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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생존구조 속 ‘침묵의 권력’이 성 담론 입 막는다 
적자생존구조 속 ‘침묵의 권력’이 성 담론 입 막는다 
  • 문광호 기자
  • 승인 2018.05.21 09: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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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운동'과 함께하는 학문공동체의 역할 토론회 개최

지난 3월 학술공동체에서 폭로된 성폭력은 학계에 적지 않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이슈가 됐던 것은 가해자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활동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이에 학문공동체의 이상이 현실과 괴리된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가해자가 속해있던 <문화/과학>의 편집위원회는 지난 12일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학문공동체의 역할 토론회를 열었다. 이번 토론회는 학문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을 반성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됐다.

학문공동체 성폭력, 자기성찰의 부재 때문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A 편집위원은 문화연구학과의 강사이면서 자유인문캠프 등 학술단체에서 활동해왔다. 토론에서는 가해자가 자신의 활동에 대한 확신으로 가해 행위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정당화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번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안태진 자유인문캠프 기획단원은 “A 편집위원은 기획단 내에서 가장 연장자였고 활동경력도 많아 대표가 아님에도 실질적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며 “대안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자기확신, 구성원과의 친밀도, 가해자에 대한 구성원들의 기대가 그를 가해자로 규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한국예술학과)는 “자율성을 표방하는 소규모 연구 집단들은 의외로 폐쇄적이고 연구 그룹을 이끌고 있는 한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며 “소규모 학문공동체일수록 자기성찰 기회도 많지 않고, 외부에서도 자율적 운영을 존중한다는 명분으로 관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토론에 참가한 한 자유인문캠프 기획단원 역시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많은 교수들이 자신이 권력을 갖고 있다는 것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알았다”며 “권력관계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교수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열린 토론회에서 안태진 자유인문캠프 기회단원(오른쪽 첫번째)이 사건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가해자 비호하는 이유, ‘학문적 순혈주의’

가해자와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성폭력 피해자에게 탓을 돌리기도 한다. 현재 A는 성폭력 피해자를 고소한 상태다. <문화/과학> 편집위원인 권명아 동아대 교수(국문과)는 이러한 가해자의 행동이 “이 사건에 대한 담론 형성 자체를 검열하고 통제하는 수단”이라며 “검열과 통제는 가해자를 직접 편들지는 않지만,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데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가해자를 비호하는 집단의 자기 합리화 논리가 되고 있다”고 역설했다.

집단적 비호가 발생하는 이유로 권 교수는 학문공동체의 ‘적자 재생산 구조’를 지적했다. 권 교수는 “학술 논문을 검색해보면 키워드가 100%에 가깝게 일치하는 복수의 연구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며 “이른 바 순혈도가 높은 학술공동체의 주체들은 이를 지배구조가 아닌 학문적 문제라고 주장한다”고 비판했다.

사제 혹은 동료 간의 긴밀한 관계도 원만한 문제해결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최영화 <문화/과학> 편집위원은 “가해자도 문화연구학과 학생이고 피해자도 문화연구학과 학생이니 학과 차원의 대응을 부탁했지만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며 “이번 토론회도 사회학과, 문화연구학과 교수들에게 참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조선령 부산대 교수(예술문화영상학과)도 “대학과 문화예술 단체에 뿌리 깊은 재생산 권력구조가 있다는 것에 공감한다”며 “비가시적인 순혈주의를 담론적 차원으로 확장시켜야한다”고 말했다.

해결 위해 제3자와 연대해야

학문공동체 내부에서 성폭력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안 기획단원은 “여성기획단들은 공론화 과정에서 비피해자들 간의 의도치 않은 연대가 생기는 것 방지하기 위해 가해자의 성폭력 사례와 권위주의적 행태에 대한 「어떤 이야기들」 이라는 사례집을 만들었다”며 “사례집을 기획단 한 명씩 따로 만나 보여줬고 이를 본 기획단들은 피해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고 가해자를 견제하지 않은 것에 반성하고 사과했다”고 이번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 

이는 성폭력 대응을 위한 연대의 사례로 여성가족부에서도 권장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 지난해 1월 발간한 「직장 내 성희롱 예방과 대처를 위한 주체별 대응 매뉴얼」에 따르면 “뜻이 맞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동조해 성희롱예방을 위해 독려한다. 개인적 노력도 중요하지만 뜻이 통하는 사람들이 힘을 모으면 엄청난 영향력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라고 동료 근로자들의 연대가 중요함을 언급하고 있다.

이규 뉴욕시립대 교수(현대철학과 문학)는 “젠더 이슈가 정치적 관계에 봉착하면 구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에 대한 것을 무시하거나 의식하지 않는다”며 “문화적으로 서로 다른 구조를 연결할 고리가 생겨야 한다. 학교 안에서 여러 목소리들을 다 수렴할 수 있는 위원회 같은 중재자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성폭력 사건에 집중하다보면 피해자의 학문적, 사회적 활동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신경 쓰기 힘든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신정욱 대학원생노조 사무국장은 “문제 해결도 중요하지만 피해자가 학습 연구 노동권을 침해당하지 않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학문공동체가 와해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노승미 비상대책위원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건강한 학문공동체의 지속을 위해 지켜야하는 것이 무엇인지 학계의 깊은 고민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글·사진 문광호 기자 moonlit@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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