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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접경공간은 어떻게 창조적인 공간으로 변모할 수 있었나
문명의 접경공간은 어떻게 창조적인 공간으로 변모할 수 있었나
  • 차용구 중앙대 교수·역사학과
  • 승인 2018.06.0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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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학교_ 1강 「서양 중세 문명의 조우와 충돌, 화해와 공존」

“왜 21세기에 중세를 알아야 하는가?” 움베르토 에코가 세상에 던진 질문이다. 이에 중세 전문가 5인이 ‘중세학교’를 통해 역사, 문학, 시각예술, 역사, 철학의 측면에서 이 질문에 답한다. ‘중세 학교’는 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한 『중세』(시공사 刊 ) 시리즈 완간을 기념해 마련된 특별 강연으로 지난달 25일에부터 오는 22일까지 5주간 매 금요일 저녁 7시 30분에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진행된다. 첫 강의를 맡은 차용구 중앙대 교수(역사학과)의 강의록을 소개한다. 다음 강의는 박상진 부산외대 교수(이탈리아어과)의 「중세의 마지막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분단, 접경, 그리고 통합

오늘날에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계선에는 옛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잔재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고대 로마인들이 만든 이 인공국경은 라인-다뉴브 강의 자연경계선과 함께 북방의 이민족과 로마제국을 가르는 단절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른바 ‘3세기의 위기’로 인해 제국의 국경선이 기능을 상실하면서, 로마인들은 게르만 부족들로 대표되는 이민족들과 본격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이질적인 문명 간의 접촉은 대규모 인구이동, 갈등과 충돌, 낯선 것에 대한 소원함 뿐 아니라 동화와 융합, 새로운 종족의 탄생 등 다양한 모습을 빚어냈고, 과거 단절과 대립의 장소였던 접경지역은 이제 ‘접경공간(Contact Zones)’이라는 새로운 장소로 변모해갔다. 

이러한 이야기를 다룰 때, 20세기의 고고학적 발굴과 역사인류학 등의 지원을 받아 정립된 후기 고대론(Late Antiquity)은 기존의 에드워드 기번 식 로마제국 쇠망론(Decline and Fall)과는 대비되는 역사해석을 제공한다. 즉 제국은 몰락한 것이 아니라 형질이 변화(Transformation)해 재편됐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보자면 게르만-로마의 접경공간 역시 새로운 유럽문명이 탄생하는 창조적 장소로 인식될 수 있다. 예컨대, 스스로를 프랑크인이자 로마의 군인(Francus ego cives, romanus miles in armis)으로 여겼던 한 게르만인의 이중적 정체성이나 프랑크인들의 왕(rex Francorum)이기에 앞서 로마의 고위관료(comes)로 불리기 원한 말로바우데스의 사례는 두 문명의 조우로 새로이 통합된 종족이 탄생했음을 시사한다. 

새로운 종족의 탄생

서로마제국 말기의 게르만 엘리트들은 스스로를 로마의 정치적 계승자로 인식했다. 이를테면 어린 시절 10여 년을 동로마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볼모 생활을 한 동고트족의 테오도리쿠스(454-526)는 훗날 동고트족의 왕이 된 후에도 보에티우스와 카시오도루스 같은 당대 최고의 로마인 지식인들을 참모로 기용했다. 영원한 제국 로마에 대한 테오도리쿠스의 예찬은 “나의 유일한 희망은 로마제국의 모방”이라고 고백한 그의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메로빙 왕조 창건자인 클로비스 1세(서기 511년 사망)도 유사한 사례이다. 클로비스 역시 말로바우데스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게르만 부족의 수장인 동시에 로마의 관료로 생각했다. 당시의 과도기적 상황을 감안하면 라인 강 연안의 접경공간에서 형성된 이러한 복합적이고 다중적인 정체성은 어쩌면 불가피한 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원주민었던 로마인들은 현상유지(status quo)를 위해 신참자인 게르만인들을 활용하려 했고, 게르만인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해 접경공간을 整合하는 실용적인 노선을 걷고자 했다. 요컨대 문명의 단층선(fault line)은 충돌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창조적 장소에 가까웠다. 

십자군, 문명의 충돌?

유럽의 중세사에서 또 다른 접경공간의 출현은 십자군 전쟁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전쟁은 단순히 이슬람 세력이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해서 일어난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다. 십자군 전쟁은 당시 서유럽사회가 경험한 사회적 격동-인구증가와 경작지 부족, 장자상속제의 정착에 따른 차남 이하 출신 방랑기사들의 급증, 한탕을 노리는 기회주의적 상인집단, 로마 교황의 정치·종교적 야망 등-이 빚어낸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즉 십자군 전쟁의 원인은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원초적 증오심 따위가 아니라 11세기 이후 팽창을 거듭하던 서유럽 세계의 정치-종교-경제 권력의 세속적인 이해타산이었던 것이다. 유럽사회 내부를 휘감은 소용돌이가 지중해 세계에서 이슬람을 몰아내겠다는 전쟁으로 확대됐고, 이는 결국 오늘날까지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의 씨앗이 돼 버렸다.

