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12:15 (토)
이분법 넘어서는 和而不同 요청
이분법 넘어서는 和而不同 요청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3.04.16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진보-보수 논의의 현장

진보와 보수는 현재 애매한 상태다. 지난 두달 간 일간지 지면을 이 익숙한 이분법적 논의가 파도처럼 휩쓸고 갔지만 그 흔한 논쟁 한토막 나오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양쪽 대표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와 승부를 펼쳤을 법도 한데, 서로 등을 돌린 채 브리핑하듯 입장정리를 하는 칼럼들만 쏟아졌을 뿐이다.

그만큼 요즘의 이념적인 지형도가 복잡하다는 것일 테다. 민주화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한국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는 정권에 대한 태도만 결정하면 됐다. 하지만 지금은 권위주의 정부도 사라지고, 사회주의권도 몰락하고, 민족주의는 시들하다. 그리고 그 자리를 젠더와 환경, 세계화 같은 이슈들이 채우고 있다. 요즘은 세계화에 찬성하면 우파고 저항하면 좌파라는 식의 도식이 적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상황은 갈수록 복잡해진다. 진보 진영에서는 노동과 환경으로 파가 갈리고, 여성과 문화는 만나면 다툰다. 보수진영도 반공주의나 수구주의 같은 냉전적 가치를 신봉하는 구보수의 힘이 약화되고 자유주의와 경제제일주의를 금과옥조로 여기고, 민주주의의 가치에도 열린 합리적 신보수 세력의 존재가 제기되면서 복합성을 띠고 있다.

하지만 암중모색이 길게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한국정치연구회라는 진보학술단체가 얼마 전 진보의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하는 연속토론회를 시작했는가 하면, 여러 매체들이 이념적 정체성을 성찰하는 특집들을 마련해서 지식인들을 다시 이념의 자유시장으로 초대하고 있다.

이렇게 간헐적이나마 이어지는 모색들에서 짚을 수 있는 큰 특징은 진보와 보수가 ‘제로 섬’ 관계가 아닌 ‘포지티브 섬’ 관계로 파악되고 있다는 점이다. ‘적’이 아니라 ‘반대편’이라는 인식. 여기엔 최근 들어 진보와 보수의 공통가치인 자유민주주의 체제 정착이 사회의 화두로 제시된 영향이 크다. 지난해 10월에 나온 ‘진보와 보수’(이학사 刊)라는 책을 보면 이런 문제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여기서 홍윤기 동국대 교수(철학과)는 민주주의의 정치적·사회적 공고화와 문화적 성숙이라는 조건을 언급하면서 두 진영이 상호 인정을 통해 담론 실천 공간 확보할 필요성을 주장했다. 얼마 전 ‘황해문화’ 봄호에 마련된 ‘보수주의’ 특집도 진보의 대화 파트너로서, 더 근본적으로는 민주사회의 이념적 필요요소로서의 ‘정상적 보수’의 가능성을 물어본 시도였다.

최근 ‘에머지’ 4월호에 실린 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의 글 ‘노무현정부 출범 이후의 左右갈등 감상법’에서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갖고 있는 성격분석이 실려 눈길을 끌었다. 박 교수는 “민주화 이후에도 좌우파는 소극적이고 부정적 함의를 갖는 담론만 나눴다. 적극성이라곤 없다. 우리에겐 ‘과거형 민족주의’에 대한 질문을 넘어 세계와 미래를 바라보는 ‘미래형 민족주의’에 관한 논쟁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런가 하면 “좌와 우가 다른 것을 지향하면서 조화를 이루는 화이부동의 관계라면, 좌우 대립관계는 합의를 전제로 한 합리적 다원주의보다는 불일치를 전제하는 경합적 다원주의에서 파악돼야 한다”는 견해도 제출했다.

진보와 보수를 보는 학계의 시각은 양 진영이 모두 타협적인 흐름을 타고 있다. 최근 경향신문에서 “양비론이 우리시대의 논리가 될 수 있다”고 쓴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의 주장도 그런 맥락이다. 이제 누가 먼저 대화를 시도하느냐가 문제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