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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르는 아베의 얼굴
우리가 모르는 아베의 얼굴
  • 서동주 서울대·일본연구소
  • 승인 2018.05.14 0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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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3일 헌법기념일을 맞아 일본의 아베 신조 수상이 다시 한 번 헌법 개정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이날 아베 수상은 한 우익단체의 공개 포럼에서 공개된 영상을 통해 자위대의 존재를 헌법에 명기함으로써 자위대가 위헌이라는 상황에 종지부를 찍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개헌의지는 강력하지만, 아직 일본국민들의 여론은 아베 수상에게 호의적인 것 같지는 않다. 예컨대 같은 날 도쿄에서는 약 6만 여명이 모여 개헌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고, 여론조사에서도 현행 헌법을 유지한 채 자위대를 명기하는 방안에 대해 27%만이 찬성한다고 응답했다.

그렇다면 왜 아베 수상은 정치적으로 결코 유리하지 않은 개헌 의제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에게 개헌이란 일본이 진정한 독립국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보기에 전쟁포기와 전력보유의 금지를 명기하고 있는 현재의 일본국헌법 9조는 주권국가의 자연적 권리인 교전권의 행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여기에 현행 헌법의 초안이 점령기 GHQ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점도 개헌이 필요한 이유이다. 즉 현행 헌법은 자주헌법이 아니라 미국에 의해 강요되었다 것이다.

이런 주장에서 본다면 미국이야말로 일본의 독립을 가로막고 있는 세력이 된다. 하지만 그는 반미주의자가 아니다. 반대로 그는 일본의 안전과 발전을 위해서는 미국과의 동맹은 불가결하다고 말한다. ,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갖는 영향력과 경제력, 그리고 강력한 군사력을 생각한다면 미일동맹은 일본에게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미일동맹이라는 대등한 관계를 나타내는 수사로 표현되고 있지만, 사실상 전후일본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음을 시인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무엇보다 미국의 의중을 살피는 게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아마도 개헌에 있어서 치명적인 것은 일본국민의 반대보다 미국의 반발일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아베 수상은 우익정치인으로 불리며, 그의 개헌론은 과거 군국주의로의 회귀 열망을 드러낸 것으로 비난된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가 일본의 어느 역대 수상보다도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적극적이고, 영토문제와 역사인식에 관해 표명한 우익적인 발언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그렇다고 그의 정치적 노선을 과거의 군국주의를 답습한 것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다. 그는 전쟁 때 귀축미영을 외쳤던 군국주의의 후예라기보다는 이를테면 미국의 그늘아래서 독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친미내셔널리스트라고 부르는 게 적절하다.

지난 9일, 일본에서 개최된 한일중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아베 총리가 맞이하며 악수하고 있는 모습. 영상 캡쳐=청와대 홈페이지
지난 9일, 일본에서 개최된 한일중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아베 총리가 맞이하며 악수하고 있는 모습.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영상 캡쳐

사실 친미내셔널리즘은 전후 일본보수사상의 일각을 이룬다. 그리고 이런 사상의 지적 계보를 따라가다 보면 에토 준(1933-1999)이라는 전후일본의 대표적 보수주의자와 만나게 된다. 1970년 전후일본에 미친 미국의 영향을 논한 글에서 그는 전후일본이 자기동일성의 회복과 생존의 유지라는 두 정책에서 미국에 대해 이율배반에 빠져있다고 주장했다. 즉 일본은 자기동일성을 회복하려면 미군의 철수가 필요하지만, 안전보장을 생각하면 미군의 존재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좌익과 혁신계열의 일부가 주장하는 반미내셔널리즘은 현실감각을 상실한 낭만적 주장에 불과했다. 참고로 그는 1976년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혹평했는데, 그 이유는 작가가 미군기지의 존재를 부정적인 시각에서 다루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일본이 처한 이런 딜레마적 상황은 심각한 것이지만 영속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70년대 중반 경이 되면 점증하는 일본의 경제력이 미국으로 하여금 정치적군사적 측면에서 유지되었던 미일 간의 불균등한 관계를 개선하는 데 나서도록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실상 이런 전망은 일본의 부상에 대한 미국의 인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확신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에토는 만약 미국이 일본의 요구를 거부한다면 일본정부는 핵무장을 통한 자주방위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이것만이 자기동일성의 회복과 생존의 유지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반미라는 최후의 선택을 배제하지 않은 채, 미국에 대한 기대와 거절의 불안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

한편 1980년대의 에토는 헌법 문제에 몰두했다. 우선 70년대 후반의 점령기 검열연구를 통해 그는 헌법이 강요되었을 뿐만 아니라, GHQ의 집요한 검열의 탓에 전후일본인들은 이 사실을 알 수 없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위에서 그는 전후를 미망(迷妄)’의 시대로 규정했다. 또한 그는 헌법 개념의 재해석을 통해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둘러싼 위헌 논란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는 헌법을 의미하는 영어 Constitution의 사전적 의미는 make-up of the nation으로 이것은 성문비성문에 관계없이 문화, 전통, 습속 일체를 포함한 국가의 실제적인 존재 방식을 가리킨다고 지적하며, 그 위에서 죽은 자와의 공생감이야말로 일본의 make-up of the nation이기 때문에 정치인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둘러싼 위헌 시비는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헌법의 문화론적 해석을 통해 현존하는 헌법의 무력화를 시도한 것이다.

그의 핵무장론이나 문화적 헌법론은 그 파격성 때문에 논단의 이목을 끌었지만, 널리 지지받지는 못했다. 그의 전후비판론은 사실상 고립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그가 남긴 주장이 그의 사후에 아베 신조와 같은 정치인의 발언과 행보 속에서 부활하고 있는 모습이다. 에토는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일본문화의 관점에서 정당화되는 것처럼, 자위대의 존재도 생존과 문화의 보존이라는 점에서 인정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실정법의 제약에 굴복하지 않는 정치지도자의 결단을 통해 실현된다고 말했는데, 그런 점에서 보자면 아베 수상은 에토의 충실한 상속자인 셈이다.

강요된 헌법론의 문제는 그처럼 강요된 헌법이 왜 지금까지 존립할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에 대해 에토는 검열의 영향을 거론했지만, 검열체제에 모든 것을 환원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두말할 것도 없이 헌법은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일본국민들의 의사에 의해 지탱되었다. 그럼 점에서 강요된 헌법론은 헌법의 역사에서 어느 한 측면만을 강조할 뿐이다. 이것은 아베의 개헌론을 전전 군국주의의 부활로 보는 시각에도 적용할 수 있다. 앞서 말했지만 아베의 생각은 일본의 자기동일성 회복이 미국의 선의에 달려있다고 생각한 에토 준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전후일본의 친미내셔널리즘의 과거와 현재다.

현재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동아시아의 대화국면에서 재팬 패싱에 초조해 하는 일본의 모습이 미국 중시에만 매달렸던 아베의 빈약한 외교적 상상력과 무관하지 않다면, 아베의 개헌론에서 군국주의만을 연상하는 우리의 역사적 상상력은 지적 태만이라는 비판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우리는 전후일본의 보수를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미국의 그늘 속에서 개헌을 향한 집념을 불태우는 아베 수상을 목도하며, 한국사회에서 일본을 향한 준엄한 시선에 균형을 안겨준 냉전한 지성은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지 자문해 본다.

 

서동주 서울대·일본연구소

일본 쓰쿠바대 일본사회주의문학의 식민지주의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최근에는 일본의 전후사상과 냉전의 관계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공·저서로는『전후일본의 지식풍경』, 『전후의 탄생』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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