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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하고 은은한 향내 배어있는 500년 전 無名陶工의 찻사발
묵묵하고 은은한 향내 배어있는 500년 전 無名陶工의 찻사발
  •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평론가
  • 승인 2018.05.14 1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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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73. 분청사기철화당초문다완(粉靑沙器鐵畵唐草文茶碗)

白磁와 더불어 조선시대 도자기의 양대 산맥으로 간주되는 ‘粉靑沙器’는 일제강점기에 조선미술사를 연구한 우현 고유섭 선생이 처음으로 붙인 이름이다. 이러한 분청사기의 매력은 단아하고 정갈한 조선백자나 푸른빛의 화려한 고려청자와는 거리가 멀고 질박함과 자유분방함을 특징으로 서민적인 풍취가 가득함에 있다.

특히 정형화된 꾸밈이 적은 분청사기에 그려진 추상적인 문양의 세계는 엄격한 신분제도아래서 陶工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최소한으로 허용된 표현의 자유를 이용해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인간의 본성을 최대한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여러 지역의 분청사기 도공들은 그들의 생활환경에 맞게 개발하고 그들의 정서에 맞는 그릇을 성형하고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고 여기서 그들만의 공통점과 서로 다른 특징이 지역에 따라서 확연히 구분되게 됐다.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와는 달리 정치, 사회적 변화에 따라서 自生的으로 탄생한 우리 고유의 ‘粉靑沙器’는 조선왕조 초기(15세기~16세기)에 약 200여년에 걸쳐 제작됐으며 생산된 곳에 따라서 地域의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도자기의 제작기법과 문양을 보면 생산지를 추정할 수 있고 생산지역의 名文이 있는 경우에는 더욱 명확하다. 

다양한 제작기법의 분청사기는 靑磁胎土에 물에 갠 하얀 白土의 粉을 바르고 청자유약을 입히는 기법으로 청자를 母胎로 하고 있으며 粉을 바르는 방법으로 귀얄분청(사진1)과 덤벙분청(반덤벙, 덤벙기법)(사진2)으로 나눌 수 있고 문양을 새기는 방법으로는 象嵌粉靑(사진3), 印花粉靑(사진4), 薄地粉靑(사진5), 鐵畵粉靑(사진6), 線彫文粉靑(사진7) 등으로 구분된다. 

사진1_분청사기귀얄문다완
사진1_분청사기귀얄문다완
사진2_분청사기덤벙다완
사진2_분청사기덤벙다완
사진3_분청사기상감모란문호(호림박물관)
사진3_분청사기상감모란문호(호림박물관)
사진4_분청사기인화문병(일본 소재)
사진4_분청사기인화문병(일본 소재)
사진5_분청사기박지어문장군(호림박물관)
사진5_분청사기박지어문장군(호림박물관)
사진6_분청사기철화어문장군
사진6_분청사기철화어문장군
사진7_분청사기조화문편병(일본 소재)
사진7_분청사기조화문편병(일본 소재)

상감분청과 인화분청은 전국적으로 제작되었으나 인화분청은 경상도지역에 집중되어있고 반덤벙분청은 전라북도, 덤벙분청은 전라남도의 고흥 운대리, 보성 도촌리 등 해안가를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철화분청은 덤벙분청 생산지역에서도 간혹 발견되지만 충청남도 계룡산일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제작됐으며 박지분청과 선조문분청은 전라남북도에서 집중적으로 제작됐다. 