접경, 치유의 역사적 공간

십자군이라는 잘못된 전쟁은 시칠리아와 스페인 남부의 안달루시아, 근동 각지에 산재한 이슬람-기독교 접경공간에서 상대방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양산했다. 서로를 향한 증오와 갈등이 더욱 팽배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작업 역시 접경공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비록 상황 의존적이고 선택적인 관용이긴 했지만 접경공간의 구성원들은 상호이해와 공존(convivencia)을 모색하면서 이슬람-기독교의 접경공간을 차츰 치유의 역사적 공간으로 바꿔갔다.    

사실 접경공간에서 신참자들은 수적으로 뒤졌기 때문에 무리한 사회정치적 재편을 시도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그들은 다수를 차지하는 피지배자의 관습과 제도를 존속시킬 수밖에 없었고, 인종-종교적 중재자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과도기를 극복하려 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문화수용(acculturation)이 이뤄졌고 자연히 일정정도의 문화적 동질화나 수렴(convergence) 현상이 뒤따랐다.

한편 서양 중세의 또 다른 접경공간인 독일 동부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전개됐다. 이른바 슬라브 십자군 전쟁 역시 기독교 신앙의 확산보다는 영토 확보(potius pro auferanda eis terra quam pro fide christiana confirmanda)와 금전적 욕망(pro pecunia)에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일방적인 침략과 약탈은 일시적인 현상이었을 뿐이다. 본래 다양한 슬라브 종족들이 거주하던 땅으로 이주한 독일 출신의 ‘손님들’은 현지인들과 협력해 도시를 건설하고, 점차 雜居와 혼종의 독일-슬라브 접경(deutsch-slawische Kontaktzone)을 형성했다. 

이러한 독일인과 슬라브인의 결합은 메클렌부르크, 포메른, 브란덴부르크, 오버작센, 슐레지엔 등에서 ‘새로운 종족(Neust?mme)’을 등장시켰다. 슬라브화된 게르만 지역(Germania Slavica)으로 불리는 이들 독일 동부 지역은 19세기 독일 통일을 주도한 프로이센이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하는 발판을 마련한 장소이기도 하다. 비스마르크에서 제3제국으로 이어지는 독일 근현대사의 중심이 ‘슬라브-게르만 혼혈성’(Blutmischung)이 뿌리내린 접경공간으로부터 비롯된 것을 보면 역사에 영원한 중심과 주변은 없는 법이다.   

광범위한 조우와 공존이 점차 일상이 되자 안달루시아, 시칠리아, 독일 동부 지역 등의 접경공간의 거주민들은 현실과의 타협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그들이 마주한 현실이 복잡다단했기 때문에 접경공간은 모순의 장소일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이념적 증오가 판을 치는 공간인 동시에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실험하는 공간이었다. 배재와 관용, 전쟁과 상호의존, 편견과 실용주의가 혼재한 장소이자, 양자택일의 논리 대신 양자병합의 논리가 제시되는 뒤엉킨 역사(entangled history)의 공간이기도 했다. 이러한 아슬아슬하면서도 기묘한 중세적 공존은 단종론, 균질론과 통합론 등으로 규정되는 근대 민족국가(nation-state)가 대두될 때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침묵과 묵인, 또 다른 형태의 관용

분단의 극복이 바로 통일의 길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강요된 단절이 만든 이질감과 적대감을 극복하기 위해 접경공간의 구성원들은 어쩌면 분단 상황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중세 로마-게르만, 이슬람-기독교, 게르만-슬라브 접경의 사례는 관용이 그 해결책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물론 교조주의적 종교 집단은 이교도와의 공존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잡거와 혼종의 현실은 기록으로 남기 어려웠다. 따라서 중세 접경공간이 경험한 공존의 다양한 모습을 사료를 통해 복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히려 근대 역사학이 등장한 19세기 이후에는 민족주의의 열풍 속에서 민족감정의 각성에 적합한 사료들이 의도적으로 수집되면서, 역사가 과거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무기로서의 역사(Geschichte als Waffe)’로 변질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세의 종교 세력은 표면적로는 호전적인 십자군의 기치를 휘날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실리를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념과 현실의 괴리 앞에서 그들이 취한 방침은 침묵이라는 형태의 관용이었다.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묵인의 이데올로기가 조우와 충돌의 장소를 화해의 공간으로 만드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다시 말해 접경공간의 중세인들은 전략적 침묵이라는 수단을 채택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의 재정복 전쟁 이후 발렌시아 교회는 이슬람에 대한 세속 군주의 관용정책을 탐탁해 하지 않으면서도 묵인하고 침묵했다. 그 결과, 군사적 충돌이 빈번하던 국경지대에서 타 종족과의 결혼, 이중 언어의 사용, 교역과 이주가 점차 일상이 될 수 있었다. 침묵과 묵인이라는 형태의 관용이 접경공간을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장소로 바꿨던 것이다.
     
차용구 중앙대 교수·역사학과
독일 파사우대에서 중세사로 박사를 했다. 대표 논문으로 「서양 중세 후기 시대론 연구-중세 후기 위기론의 재검토」가 있고, 저서로 『중세 유럽 여성사』가, 역서로 『교황의 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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