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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마지막 시인 단테, 구술성 깃든 문자성의 세계를 創造하다
중세 마지막 시인 단테, 구술성 깃든 문자성의 세계를 創造하다
  • 박상진 부산외대 교수·이탈리아어과
  • 승인 2018.06.11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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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학교_ 2강 박상진 부산외대 교수(이탈리아어과)의 「중세의 마지막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

“왜 21세기에 중세를 알아야 하는가?” 움베르토 에코가 세상에 던진 질문이다. 이에 중세 전문가 5인이 ‘중세학교’를 통해 역사, 문학, 시각예술, 역사, 철학의 측면에서 이 질문에 답한다. ‘중세 학교’는 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한 『중세』(시공사) 시리즈 완간을 기념해 마련된 특별 강연으로 지난달 25일부터 오는 22일까지 5주간 매 금요일 저녁 7시 30분에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진행된다. 두 번째 강의를 맡은 박상진 부산외대 교수(이탈리아어과)의 강의록을 소개한다. 다음 강의는 양정무 한예종 교수(미술이론과)의 「예술을 지배한 자, 그대 이름은 바이킹!」이다.

정리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단테가 활동했던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반 시기는 서양에서 중세가 근대로 이어지던 거대한 과도기의 정점이었다. 과도기의 정점이라는 말은 앞서고 뒤따르는 두 흐름이 겹친 상태를 의미한다. 중세 내내 단지 무의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듯 보였던 고대를 다시 불러 살려내는 역사적 흐름은 사실상 중세의 핵심 어디선가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는 중세의 강을 건너면서 갑자기 나타났다기보다 중세의 두터운 안개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단테의 시대에서 아직까지 중세는 잊히기에는 너무 가까운 과거였고 근대는 외면하기에는 이미 너무 가까이 와버린 미래였다. 시대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 단테를 만든 근본적인 동력이라고 할 때, 단테가 이른바 종합적인 자세로 인간을 탐구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드레이퍼스는 『모든 것이 빛난다』에서 “이 세계 안에 이미 주어져있는 의미들에 우리의 욕망을 조율할 수 있다는 것”이 『신곡』에 깔려있는 단테의 근본적 생각이라고 말한다. 꽤나 적절하고 핵심적인 파악이다. 「천국」 33곡의 문구들이 보여주듯, 신이 우주를 창조했고 신의 얼굴에 우주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의미가 이미 새겨져 있다는 생각 위에서 단테가 「신곡」을 썼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욕망을 이미 주어진 어떤 것에 갖다 맞춘다는 식의 일방통행을 생각하지 않은 것도 확실하다. 마치 원자 속의 소립자들의 움직임처럼, 신의 얼굴에 새겨진 의미는 우리가 그것을 보는 대로, 그 존재 위치나 존재하는 방식을 끝없고 끊임없이 바꾼다. 신의 의미는 이미 거기에 주어져있되 또한/동시에 주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이미 거기에 주어져 우리가 거기서 출발하고 그것에 의지하며 나아가지만, 또한/동시에 그렇게 출발하고 나아가는 동안/나아감으로써 그것은 이미 거기에 없었던 것으로 되며, 이윽고 또 다시 나타나는 반복적인 변신을 이루는 것이다. 

신의 얼굴에 새겨진 의미

드레이퍼스가 단테의 문학에서 허무주의의 시대에 중요한 빛을 던지는 실마리를 찾는 것은 적절한 일이지만, 그 실마리는 이렇게 우리의 욕망에 따라 신의 얼굴이 존재와 부재를 거듭하고 그 모습을 달리한다고 보는데서 더 적절하게 우리 손에 잡힐 수 있다. 이렇게 단테를 바라볼 때, 허무주의에 맞서는 그의 문학을 또 하나의 본질주의적 구조물로 고정시키지 않을 수 있다. 우리의 욕망이 신의 얼굴에 새겨진 의미들에 맞춰 조율돼야 한다면, 그 조율의 주체는 신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며, 따라서 우리의 욕망의 조율은 신의 얼굴이 중심을 이루는 원심력에 종속되기보다는 나름의 힘으로 그 중심에 저항하거나 섞이도록 하는 구심력이 함께 작용함으로써 이뤄진다. 

그래서 신의 얼굴에 새겨진 의미의 원천은 우리 외부에 놓여있고 거기서 우리에게로 날아오지만, 또한 우리는 그것을 우리 내부에 들이고 또한 우리 욕망의 세계를 다시 외부로 날려보낸다. 아감벤이 말하듯, 신의 얼굴은 인간 얼굴들의 시뮬타스(simultas)다. 시뮬타스란, 구성하는 요소들이 대등한 관계로 함께 있는 것을 말한다. 인간 얼굴들이 이루는 시뮬타스의 동시성을 포착하는 것이 곧 신의 얼굴의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단테가 천국의 생생한 빛 속에서 봤던 우리의 초상이다. 단테는 천국에서 신이 아니라 인간을 본 것이다. 

