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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급진개혁가들의 숙명... '외세' 없이 한반도 개혁은 불가능한가
한반도 급진개혁가들의 숙명... '외세' 없이 한반도 개혁은 불가능한가
  • 양도웅
  • 승인 2018.05.28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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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서평모임이 주목한 책_『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이번 모임의 책,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김종학 지음, 일조각, 2017.06).
이번 모임의 책,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
(김종학 지음, 일조각, 2017.06).

2015년 3월 11일부터 시작된 아산정책연구원(원장 함재봉) 주관 ‘아산서평모임’(이하 모임)이 지난 23일 스무 번째 모임을 가졌다. 이번 모임에서 다뤄진 책은 김종학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작년에 출간한 『개화당의 기원과 비밀외교』였다. 이 책은, 김 위원이 자신의 2015년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보완한 것으로, 그의 20년 연구가 응집된 결과물이다. 

모임의 사회를 맡은 정수복 작가 또한 “경성으로 유학 온 일본 지식인들의 연구들을 김종학 위원이 번역해 왔는데, 그 결과물들을 이번 책을 쓰는 데 적극 활용했다”며 “1996년에 입학해 2015년에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참 많은 공부로 만들어진 책”이라고 평했다. 김종학 위원은 지난달에 이 책으로 제43회 월봉저작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모임은 김 위원의 발제, 정용화 코리안드림네트워크 이사장과 최연식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과)의 토론으로 진행됐다. 발제자의 도발적인 주장 때문이었을까. 모임은 예정된 시간을 훌쩍 지나 끝이 났다. 

김옥균이라는 ‘앙팡 테리블’

“학계의 ‘김옥균’이 되려고 하느냐.” 김종학 위원은 발제를 시작하며, 연구주제를 선정했을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들었던 말을 소개했다. 조선 후기의 천재, 풍운아, 혁명가 등으로 불리는 김옥균은 ‘삼일천하’에 불과했던 갑신정변(1884)이 실패한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생활은 형벌이나 다름없었는데, 김옥균의 예상과 달리 일본의 대접은 박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도일한 지 약 10년 후, 김옥균은 일본에서 벗어나 상하이로 떠났지만 그곳에서 민씨 일가가 보낸 자객에 의해 44년의 짧은 인생을 마무리했다. 

김옥균이 세상을 떠난 1894년은 일본과 김홍집 내각에 의해 조선의 개혁이 시작된 해이기도 했다. 김 위원은 “아마도 그 말의 뜻은 김옥균과 개화당의 주장 자체가 과격하고, 보기에 따라서는 허무맹랑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갑신정변 이후 김옥균이 가졌던 비참함을 떠올려 보면, 마냥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김옥균은 고종의 어보와 교지를 위조해서라도 일본의 힘을 이용해,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시도하려 했을 정도였다.  

바로 이 ‘앙팡 테리블’ 김옥균과 박영효 등이 중심인 개화당의 기원과 본질을 파헤치는 것이 김종학 위원의 주요 연구 목적이었다. 김 위원은 “그간 학계에서 잘 인용되지 않았던 국내외 미간 외교문서에 기초해 ‘개화당’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비밀결사의 은밀한 행적을 규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 사상적 기원과 역사적 의미를 새로 해석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23일 아산서평모임이 스무 번째 모임을 가졌다. 모임의 사회를 맡은 정수복 작가(사회학자)는 "100년 전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인 환경이 요즘과 비슷하다. 그런 의미에서 외교사연구가 현재, 미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아산정책연구원
지난 23일 아산서평모임이 스무 번째 모임을 가졌다. 모임의 사회를 맡은 정수복 작가(맞은편, 왼쪽에서 세번째)는 "100년 전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인 환경이 요즘과 비슷하다. 그런 의미에서 외교사연구가 현재, 미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아산정책연구원

‘외세를 통한 개혁’과 ‘평등사상’의 개화당

이 연구과정에서 김 위원은 학계의 통설과 정면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 통설은 바로 임오군란 이후에 조선의 자주독립을 급진적으로 추진한 급진개화파가 생겨났고, 그것이 개화당이라는 학설이다. 김 위원은 “임오군란(1882)을 계기로 청으로부터의 정치적 압력이 심해지자 조선의 자주독립에 대한 문제의식, 개혁의 범위와 속도에 관한 견해차로 개화파는 온건과 급진의 두 파로 분열됐고 개화당은 이 중에서 후자를 가리킨다는 것이 기존의 통설이었다”며 “하지만 개화당은 처음부터 외세를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정권을 장악해 조선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비밀혁명결사 또는 역모집단이었다”고 반박했다. “따라서 그 개화당의 사상적 기원 또한 박규수를 매개로 한 조선후기 실학이 아니라 醫譯中人의 철저한 사회비판의식과 급진적 변혁사상에서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임오군란 이전부터 이미 ‘외세’를 활용해, 위로부터의 개혁을 단행하려던 일군의 무리가 존재했다는 김종학 위원은, 중인 계급의 역관 오경석과 승려 이동인의 행적을 근거로 들었다. “개화당은 이미 1871년에 결성돼 1874년과 1875년에 오경석이 영국공사관에 군함 파견을 청원했고, 1879년에는 승려 이동인이 일본에 밀파돼 책동을 벌였다”며 “따라서 임오군란은 개화파가 양분된 계기가 아니라, 그때까지 비밀리에 음모를 꾸미던 비밀결사 개화당이 고종의 신임을 얻어 비로소 중앙정계에 있던 기존 정치세력과 권력 다툼, 특히 외교권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기 시작한 계기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학계의 또 다른 통설 중 하나는 개화당의 목적이 조선의 독립과 부국강병이라는 설이다. 하지만 김 위원은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박영효가 1931년 이광수와의 인터뷰에서 “『연암집』에 귀족을 공격하는 글에서 평등사상을 얻었지요”라고 말하며 새로운 사상의 핵심을 평등사상이라고 정의했다는 점과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의 증언을 근거로, 개화당의 목적이 신분제 철폐를 통한 평등사상에 있다고 반박했다.

