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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를 더욱 넓고 깊게 사유하는 방법
자유민주주의를 더욱 넓고 깊게 사유하는 방법
  • 김명석 국민대 교수
  • 승인 2018.05.14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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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폴리스 11_ 존 롤즈의 『정의론』으로 살핀 ‘자유’, ‘민주주의’ 그리고 ‘개헌’

대한민국의 기본 구조는 정의로운가?

정치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정의’다. 서양어에서 ‘정치’의 말뿌리가 ‘나라’에서 왔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정의’는 나라에서도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시민으로서 우리는 우리나라가 더욱 “자유롭고 정의로운” 나라가 되도록 애쓰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개인이나 그의 행실에, 또는 사람들의 모임에 ‘정의롭다’ 또는 ‘불의하다’라는 낱말을 붙이는 데 더 익숙하다. 사회 구조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각자가 자기 몫의 일을 하는 것이 정의라고 보는 관점이 널리 퍼져 있다. 우리는 ‘정의롭다’ 또는 ‘불의하다’라는 말을 개별 시민, 시민들의 모임에 붙이면서 불행, 위험, 고통, 부조리 등의 탓을 사회 구조나 국가 구조에 돌리지 않고 개별 시민에게 돌리곤 한다. 하지만 ‘정의롭다’ 또는 ‘불의하다’라는 낱말을 붙이는 것이 보다 적합한 대상은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의 기본 체제다.

가장 빼어난 현대 정치철학자로 인정받는 존 롤즈는 자신의 『정의론』에서 ‘정의롭다’를 무엇보다 먼저 사회의 기본 구조에 적용하고 있다. 여기서 ‘사회’는 혼자 지내는 것보다 함께 모여 서로 도우며 지낼 때 더 큰 가치를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의 협동 체제를 말한다. 그리스든 고구려든 고대 사회는 성읍 단위로 그러한 협동 체제를 만들었다. ‘폴리스’나 ‘시티’ 또는 ‘부르크’는 ‘성읍’을 뜻한다. 오늘날 가장 중요한 사회 협동 체제는 ‘나라’다. 나라를 만들어 함께 사는 것이 홀로 사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것이 보장돼야 사람들은 이러한 협동 체제 안에서 들어간다는 점은 홉스와 로크 이후 사회계약이론의 근본 가정이다.

롤즈는 나라가 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본 구조들 가운데 어떤 구조는 정의롭지만 어떤 구조는 정의롭지 않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여기서 ‘나라의 기본 구조’란 나라의 주요 제도들과 기관들이 기본 권리와 가치들을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를 결정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 방식이 정의롭지 못할 때 시민들이 불행해지고 위험해지며 고통을 당한다. 기본 구조가 정의롭지 않다면 협동을 통한 상호 이익이라는 애초의 모험이 실패하게 될 것이며 이로써 나라 자체가 점차 무너질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본 구조는 협동 체제로서 우리 사회를 안정되게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정의로운가? 이것은 정치철학자의 물음이기도 하지만 우리 시민들의 물음이기도 하다.

기본 가치들을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주체는 당연히 시민들 자신이겠지만 실제로 그것을 집행하는 것은 나라의 주요 제도들과 기관들이다. 주요 제도에는 당연히 헌법이 들어갈 것이며, 주요 기관에는 헌법에 명시된 대로 국회, 정부, 법원, 헌법재판소, 감사원, 지방정부 등이 들어갈 것이다. 경제 제도와 문화 조건 같은 것도 주요 제도 안에 들어간다. 우리 시민들은 이 기본 구조 안에서 자기 삶을 꾸려나가고 미래를 설계하며 아들딸을 기른다. 시민들의 삶이 안정되지 못하고 꿈들이 번번이 좌절될 때 우리는 사회 구조를 성찰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현재의 기본 구조가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 구조를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개헌의 욕구는 기본 구조를 보다 정의롭게 바꾸려는 욕구이기도 하다. 보다 정의로운 사회 구조를 찾는 일은 우리의 정의감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 정의감은 우리 시민들이 겪은 경험들과 삶의 이야기에서 생겨날 것이다. 1987년 헌법 체제가 규정하고 있는 기본 구조보다 더 정의로운 구조를 만드는 일은 우리 시민들의 몫이다.

‘자유 민주주의’라는 원칙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대한민국의 기본 구조를 요약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이 우리 헌법에 나오게 된 것은 1972년 유신헌법부터인데 이것이 뜻하는 바에 논란이 있다. 1972년 이후 줄곧 살아남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은 대한민국의 기본 구조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따라 정비돼야 한다는 원칙을 표현하고 있다. 자유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국가의 기본 구조이기도 하지만, 여타 기본 구조를 평가하는 잣대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제도와 기관은 불의한 제도이며 불의한 기관이다. 다시 말해 ‘자유 민주주의’는 정의로움을 판정하는 원칙 같은 것이다.