여기서 단테를 마지막 중세 시인으로 부르는 까닭이 분명해진다. 중세의 가을을 산책하던 단테는 중세의 열매를 먹으며 근대의 새로운 씨앗을 뿌리고 있었다. 그 씨앗은 열매의 기반을 공유하면서도 또 다른 미래를 배태하고 있었다. 같으면서도 다른, 중세적이면서도 또한 근대적인, 그런 지평으로 향하는 산책자 단테의 발길은 이미 근대를 넘어선 어디론가 뻗어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중세의 신성과 근대의 이성의 어느 한 쪽에 정박하지 않고 둘 사이를 왕복하며 또 다른 길들로 접어드는 단테의 산책로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러한 단테의 행보는 단테의 글 속에 이미 쓰여 있는 것에 더해 그러한 우리의 상상에 의해 비로소 가동되고 또한 바뀐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단테를 실존적으로 혹은 리얼리즘의 방식으로 읽는데서 나오는 문학적 효과이며, 거기서 단테가 진정한 고전 작가로 떠오른다고 믿는다. 

강력한 구술의 형태로 보급됐던 『신곡』

단테와의 진정한 만남을 위해 우리는 『신곡』이 엄연히 하나의 물질로서의 책으로 존재해왔고 지금 우리 앞에 그렇게 놓여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신곡』이 구텐베르크가 유럽에 인쇄술을 도입하기 훨씬 이전에 나왔다는 점이 중요하다. 『신곡』이 출간될 당시에는 손으로 직접 베껴 쓴 필사본의 형태로 유통되었을 텐데, 책이 귀한 반면 글을 못 읽는 사람들은 넘쳐나서 『신곡』을 실제로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상당히 제한됐을 것이다. 15세기 중반에 가서야 유럽에 인쇄술이 널리 보급되면서 『신곡』도 인쇄본으로 만들어져 본격적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 이전에 적어도 100여 년 동안 『신곡』은 입에서 입으로, 귀에서 귀로, 더욱 활발하게 전파됐다. 눈으로 보는 데서 나오는 문자성(literacy. 읽고 쓸 줄 아는 능력)보다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 구술성(orality. 문자성이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지는 사고와 표현)은 단테가 『신곡』을 쓰고 또 『신곡』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가는 유력한 경로였다. 부르크하르트가 진술하듯 문자를 해독할 줄 모르는 당나귀 몰이꾼까지 단테의 칸초네를 소리 내어 읊을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단테 당시에 작가의 글이 문자보다 더 강력하게 구술의 형태로, 어쩌면 더 주된 경로가 되면서, 보급되는 상황이었다는 점은, 단테가 『신곡』을 쓰면서 아무래도 시각보다는 청각적 효과를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해준다.

그 점을 가장 강력하게 받쳐주는 예는 운율과 리듬이다. 운율과 리듬은 눈으로보다는 입으로 소리 내고 귀로 듣는 데서 훨씬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신곡』은 시어가 지니는 운율과 리듬이 대단히 정교한 설계에 따라 짜인 거대한 운문의 복합체다. 전체가 1만4천233행으로 이뤄져있는데, 각 행의 음절을 열한 개로 통일하고 네 번째와 여섯 번째, 그리고 열 번째 음절에 강세를 두는 십일음보 형식(endecasillabo)를 완벽하게 유지하고, 또 세 개의 행이 하나의 단위를 이루면서 한 행의 맨 나중에 나오는 단어의 끝 부분이 한 행 건너 그 다음 행의 맨 나중에 나오는 단어의 끝 부분과 철자와 음이 일치하도록 연결하는 삼연체(terza rima) 기법을 구사한다. 삼연체는 단테가 고안한 압운 체계로, 이후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가 사용했다. 단테는 이 새로운 시 형식의 기법을 갈고 닦는데 오랜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이런 기법들은 형식상의 엄밀함과 완결성으로도 감탄을 자아내지만, 또한 『신곡』을 소리 내어 읽을 때 발음과 청음의 감칠맛을 느끼게 하면서 계속 이어지는 청각적 사슬의 효과로 인해서 내용을 거듭 반추하고 기억하게 만든다. 삼위가 일체를 이룬다는 상징성이 들어있지만, 그보다 소리 내어 읽으면서 앞을 향해 나아가는 실질적 움직임이 더욱 돋보인다. 한 행을 읽으면 다음 행이 늘 대기하고 있고, 그 이전 행들이 다음 행들에 딸려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전의 만남에 이어 다음 만남을 예견하는 듯하다. 『신곡』은 눈으로 읽는 책이 아니라 오히려 입으로 소리 내어 발화하고 귀로 들으면서 눈앞에 그 광경을 떠올리는 시청각 텍스트에 가깝다. 『신곡』이 처음 나왔을 당시의 ‘독자’들은 『신곡』에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서 『신곡』 본연의 맛을 훨씬 제대로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서양의 단테 학자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마치 우리의 경우 판소리를 완창하듯, 『신곡』 전체를 암송하여 청중 앞에서 들려주는 일이 드물지 않다.

