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20:55 (금)
학문과 표절의 경계가 모호해진 시대, 지식식민주의를 청산하자
학문과 표절의 경계가 모호해진 시대, 지식식민주의를 청산하자
  • 김상현 성균관대·러시아어문학과
  • 승인 2018.05.21 09: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식의 재탄생』(Reinventing Knowledge : From Alexandria to the Internet, 2009)의  저자 이언 맥닐리(Ian F. McNeely)는 서구 지식 축적의 역사를 살피면서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5단계의 공간 중심을 언급한다. 도서관에서 시작된 서구의 지식 축적과 공유의 아이디어는 이후 중세의 수도원, 근대의 대학,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시기에는 서신과 19세기 후반 들어 형성되었던 전문학교를 예로 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20-21세기에는 대학 부설 연구소 혹은 각종 연구기관이 주된 성장동력을 이루면서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한다. 

저자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정부출연연구소와 관련 기업 연구소들이다. 이 두 기관은 한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지식의 운용자이자 창조자이며, 무엇보다 지식공유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원천이 아닐 수 없다. 양적 성장을 넘어 이제 연구소는 질적인 도약을 시작한지 오래 되었고, 인문학과 자연과학 간의 공생관계를 강조하는 새로운 혁명적 패러다임을 주창하고 나섰다. 이 혁신적 사고방식의 요체는 근대 이후,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던 두 학문진영의 창조적 결합과 공동 연구에 기반 한 새로운 지식구조의 창조에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새로운 지식구조의 창조’는 어떻게 이룰 수 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야 가능한 일일까? 

필자는 그간 대학가에서 “학문하는 자세와 영어로 논문쓰기”란 주제로 수십 차례의 특강을 열어왔다. 이 자리에서 힘주어 강조하는 메시지가 바로 본인이 창조해 낸 핵심어, ‘자생학문에 기반하여 지식식민주의에서 벗어나자’이다. 특강에서 나는 늘 자신의 서류가방이 도난당하는 것도 모른 채, 자신의 문서를 읽고 있는 외국인 신사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일간지 전면광고(「매일경제」, 2007년 7월 경)를 이용한다. 이 광고가 내게는 Edward Said가 비판하는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를 환기하기 때문이다.

지식식민주의! 우리 같은 지식인 노동자들이 극복해야 할 벽이다. 이 벽은 내게 단순히 넘어야 할 장애물을 뜻하는 메타포만은 아니다. 대신 이 벽은 그 너머에 펼쳐질 새롭고 창조적인 생각 덩어리를 내가 보여줘야 한다는 사명감과 의무감을 환기해준다. 그러므로 나에게 이 벽은 현실 속에서 치열한 글쓰기가 벌어지는 영토이기도 하다. 나의 연구가 단순한 정보 나열식 논문쓰기가 아닌 플롯이 담긴 예술작품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먼저 우리에게는 자생학문을 키우고, 이를 돌볼 아량과 격려의 자세가 절실하다. 물 건너온 것에 대한 선망과 맹목적인 추종은 역겹다. 이에 기죽는 것은 더욱 굴욕적이다. ‘-ism’과 ‘-logy’의 현학에 남몰래 숨겨둔 콤플렉스를 털어버리고, 우리의 목소리를 면도날처럼 꺼내 보이자. 

아울러 타인의 학문, 주변의 것들에도 동질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편식에 가까운 지식의 저열함을 경계해야 하겠기에, 균형 잡힌 지혜와 세계관을 세워야 하겠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주체적인 목소리를 담아야 하겠기에 우리의 기형적인 서양문헌 추종 경향을 경계하자. 이에 본인은 표절을 ‘academic masturbation’으로 정의하며, 이것부터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colonialism이라고 하는, 일명 ‘식민주의’는 “해외의 영토에 대한 통제를 기초로 하여 이를 식민지로 만들어버리는 행위에 대한 이론과 실태”(Andrew Heywood, Politics, 122)로 정의된다. 하지만 '지식식민주의‘란 말은 필자가 만들어낸 용어다. 본인이 특강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낸 어휘다. 나는 이 개념을 이렇게 풀이한다. 지식식민주의란, “우리의 사고를 서양인의 학적 체계와 프리즘으로 굴곡시켜 보는, 그리고 이런 자존심도 없는 학적 무뇌 행위를 부끄럽게 생각하기보다는 외국대학 학위의 허영을 만방에 드러내며 타인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지적 종속 상태”라고 말이다.

이 같이 수치스럽고 은밀하게 이뤄지는 표절 사태가 특히 학문의 공간, 지식 논쟁의 격전지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지금, 여기의 인문학』 (후마니타스, 2010)의 저자 신승훈의 말은 필자의 견해와 매우 흡사할 뿐만 아니라, 비교의 관점에서 유용하리라. “학문제국주의란 해석해야 할 자신의 자리에 우리가 아닌 그들의 문제와 존재를 전치시키는 행위다. 그들의 문제와 그들의 해답이 우리 존재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다”(104쪽). 

나의 특강 ‘학문하는 자세와 영어로 논문쓰기’는 학생들의 동참과 이해가 필요하다. 세계의 담론과 경쟁하며 우리의 독특한 시각을 보여줄 수 있을 때가 오기를 소망한다. 지식식민주의를 청산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자가 영어로 논문쓰기 특강을 하냐고 의아해 할 것이다. 지금과 같이 국제어강의를 의무시수로 규정하거나  A&HCI 논문을 임용과 승진, 연구업적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현실에서 말이다. 오히려 역설은 꼭 영어로 글을 쓸 필요가 있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는 자들이 학술적 글쓰기 훈련을 받아 우리의 생각을 영어로 표현하여 해외로 알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자는 주장이다.

영어권의 영어구사자들보다 우리가 더 훌륭하게 영어논문을 작성할 수 있다. 그 길이, 한국어가 세계 공용어가 된다거나 우리의 글을 외국 학자들이 이해하고 우리의 한글논문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시대를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리라. 그러기 위한 첫 실천은 굴욕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외국담론을 수용하던 구습을 버릴 각오이다. 양심적이고 주체적으로 우리의 목소리가 바탕이 되는 학문을 하는 자세는 표절을 하지 않겠다는 결단에서부터 형성된다. 그 다음, 우리의 생각과 창조적인 세계를 당당하게 표현해야 할 것이다. 지식식민주의에서 벗어날 세대, 바로 나를 포함한 후학세대 당신들이다. 뒤로 미루지 말자! 바로 우리 모두이다.
 

김상현 성균관대·러시아어문학과
미 캔자스대에서 러시아 문학박사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는 『레닌묘: 상징의 건축, 기억의 정치』, 『러시아 문화의 풍경들: 러시아성과 문화텍스트』가 있다. 현재 한국노어노문학회 편집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