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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읽고 다르게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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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불문학
  • 승인 2018.06.1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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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박찬순의 첫 소설집 『발해풍의 정원』은 2009년에 나왔지만 미드(미국 드라마)를 즐겨봤던 애청자들이라면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과 「맥가이버」를 통해 이 소설가와 이미 오래 전에 조우했을 것이다. 번역을 하다가 소설을 쓰게 된 작가의 사례는 간혹 있다. 번역가 김석희의 경우가 그렇고 프랑스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는 독일 문학을 번역하는 것으로 작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번역의 경험은 대개 두 가지로 창작활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먼저 자신이 번역했던 작가와 작품세계가 현재의 창작물에 직간접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다음으로는 ‘지연의 경험’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번역가나 외국문학 전공자라면 경험했겠지만 외국어 텍스트의 독해에는 모국어가 아닌 이상 의미 파악은 물론 공간에 대한 상상, 문화적 의미의 유추 등 모든 것에 있어서 원작을 재구성하는 데 일정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소설가 박찬순의 경우는 번역의 경험이 ‘지연의 경험’으로 나타났을 것으로 보인다.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암스테르담행 완행열차』(강, 2018)를 읽으면 삶 속에서, 책 읽기에서 지연의 경험과 ‘다르게 보는 것’이 가져다주는 문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또 다른 방식의 삶의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소설집에 수록된 두 번째 단편 「테헤란 신드롬」에서 독자들은 이방인의 시선을 통해 우리문학을 읽는 경험을 하면서 이미 읽었던 것과 이미 익숙해져서 더 이상 새로운 의미를 찾지 않는 것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읽게 된다. 이란의 테헤란대에서 한국어학당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문학을 가르치는 ‘나’는 윤대녕의 「은어낚시 통신」과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이란 학생들에게 이해되는 방식을 통해 익숙했던 것이 낯설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란 학생이 「은어낚시 통신」에 나오는 ‘존재의 시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물었을 때 ‘나’는 은어가 모천으로 회귀하듯이 우리 삶도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 말고 그 의미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또한 한국어 학당의 책임자가 「무진기행」을 유부남과 음악선생 사이의 불륜 소설로 읽고 성적 표현을 문제 삼는 것에 당황하며, 무진을 떠나면서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라는 구절을 두고 그 부끄러움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어려운 것에 당혹감을 느낀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은어낚시 통신」에서 익명의 64년생들이 ‘세계의 저쪽 편’에서 비밀 모임을 결성한 것과 「무진기행」에서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무진의 풍경, “이승에 한이 있어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은” 안개에 대한 묘사를 이국의 학생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아니 우리라고 해서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일까? 소설가 박찬순은 너무 친숙해져서 더 이상 그 의미를 묻지 않는 이야기들과 문장들에 대해 조금 늦게 읽고 다르게 볼 것을 제안한다. 작가는 이국의 “학생들의 어눌한 낭독으로 소통이 조금씩 지연됨으로써 소설은 듣는 이의 가슴에 더욱 깊이 새겨지고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페르시아인의 시선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몽테스키외는 그의 서간체 소설 『페르시아인의 편지』에서 페르시아인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시선으로 프랑스 사회를 들여다보고 풍자한다. 동양인의 시선으로 서양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이 소설에 나타난 시선은 사실 서구인의 시선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속한 사회를 한 발짝 떨어져서 객관화해 보기 위해 타인의 시선을 빌려온 것에 불과하다. 「테헤란 신드롬」에서도 작가는 페르시아인의 후손인 시린의 시선과 입을 빌려 독자들이 우리문학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묻지 않았던 질문들을 쏟아낸다. 그 질문들 중에는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와 같은 꺼내기 쑥스러워서 혹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묻어두었던 질문도 있다.

소설집에 수록된 두 번째 단편, 「암스테르담행 완행열차」에서도 ‘지연의 경험’은 또 다른 차원에서 삶을 다르게 경험하게 해준다. ‘너무 높은 목소리로’ 싸우다보니 이혼을 하게 된 ‘나’는 브뤼셀 역에서 고속열차를 놓쳐 어쩔 수 없이 암스테르담행 완행열차를 타게 된다. 그러자 고속열차의 속도에 익숙해진 우리가 잊고 있었던 차창 밖 풍경이 보이고 세련된 옷차림의 승객들은 아니지만 저마다의 사연과 삶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한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듯이 느리게 가면 비로소 보이고 들리는 것이 있는 셈이다. 작가의 이런 경험들이 단편이 아닌 장편소설과 만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궁금해진다.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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