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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합리성 핵심으로 하는 ‘과학 정신’이 암울한 미래 극복”
“비판적 합리성 핵심으로 하는 ‘과학 정신’이 암울한 미래 극복”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8.06.04 1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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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동서 문명과 근대’_ 이덕환 서강대 교수(화학과)의 「현대 과학, 그리고 사회 조직과 교육의 변화」

네이버문화재단 ‘열린연단_ 문화의 안과 밖’의 다섯 번째 강연 시리즈 ‘동서 문명과 근대’가 매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번 강연은 동서양 근대성의 한계와 가능성을 비교문화적 관점에서 검토하는 취지에서 기획됐으며 올해 50회 강연이 예정돼 있다. 이덕환 서강대 교수(화학과)의 「현대 과학, 그리고 사회 조직과 교육의 변화」 강연 중 주요대목을 발췌·요약해 소개한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이덕환 서강대 교수(화학과).
이덕환 서강대 교수(화학과).

세계에서 가장 못살던 우리가 반세기 만에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으로 발전한 것은 현대 과학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덕분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에게 현대 과학과 기술은 낯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 과학은 너무 어렵고, 기술은 너무 위험하고 더럽다고 불평한다.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가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문·이과로 구분된 교육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본래 ‘과학’은 ‘자연에서 찾아낸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을 뜻하고, ‘기술’은 ‘자연의 사물을 인간 생활에 유용하도록 가공하는 수단’으로 정의된다. 그런 과학과 기술의 구분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과학 지식을 얻기 위해서 기술이 필요하고, 과학 지식이 곧바로 경제적 가치 창출로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식 증진을 추구하는 과학자와 경제적 가치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기술자의 구분이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생명과학 지식과 생명공학 기술의 경우처럼 과학과 기술의 구분이 애매한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구분이 애매한 경계 지역이 있다는 사실이 구분의 불가능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도 마찬가지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언제나 명쾌한 것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체격이나 성적 취향이 애매한 경우도 있다. 심지어 유전학적인 구분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과학과 기술의 구분은 현실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하다. 과학 지식은 우리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지지도 않고 외면할 수도 없지만, 기술은 그렇지 않다. 과학 지식을 밝혀내려 노력을 사회적으로 규제하거나 통제하려는 노력은 대부분 실패했다. 천동설을 굳게 믿었던 중세의 절대 권력자들도 지동설의 출현을 막을 수 없었다. DNA에 담긴 유전정보가 발현되는 과정이나 개체가 발생하는 과정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을 인간의 존엄성이나 神의 존재를 앞세워 규제하고 통제하려는 노력은 의미도 없고 성공할 수도 없다.

그러나 가치 의존적인 기술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오히려 기술의 사회적 수용 가능성에 대해서는 범사회적인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고, 적절한 수준의 진흥과 규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 복제나 대량 살상 무기는 윤리적 이유만으로도 용납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 기술을 개발하려는 프랑켄슈타인적인 기술자도 있다. 그런 기술자의 용납할 수 없는 노력을 감시하고 규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안을 마련하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 우리 사회의 책임이고 의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가치관을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결국 과학과 기술의 구분은 우리 사회의 발전에 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도 기초과학에 본격적으로 투자를 해야 한다. 그러나 노벨상에 대한 국민적 아쉬움을 이용해보려는 의도가 드러나는 주장으로는 기초과학 투자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없다. 기초과학이 미래의 기술 개발에 도움이 된다는 억지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기초과학이 필요한 이유는 명백하다. 기초과학은 국민소득 3만 달러의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우리 國格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선진국이 이룩해 놓은 기초과학 덕분에 가능해진 과학기술의 경제성에만 집착하는 부끄러운 猝富의 행태를 고집할 수는 없다. 이제 우리도 인류의 미래를 위해 다른 선진국과 함께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줘야만 한다. 선진국 진입을 위해 우리가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이고 의무다.

우리가 지금까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 목표는 노벨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에게는 경제 성장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회적 목표였다. 과학기술계도 경제 성장을 위해서라면 남의 기술을 흉내 내는 일을 마다할 수 없었다. 선진국에서나 가능한 창조적 기초과학은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 우리에게 이제 와서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이 흠이 될 수는 없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본격적인 기초과학 투자를 시작해야 한다. 정치적 이유로 생긴 거품도 걷어내야 한다. 기초과학에서 ‘국제화’를 굳이 강조할 이유가 없고, ‘녹색’과 ‘창조’와 같은 화려한 정치적 구호도 건강한 기초과학의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

우리가 활용하는 기술이 불완전한 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지식이 충분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친환경적 기술’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연에서 스스로의 생존과 편익을 위해 필요한 소재를 확보해서,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변환, 가공, 활용한 후에 최종적으로 자연으로 환원시키는 모든 과정에서 적지 않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오염, 고갈, 사고에 의한 위험도 감수해야만 한다. 자연에서 진정한 친환경과 완벽한 안전은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스티븐 와인버그는 ‘우주에는 공짜가 없다’고 했다.

인류 역사에서의 기술의 불가피성

그렇다고 모든 기술을 포기하고 자연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실제로 우리는 상당한 수준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기술을 이용하고 있다. 불의 경우가 그렇다. 불은 자연에서 우리의 생존을 지켜준 가장 중요한 기술이지만, 자칫하면 대형 화재로 번져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 시대인 현재도 화재의 위험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

기술의 부작용과 위험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작용과 위험을 최소화해주는 제도와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화재가 무섭다고 불을 포기할 수는 없다. 오히려 건물을 화재 예방에 적합하도록 설계하고, 불에 잘 타지 않는 소재로 시공을 하고, 화재 감지기와 스프링클러를 비롯한 방화 시설을 갖추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다. 어쩔 수 없이 화재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피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한 대피 훈련도 필요하다.

우리의 현실은 암울하다. 지구촌 전체가 70억이 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열풍 속에서 거세지고 있는 사회적 경쟁도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지구 온난화와 미세먼지를 비롯한 환경 재앙의 가능성도 무시하기 어렵다. 특히 우리는 급속한 인구의 고령화와 인구 절벽이라는 절박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정체불명의 기술 혁명에 의한 사회적 변혁도 두렵기만 하다. 과연 우리가 암울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이념이나 사회 제도의 혁신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인구와 노동력이 줄어들거나 정체되는 상황에 대한 역사적으로 검증된 사회 제도적 해결책은 없었다.

과학과 기술에서 희망을 찾을 수밖에 없다. 과학적 지식도 중요하고, 과학적 기술도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비판적 합리성을 핵심으로 개방성, 민주성, 정직성, 보편성을 강조하는 ‘과학 정신’을 생활화해야 한다. 과학 정신은 종교, 민족, 이념에 상관없이 인류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사고방식이다. 분과 사이의 벽을 과감하게 낮추는 ‘問津’의 노력도 중요하다. 물론 성공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인류의 미래는 보장된 것이 절대 아니다. 스티븐 호킹의 ‘행성 이주설’에라도 매달려야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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