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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사제, 부부, 모자 사이에 꽃피운 학문적 동반자 관계
친구, 사제, 부부, 모자 사이에 꽃피운 학문적 동반자 관계
  • 최성일 / 출판칼럼니스트
  • 승인 2003.06.07 0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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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해서 더욱 빛난 저술들... 나중에 앙숙되기도

책은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불가능할 때가 있다. 지성사를 볼 때 이 사실은 명확해진다. 천재 마르크스도 엥겔스라는 뛰어난 조력자가 있어서 '자본'을 저술할 수 있었다. 들뢰즈 또한 정신분석학자인 가타리 덕분에 '앙티 오이디푸스'를 써낼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런 관계를 일컬어 공동저자라 부른다.

그들은 두 머리와 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종의 超人이다. 그 앞에서 세상은 독단보다는 이해, 연설보다는 대화의 뉘앙스를 형성하며 드러난다. 그러나 둘이 하나의 역할을 하는 본격적인 협력자들 말고도 우리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한권의 저술을 위해 손을 잡는다. 때로는 스승과 제자이고 부부이거나 모자지간, 친구사이에서 협력관계가 많이 이뤄진다. 그 속에는 또 울긋불긋하게 많은 사연이 들어있다. 그 내면을 들여다본다.

최성일 / 출판칼럼니스트

유전자 수준에서 이타주의는 열세하고 이기주의가 우세하며, 이러한 유전자의 이기성이 개체의 이기적 행동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개진한 이기적 유전자론의 골자다. 하지만 도킨스의 주장에 대한 비판도 만만찮다.

도킨스는 유전자 결정론자라는 비판을 듣곤 한다. 개체의 차원에서도 이기적 행동이 우세하다는 시각에 의문이 제기됐는데 최근 번역 출간된 독일의 동물행동학자 비투스 B. 드뢰셔의 '휴머니즘의 동물학'(이마고 刊)에서는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원리가 동물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와 협력이 일반적인 생존전략이라고 파악한다.

지성사를 살찌운 공동저작물
그런데 조화와 협력의 중요성은 저작 분야에서도 발견된다. 만화나 그림책의 경우, 그린이와 글쓴이가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화가와 스토리 작가의 합작은 각자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본능을 숨긴 겉으로만의 이타적 행동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조화와 협력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얻어내려는 나름의 생존전략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 싶다. 대담집 또한 대담자와 피대담자 두 사람의 공동저작으로 볼 수 있으나 형식 자체가 공동 작업의 성격을 띠었을 따름이지 일반 저술물에 포함시키기는 곤란하다.

일반적인 저술에서는 단독저작이 압도적이다. 비록 숫자상으로는 단독저작에 비해 공동저작이 훨씬 적으나, 공동저작의 성과물은 세계 지성사에서 뚜렷한 자취를 남겨 왔다. 공동저작은 대부분 2인 공동저작이고, 저작자 두 사람의 관계는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 아주 절친한 친구이거나 부부, 아니면 사제지간이거나 부모와 자식 사이다.

챕터를 나눠 쓴 것도 공동저작으로 볼 수 있으나, 어느 대목을 누가 썼는지 제대로 분간이 안 되는 책이라야 진정한 공동저작물로 여겨진다. 그러니까 공동저작물에는 공저자 사이에 주연과 조연의 구분이 없는 셈이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조연을 자임했다. '자본론' 제3판의 서문에서 엥겔스는 이렇게 말했다.

"40년간에 걸쳐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우정으로 연결돼 있던 나의 가장 훌륭한 벗, 말로써는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가 은혜를 입은 벗 마르크스를 잃어버린 나에게 이제는 이 제1권 제3판과 또 마르크스가 원고의 형태로 남긴 제2권의 발간을 준비할 의무가 부과되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남긴 원고를 토대로 '자본론'의 제2권과 제3권을 편집했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프란츠 카프카와 막스 브로트의 사이처럼 훌륭한 저자와 뛰어난 편집자의 관계로 볼 수도 있으나, 둘은 그 이상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류 지성사에서 아직까진 전무후무한 성공적인 공동저작자다.

두 사람은 따로이 저술활동을 활발히 펼쳐 탁월한 업적을 남겼지만, 두 사람의 공동저작물은 단독저작 못지않은 지대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공산당 선언'과 '독일이데올로기'의 저자란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름이 함께 들어 있거니와 마르크스의 '자본론' 집필에도 엥겔스는 물심양면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엥겔스의 영향력은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자본론에 관한 서한집'(중원문화 刊)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의 흠집내기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우정은 서양판 관포지교로 전혀 손색이 없다. "고대인들의 전설은 감동적인 우정에 대한 이야기들을 숱하게 전해주고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인간의 우정에 대한 고대인들의 가장 감동적인 전설조차도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게 했다"라는 레닌의 평가는 타당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비견되는 현대 사상가 '커플'로는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있다. 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인 들뢰즈는 그의 절친한 친구인 정신분석학자 가타리와 여러 차례 공동작업을 했다. 두 사람이 수행한 공동작업의 대표적 성과물들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제외하고 모두 한글판을 얻었다. 두 사람의 대표작인 '앙띠 오이디푸스'(민음사 刊)를 위시해 '천개의 고원'(새물결 刊)과 '카프카-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동문선 刊)가 우리말로 번역됐다.