‘외세’ 없이 정권 장악이 가능한가

발제 이후 진행된 지정토론 및 토론에서는, 김종학 위원의 개화당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곧 쟁점이 됐다. 첫 번째 지정토론자로 나선 정용화 코리안드림네트워크 이사장은 우선 ‘외교와 내정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외교는 내정의 연장이며, 내정의 핵심은 권력경쟁이다. 집권자는 권력의 획득과 유지가 일차적 관심이다. 권력을 상실하면 자신의 안전은 물론 자신의 이상을 더 이상 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교는 내정의 중요한 수단이다. 역으로 외교는 내정을 제약하는 환경이다. 약소국일수록 그 환경에 따른 부담이 크다. 정치는 국내 정치세력과 국제 정치세력 사이에서 춤을 잘 추지 않으면 언제든지 추락할 수 있다.” 

안에서의 권력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바깥 세력을 활용(하려)한 사례는 조선 후기와 근대화 과정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정용화 이사장도 “외세를 끌어들여 정권 장악을 기도하는 것은 고대부터 근대화 과정에서까지 아주 흔한 일이다. 이승만과 김일성은 외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정권을 세웠는가”라고 지적하며, “조선이 중국에 의존한 정권이었다면 혁명을 꿈꾸는 세력이 일본을 끌어들이려 한 것을 무리하다고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덧붙였다.  

(사진 캡션_김종학) 김종학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여태까지 다뤄지지 않은 외교문서들로 개화당이 실제로 했던 행동들을 재구성해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은 학계의 기존 통설과 정면으로 대립된다. 사진 제공=아산정책연구원
김종학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여태까지 다뤄지지 않은 외교문서들로 개화당이 실제로 했던 행동들을 재구성해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은 학계의 기존 통설과 정면으로 대립된다. 사진 제공=아산정책연구원

두 번째 지정토론자로 나선 최연식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과) 또한 “분명 자국의 개혁을 외세에 의존해 추진하려는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적 관점에서도 그러하다”며 “하지만 개혁을 추진할 어떤 자원도 확보하지 못한 당시 조선의 현실에서 외세의 활용은 유일한 대안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고 의문을 던졌다. 소위 말하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자 내부로부터 발생한 혁명인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해도 갑신정변으로부터 10년이 지난 1894년이었다. 

보다 새로운 해석은 새로운 언술체계로 가능

외세의 문제와 함께 최연식 교수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당 인물들의 정체성에 주목했다. “개화당 인물들의 신분과 처지는 달랐다. 하지만 공통점은 주변부적 존재들이었다는 점이다. 오경석과 유대치는 의역중인인 신분상의 주변부적 존재였다. 맏아들이었지만 세도가의 양자로 보내진 김옥균과 왕실의 부마였지만 정치활동이 제한됐던 박영효는 정치적으로 주변부적 존재였다. 또한 이들은 당시 주류 담론이 아니었던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종합하면 개화당의 원조와 활동가들은 모두 신분적·정치적·사상적으로 조선 사회의 주변부적 존재의 한계를 통절히 느끼고 있던 인물들이었던 셈이다.” 

이런 정체성으로 인해 그들이 ‘평등사상’을 하나의 목적으로 삼았다고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지정토론이 끝난 후 김기봉 경기대 교수(사학과)는 “개화당이 주장하는 평등사상의 내용이 무엇인가, 그것은 신분제 타파이다. 그런데 과연 신분제 타파가 평등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며 “오히려 오경석의 이상은 능력에 따라 계급을 나누자는 것이며, 이것은 신분제 사회에서 능력중심의 사회로의 이행을 꿈꾼 것이지만, 여전히 어느 정도의 신분제적 요소가 있는 것이다”고 지적했다. 

한편 이영훈 서울대 명예교수는 ‘외세’와 ‘내세’라는 구분의 언술체계 자체를 지적했다. “정치외교사나 국사학계의 통념에서 나오는 언술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 체계가 외세 체계를 내면화해 구조화한 체계이다. 즉 외세와 내세를 구분해 말하기 힘들다.” 참석자들로부터 ‘도전적인 역작’이라는 공통된 반응을 이끌어냈지만, 기존의 통념과 통설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지점을 건드릴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영훈 명예교수는 “조선왕조 나름의 공간성에 대한 이해와 함께 새로운 언술체계로 김옥균과 오경석의 활동이 외세를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는 해석을 새롭게 말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양도웅 기자 doh0328@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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