우리가 단테의 육필을 느끼려면 그 분신들을 통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단테의 육성을 듣기 위해서는 이탈리아어판이든 영어판이든 한국어판이든 『신곡』이라는 책의 그 하얀 종이 위에 박힌 까만 글자들을 읽어야 한다. 단테는 자신의 육성이 가닿지 않을 먼 미래의 독자, 먼 세상의 독자들을 자꾸자꾸 머리에 떠올리며 『신곡』을 써나갔다. 단테는 미리부터 『신곡』에서 펼쳐내는 자신의 순례에 가상의 독자들, 그 무한으로 많아질 독자들과 동행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제는 단테의 실제 육성보다도 그것을 떠올리는 우리의 상상과 감각과 지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당대에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고자 했던 철학자 시인의 웅숭깊은 의도는 이제 시공을 초월해 뻗어나가고 있는 중이다. 

단테는 자신에게 받아쓰기를 시키면서 창작을 한 대표적인 예다. 사랑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으면 그것이 그대로 시가 된다는 청신체의 시작 방법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개인의 목소리를 공통의 문자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목소리를 문자로,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 그와 관계없이, 목소리를 내고 듣는 일이 우선 이뤄졌다는 뜻이다. 목소리를 듣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맞춰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과 같았다. 그 속에서 단테는 지식을 구술의 세계로 재순환시키면서 그 지식이 화석화되지 않고 역사와 경험의 맥락에 스며들도록 만들고자 했다. 

고대와 중세까지 유지된 쓰기 방식

단테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고립돼 있었다. 스스로 불러주고 스스로 받아쓰는 형국이었다. 누군가와 실제로 대화를 하거나 응답을 받아 고쳐가며 쓴 것은 아니었다. 단테는 자기가 불러주고 자기가 받아쓰기를 통해 발화의 맥락성, 말하기의 상황성을 자신의 문자 안에 녹여내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그의 받아쓰기는 자신의 내면-기억과의 대화를 통한 것이었지만 또한 자신을 둘러싼 사회와 역사의 맥락과 상황에 대한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단테는 그런 과정에서 언제나 독자를 상상하고 또 실제로 불러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리라 기대하고 예상했다. ‘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순례의 동반자로 삼았고 자신의 글쓰기의 전제로 삼았다. 또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독자들까지도 생각했을 것이다. 단지 허구적 상상에 지나지 않을 이러한 재귀(자기가 불러주는 것이 자기에게로 향한다는 의미에서) 받아쓰기는 단테의 뛰어난 상상력으로 가능했다. 단테는 작가이자 독자였으며, 독자의 존재를 그의 글 속에 매우 구체적으로 위치시켰다. 독자는 실제로 『신곡』을 읽으면서 작가가 자기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기 마련이다. 이는 고대와 중세까지 유지돼온 쓰기의 방식이며 근대 문학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 식의 쓰기가 독자와의 대화를 내재하는 것은 그 쓰기가 인쇄를 전제로 한 것이냐의 여부와 긴밀하게 관련된다.

『신곡』에서 단테는 문자성을 내면화하는 단계까지 완전히 나아가지 않았다. 쓰기가 사고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쓰기를 내면화하는 기간은 문자의 정착 이후에도 상당 기간 지속된다. 13세기 로망스어가 문자로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같은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소리를 담은 말에 상응하는 문자로 쓰이는 새로운 글이 정착되는 동안, 그 새로운 글에는 말의 흔적이 한동안 남아있었다. 그런 과도기에 단테는 『신곡』을 스스로에게 말을 걸고 스스로 대답하는 받아쓰기의 방식으로 써나갔다. 그래서 그 속의 인물들은 말을 걸고 그에 대답하는 구술성의 환경에 처해있고 행동하고 있고, 그에 맞춰 순례자도 행동한다. 그것을 문자로 정착시킨 것이 『신곡』이다. 결국 『신곡』은 구술성이 깃든 문자성의 세계이며, 그런 점에서 우리는 구텐베르크의 은하계가 지배해온 지난 500년을 뛰어넘어, 중세의 끝자락에서 펼친 그의 문학을 다시 들여다봐야 할 상황에 서있다. 

 

박상진 부산외대·이탈리아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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