변형생성문법을 창안해 현대 언어학의 태두로 통하는 노엄 촘스키는 '영어의 음성체계'(한신문화사 刊)를 모리스 할과 함께 짓기도 했으나, 언어학 관련저서는 단독저작이 대부분이다. 이에 비하면 사회비평서는 공동저작인 경우가 많다. 재정학 교수 에드워드 허만은 사회비평서 저술에서 촘스키의 단짝이다. 촘스키가 허만과 함께 저술한 사회비평서 가운데 '미국의 제3세계 침략정책'이 번역돼 있다. 이 책 외에도 촘스키의 이름이 대표저자로 등재된 사회비평서가 여러 권 번역됐지만 그것들은 촘스키의 유명세에 기댄 편저서들이다.

'바흐찐이 말하는 새로운 프로이트'(예문 刊)와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한겨레 刊)의 한글판에 미하일 바흐친과 V.N. 볼로쉬노프가 공저자로 표시된 사연이 이채롭다.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의 옮긴이 후기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이 책은 원래 볼로쉬노프의 이름으로 나온 것이지만, 토도로프의 의견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여 바흐친/볼로쉬노프 양인의 이름으로 게재한다."

이는 원래 바흐친이 쓴 책이지만 그가 익명으로 활동하길 원해 러시아에서 친구의 이름으로 발표했는데, 이 책을 번역한 토도로프 등은 바흐친의 다른 저작과 볼로쉬노프의 저작을 비교해본 결과 사고방식, 기술법, 언어 등이 거의 일치하고 있어서 공동저자로 표시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볼로쉬노프는 이들 책 외에 언어학이나 문학과 관련해 활동한 내용이 거의 없기 때문에 공동저자로 보는 게 합당할 지는 아직 의문이다.

'세계화 덫'(영림카디널 刊)으로 진작에 세계화의 허상을 파헤친 하랄드 슈만과 한스 피터 마르틴은 동료 기자 사이이고, '제국'(새물결)을 쓴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사제지간이다. 사실 '제국'은 안토니오 네그리가 주필을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네그리 전공자인 윤수종 전남대 교수(사회학)에 따르면 이 책의 기본 아이디어와 집필은 하트에게서 나온 것이라 한다.

반세기 전 DNA이중구조를 공동으로 발견해 함께 노벨상까지 받은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생명과학의 태두로서 바늘에 실 가듯 함께 언급되지만, 지난 50년간 두 사람은 학문적 동지가 아니라 앙숙이었다고 한다.
왓슨과 크릭처럼 나중에는 철천지 원수같은 사이가 될 지라도 공동연구나 공동저작을 통해 우리나라 학자들도 뛰어난 업적을 내는 걸 보고 싶다. 이따금 제자의 논문을 표절했다가 들통나 망신살이 뻗친 교수가 눈살을 찌푸리기는 해도, 개성이 강한 탓인지 국내 학자들의 탁월한 공동저작물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제자가 이어간 스승의 학문
그나마 김윤식·김현의 '한국문학사'(민음사 刊)와 조순·정운찬의 '경제학원론'이 국내 공동저작물의 체면을 세워준다. 전자는 같은 대학 동료 문학 교수들이고, 후자는 사제지간이다. 김현과 김윤식은 기본적으로 챕터를 번갈아 썼지만, 책 전체에 대한 충분한 토론을 거쳤다는 점에서 공저서로 볼 수 있다. 사제지간은 어떤 의미에서는 공저라기보다는 스승의 저술을 나중에 제자가 보완하는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조순·정운찬도 그렇고, 한스 모겐소의 '국가간의 정치'의 경우도 제5판까지는 모겐소가 개정판을 냈지만, 그가 죽은 후 나온 제6판에서는 제자인 탐슨이 약간의 수정을 가해 펴냄으로써 공저자로 공식 등록된 바 있다. 이에 비한다면 김원룡·안휘준 공저의 '한국미술사'(서울대출판부 刊)는 특별한 데가 있다. 원래 이 책은 1968년 김원룡 전 서울대 교수가 개론서로 집필했지만, 나중에 안휘준 교수가 참가해 본격적으로 공동작업이 이뤄졌다. 김 교수는 고고학 전공이기 때문에 회화사에 약해, 회화사에서 권위자인 안 교수의 도움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최종 개정판 작업 때는 김 교수가 병석에 누워있을 때라 안 교수가 전적으로 맡아서 개정판을 냈다.

윤용이·유홍준이 공저한 '알기 쉬운 한국도자사'(학고재 刊)는 친구이자 동료로 꾸준히 공동작업도 하고 책도 펴내는 경우다. 원래 두 사람은 대학원에서 만나 대학 부임할 때는 한 사람은 영남대로, 한사람은 원광대로 갔지만 '서로를 잊지 못해' 명지대에서 최근 다시 만나 동료교수로 재직중이다. 역시 서로 전공은 다르지만 미술품을 보는 시각이나 견해는 일치하는 부분이 많기에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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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2003-06-27 18:09:00
이정임, 윤정임 옮김, 현대미학사, 현대사상선3, 1995.

홍재범 2003-06-08 15:31:09
김윤식교수는 국문과, 김현교수는 불문과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