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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저작에 얽힌 사연들
공동저작에 얽힌 사연들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06.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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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이 만든 '조화의 영감'

 

공동저작물은 에피소딕한 사연을 많이 품고 있다. 특히 부부가 공동저작을 한 경우도 많은데 이들 부부는 사상적·학문적 동반자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인간은 어떻게 거인이 되었나'는 미하일 일리인과 그의 부인 엘레나 알렉산드로브나 세갈의 공동저작이다. 세갈은 일리인의 조수로 일하다 그와 결혼했는데 일리인이 실명하자 남편의 구술을 받아서 썼다. '인간의 역사'의 공동저술에는 일리인의 인간관이 반영돼 있다는 점에서 꽤나 시사적이다. 일리인에게 인간은 類的 존재다. 일리인이 '인간의 역사'의 책머리에서 묘사한 거인(인간)은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인류의 기원에 대한 사회학적 탐사 역시 부부가 힘을 모아야 가능했던 것이다.

위험사회론의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도 아내인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과 공동집필한 책이 있다. 사랑과 결혼, 그리고 가족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담은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새물결 刊)은 벡 부부가 챕터를 나눠 썼다.

그런데 공동 저작물을 펴낸 부부 중에는 첫번째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았다가 재혼한 커플이 사상적·학문적 동반자가 된 경우가 더러 있다. 이상주의자였던 스코트 니어링은 첫 결혼에 실패하고 만난, 스무 살이나 차이나는 헬렌 노드에게서 평안을 얻는다. 틈날 적마다 남편 자랑에 여념이 없는 헬렌에 비해 스코트의 아내에 대한 언급은 드문 편이었는데, '스콧 니어링 자서전'(실천문학사 刊)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내 인생에서 이번만큼은 운이 좋았는지, 나보다 스무 살이나 어리지만 자급생활에 맞설 능력과 의지를 갖춘 여성을 만났다. 헬렌 노드는 정열적이고 활달하면서도 기품 있는 여자로, 평생 채식을 해왔고, 바이올린을 공부했으며, 여러 해를 외국에서 보냈다." 헬렌과 스코트는 따로 또는 같이 책을 썼다. '조화로운 삶'(보리 刊)과 '조화로운 삶의 지속'은 부부가 함께 지은 책이다.

천문과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칼 세이건의 부부 공동저작에는 스캔들의 측면마저 없지 않다. 칼 세이건은 '혜성'(범양사출판부 刊)과 '잃어버린 조상의 그림자'(고려원미디어 刊)를 아내 앤 드루얀과 공저했는데 앤 드루얀은 그의 두번째 부인이다. 칼 세이건의 유고집 '에필로그'(사이언스북스 刊)에 실려 있는 앤 드루얀의 서문에는 칼 세이건이 그녀에게 청혼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중국 음악을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을 찾아다니던 나는, 투손의 한 호텔에 머물고 있던 칼에게 전화를 걸어 메시지를 남겼다. 당시 그는 투손에서 강연을 하고 있었다. 한 시간 후 맨해튼의 내 아파트로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를 드니 그의 목소리였다. "방금 돌아와 보니 '애니의 전화'가 녹음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혼잣말로 중얼거렸죠. 왜 그녀는 십 년 전에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을까?" 나는 도도함과 유머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가요? 나도 항상 그런 마음이 있었죠." 그런 다음 정색을 하고 물었다. "진심인가요?" "그렇소, 진심이오. 결혼합시다." "좋아요." 그 순간 우리는 새로운 자연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알 것 같은 심정이었다."

먼 나라의, 게다가 지금은 고인이 된 천문학자의 사생활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지만, 앤 드루얀이 묘사한 칼 세이건의 청혼 장면은 보통의 도덕관념을 지닌 한국 독자의 마음을 적잖이 불편케 한다. 칼 세이건이 앤 드루얀을 보고 첫눈에 반해 청혼할 때까지 10년간 줄곧 이혼남 상태였다면 모를까, 아내가 버젓이 있는데 다른 여자에게 눈독을 들였다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

더구나 칼 세이건의 전처인 린 마굴리스가 뛰어난 생물학자인 점을 감안하면, 앤 드루얀이 칼 세이건과의 뒤늦은 만남을 "새로운 자연 법칙을 발견하는 것"에 비유한 것은 무례하기조차 하다. 아무튼 린 마굴리스는 전남편과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도리언 세이건과 여러 권의 책을 썼는데 '마이크로코스모스'(범양사출판부 刊), '생명이란 무엇인가'(지호 刊), '섹스란 무엇인가'(지호 刊) 등이 그것이다.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마음과 물질의 대화'(고려원미디어 刊)는 베이트슨이 남긴 원고를 그의 딸인 메리 캐서린 베이트슨이 정리한 공저서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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