연구재단의 토대연구 분야 총서학 지원 사업의 결과물로,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매년 2억원씩 총 6억원의 지원을 받아 진행됐다. 이후 2년의 연구결과 발표 준비 기간을 거쳐 지난달 결과물의 1차분이 출판됐다. 이번 칸트전집 기획에 들어간 지원금은 공공의 영역인 국가예산이다. 따라서 이 지원금을 받아 수행된 사업은 공공사업이고, 그 사업의 결과물인 칸트전집은 공공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공공의 것’과 ‘공인된 것’은 다르다. 후자에서는 공인의 주체가 누구인가, 언제든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번역에 공인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번 칸트전집의 경우로 말하면, 번역에 참여하지 않은 학자·연구자들이 심사기구를 구성해 ‘공인’이라는 타이틀을 붙일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다. 하지만 이번 칸트전집 출판 과정에서 공적기구의 심사를 거쳤는지는 불분명하다. 설사 공인이라는 타이틀을 어떤 공적기구가 이번 칸트전집에 부여한다 하더라도, 시대의 변화와 함께 번역 또한 변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보편과 표준’이라는 함의를 갖는 ‘공인’이라는 타이틀은 적어도 철학(학문) 영역에서 지양돼야 한다. 이번 칸트전집이 백종현 교수가 번역한 아카넷 출판 칸트전집과 용어와 문장구조에서 차이가 있듯이, 이번 칸트전집과 다른 용어와 문장구조의 칸트전집이 언제든 출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철학의 핵심 중 하나는 누가 뭐래도 ‘비판’이다. 의심과 비판을 차단할 가능성이 큰 ‘공인’이라는 타이틀은(타이틀이 한시적으로 사용된다 하더라도), 그래서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독성의 문제와 독자

칸트가 살던 18세기 독일은, 지금의 한국처럼 고등학교 졸업생 10명 중 6명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던 곳이 아니었다. 지금보다 문맹률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문장을 정확히 해독할 수 있는 비율인 문해율 또한 마찬가지였다. 칸트는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따라서 철학을 심도 있게 공부하지 않는 사람이 칸트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백종현 교수는 이런 칸트의 글을 ‘직역’했다. 이는 그의 글이 소위 말해 ‘친절’하지 않은 이유다.

반면 이번 칸트전집의 역자들이 말하는 ‘가독성’의 실체는 현재 칸트를 공부하는 젊은 연구자들과 관련이 있다. 현재 칸트를 공부하는 20대와 30대는 한자에 익숙하지 않다. 이는 젊은 연구자들이 접하는 단어와 문장구조가 변했다는 사실의 한 단면이다. 따라서 역자들은 한자보다는 한글로, 또한 칸트 독일어 원문의 구조에 다소 변형을 가하더라도 한국어 문장 구조에 맞춰 번역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차이는 백 교수의 번역 철학인 ‘원문의 구조까지 그대로 한글로 옮기는 것’과 명백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번 칸트전집의 역자들이 취한 방법이 가독성을 높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어느 쪽의 글이 가독성이 높은지는 젊은 연구자를 포함한 칸트를 읽는 모든 독자들이 판단해야 할 몫이다. 즉 ‘이번 칸트전집을 작업하며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번 전집은 가독성이 높다’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칸트 초상화

그러나 다음은 학술논쟁으로 나아가야

위 네 가지 논쟁들은 ‘말이 말을 부른’ 논쟁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전집 발간 작업에서도 언제든 마주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한편 이번 논쟁의 당사자 중 한 사람인 백종현 교수는 지난 12일, 이번 전집을 번역한 학자들에게 다섯 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정본이라는 표현을 거둬줄 것 △한국칸트학회 공인 칸트전집이라는 표현을 거둬줄 것 △한길사판 칸트전집으로 호칭해줄 것 △이번 칸트전집에서 합의·결정한 용어를 제3자에게 사용하도록 권고하지 말 것 △가독성을 근거로 다른 학회 회원의 역서에 대해 독자들이 오도하도록 하지 말 것. 

현재(15일) 한길사 홈페이지에 게재된 보도자료에는 ‘최초’, ‘정본’ 등의 표현이 삭제돼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 14일 이충진 한국칸트학회 회장과 이번 전집의 연구책임자인 최소인 한국칸트학회 고문은 기자에게 “‘최초’, ‘정본’, ‘공인’, ‘가독성’ 등에서 다소 지나친 면이 있었다”며 “역자들은 다음달 초 회의를 열어 백 교수의 요구사항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답변을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루가 멀다 하고 또 다른 논쟁으로 계속해서 옮겨 붙었던 이번 칸트전집 논쟁은 곧 일단락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번 논쟁에서 안타까운 점은 이번 칸트전집 발간으로 다종다양해진 칸트 번역서 자체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가령 ‘a priori, transzendental’ 등과 같은 번역어 선택 문제에 대한 논의가 더욱 심화되지 않았다. 백종현 교수도, 이번 칸트전집의 책임자인 이충진 회장이나 최소인 고문 등도 정본과 공인 등의 문제들이 빨리 잦아들길 바라고 있다. 논쟁의 당사자 모두가 바라는 것도, 그들을 바라보는 젊은 연구자와 독자들이 바라는 것도 보다 심도 깊은 ‘학술적 논쟁’일 것이다. 

양도웅 기자 doh0328@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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