(사진8)은 ‘분청사기철화당초문다완’으로 충청남도 계룡산 학봉리 일대에서 제작된 것이다. 계룡산 학봉리 일대의 분청사기가마터는 우리나라 ‘철화분청사기’의 대표적인 생산지역으로 1927년 조선총독부의 일본 연구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발굴 조사가 시작된 곳이다. 일본 연구자들이 이 일대의 粉靑陶窯址를 우선적으로 발굴한 이유는 도자기에 철화안료로 그려진 호방하고 거침없는 필치와 추상적인 동식물의 문양에 매료됐기 때문이다.(광복후 1992년에 다시 정밀 발굴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생산된 모든 도자기에 철화안료를 사용해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며 그림이 없는 분청사기가 훨씬 많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일명 ‘계룡산분청’으로 불리는 이곳의 鐵畵粉靑은 생산된 도자기의 기형과 문양도 다양해 장군병(사진9),(사진10), 주병(사진11), 자라병(사진12), 항아리(사진13), 제기, 잔, 사발, 마상배, 대접 등 여러 종류의 그릇이 전해진다. 

사진8_분청사기철화당초문다완
사진8_분청사기철화당초문다완
사진9_분청사기철화조어문장군(일본 소재)
사진9_분청사기철화조어문장군(일본 소재)
사진10_분청사기철화초화문장군(일본 소재)
사진10_분청사기철화초화문장군(일본 소재)
사진11_분청사기어문병(호림박물관)
사진11_분청사기어문병(호림박물관)
사진12_분청사기철화초화문자라병(일본 소재)
사진12_분청사기철화초화문자라병(일본 소재)
사진13_분청사기철화오리문호(일본 소재)
사진13_분청사기철화오리문호(일본 소재)

(사진8)의 ‘粉靑沙器鐵畵唐草文茶碗’은 백토분장의 넓은 붓질문양이 확연해 힘차고 생동감이 있고 거리낌이나 주저함 없이 한 번에 휘감았으며 그릇의 바깥 면에도 같은 붓으로 하얀 白土粉을 찍어서 한번에 휘감아 돌렸다.(사진14),(사진15)

사진14_다완내면의 백토분장
사진14_다완내면의 백토분장
사진15_다완외면의 백토분장과 모래받침
사진15_다완외면의 백토분장과 모래받침

힘차게 휘감은 백토분장위에는 세 군데에 굵고 진한 철화안료로 추상적인 영지버섯, 넝쿨문양을 호방한 필치로 그려 넣었다. 그릇 바탕의 백토분장에 버금가는 문양으로 한 작품을 완성시킨 활달함이 어우러진 것이다(사진16).

사진16_다완의 철화문양
사진16_다완의 철화문양

그릇의 얇은 기벽에 胎土는 우둘투둘한 沙質土이고 유약도 얇게 시유됐으며 굽바닥에 붙어있는 굵은 모래알은 제거되지 않은 상태로 붙어있다. 유약의 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사용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봐서 가마에서 구워낸 후 바로 무덤 부장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茶碗의 입지름이 15.5cm, 높이 6.9cm, 굽지름 4.7cm로 과거 先祖들이나 현대의 茶人들이 末茶를 즐기기에는 가장 적당한 크기이고 높은 굽은 양손으로 찻사발을 들고 마시기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철화분청사기 찻사발은 현재까지 전해오는 수량이 많지 않아 稀少하며 現代에도 차를 좋아하는 사람을 비롯해 누구나 所藏하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 되는 遺物이다. 

일본민예관에 소장된 두 점의 ‘분청사기철화다완’도 충청남도 계룡산 지역에서 생산된 것으로 (사진8)의 ‘분청사기철화당초문다완’과 같은 제작시기와 같은 고향이지만 힘찬 백토분장과 철화문양의 필력에는 많은 차이가 난다.

과거 우리 선조들이 제작한 茶碗들은 처음부터 찻사발로 생각하며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때로는 밥그릇이나 국그릇으로 사용하기도 했을 것이고 막걸리잔이나 무덤의 부장품이 됐을 수도 있었다. 

近世에 들어오면서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싹트고 국내외에서 유행하던 茶文化와 결합돼져 飮茶하기 알맞은 그릇을 찾게 되면서 찻사발로 재탄생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저것 따지거나 계산하지 않고 언제나 늘 해오던 대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500여 년 전 無名陶工의 찻사발 속에는 아직도 묵묵하고 은은한 향내가 배어있다.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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