우리가 이 원칙을 유지하는 한 무엇이 더 정의로운 기본 구조인지는 거의 정해져 있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의 개헌안을 두고 극우 진영은 이것이 ‘사회주의’ 개헌안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번 개헌안에서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라는 표현을 전문에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자유 민주주의라는 원칙을 이번 개헌안에서 더욱 강하게 실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보다 더 강하고 철저한 혁신을 바라는 사회민주주의자나 사회주의자에겐 실망스런 개헌안일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자유 민주주의라는 원칙이 과연 계속 유지할 만한 원칙인지 따져 물을 필요가 있다. 이것을 묻는 동안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 이념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존 롤즈 정치철학의 목표는 나라의 여러 가지 기본 구조들 가운데 더 정의로운 것과 덜 정의로운 것을 가릴 원칙을 찾는 것이다. 그는 그 원칙을 ‘정의의 원칙’이라고 불렀다. 그는 오랜 철학 탐구를 거쳐, 기본 가치들 가운데 기본 자유의 분배를 다루는 원칙 하나와, 기본 가치들 가운데 사회 및 경제 재화의 분배를 다루는 원칙 하나를 제안했다. 첫째 원칙은 각 시민이 될 수 있는 한 폭넓게 기본 자유와 권리를 평등하게 누려야 한다는 원칙이다. 둘째 원칙은 사회 및 경제 불평등이 가장 낮은 이에게도 이익이 되거나 보다 적은 기회를 가진 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조건에서만 허용돼야 한다는 원칙이다. 달리 말해, 사회 및 경제 불평등이 허용되는 조건은 다음 두 가지인데, 그런 불평등이 가장 낮은 이에게도 이익이 되거나, 그런 불평등이 모든 이에게 사회의 직위와 직책이 열려 있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조건이다.

롤즈의 첫째 원칙은 ‘자유주의’라고, 둘째 원칙은 ‘민주주의’라고 짧게 부를 수 있다. 롤즈 자신은 둘째 원칙을 ‘민주주의 평등 원칙’이라 부르곤 했다. 롤즈는 원칙들 사이에 우선순위도 정했는데 자유주의 원칙이 민주주의 원칙에 앞선다. 민주주의 원칙은 효율성 원칙이나 공리 극대화 원칙에 우선한다. 대한민국이 채택하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 원칙은 롤즈의 정의 원칙들을 매우 잘 반영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원칙이 공리주의나 자유지상주의가 아니라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시민들이 기본 자유를 평등하게 갖지 않더라도, 시민들이 누릴 혜택의 전체 총합을 늘릴 수 있다면, 그러한 사회 기본 구조는 정의롭다. 대한민국은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기본 자유를 평등하게 갖는 것을 추구한다. 자유지상주의는 자유주의 원칙은 받아들이지만 민주주의 평등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경우 선천 재능, 상속 받은 재산, 불운 등으로 일어난 사회 및 경제 불평등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사람들 사이에 무한한 자유 경쟁만을 장려하는 사회 구조가 더 정의롭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민주주의는 이러한 자유지상주의 원칙을 채택하지 않는다.

헌법 개정은 우리나라를 좀 더 정의롭게 바꾸는 길이어야 한다. 각 나라는 그 나라의 시민들이 겪은 역사의 산물이다. 우리 시민들이 겪은 수많은 역사 사건들 가운데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가장 중요했으며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이루고 있다. 그 사건 이후 1919년 4월 11일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 헌장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하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며,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가”지며,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다”고 선포했다. 여기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또렷이 표현돼 있다. 1948년 제헌 헌법 이후 4·19혁명, 부마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 6·10항쟁 등과 같은 역사 사건을 거쳐 대한민국은 성장하고 있고 그러한 성장의 역사를 새로운 헌법에 반영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를 반영하여 올해 3월 26일 개헌안을 발의했다.

이번 개정안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기본 자유와 권리의 주체를 ‘국민’에서 ‘사람’으로 넓혔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할 의무를 진다.” 많은 정치철학자들, 특히 사회계약이론가들은 상호 협동 체제로서 사회를 ‘모든 사람들의 사회’로 확대하는 꿈을 가졌다. 이번 개정안은 대한민국의 시민이 세계시민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세계시민이 대한민국 안에서 사람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이념을 헌법 체계 안에 구현하려 하고 있다.

자유주의 원칙은 가능한 한 넓게 기본 자유와 권리를 평등하게 누려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이번 개정안은 이 원칙에 보다 충실하게끔 ‘신체와 정신을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 곧 생명권을 기본 권리로 덧붙였고, 성별·종교·사회신분뿐만 아니라 장애·연령·인종·지역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불평등하게 대우받아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개정안에서는 양심·종교·표현·집회·결사·학문·예술 등의 자유를 국민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누리도록 확대했다. 그밖에 국민에게 ‘알권리’, ‘개인 정보를 통제하고 보호받을 권리’, “장애·질병·노령·실업·빈곤 등 다양한 사회적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적정한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 “임신·출산·양육과 관련하여 국가의 지원을 받을 권리”, “안전하게 살 권리”를 헌법 조항에 새로 넣었다.

특별히 이번 개정안에서 민주주의 평등 원칙을 반영한 조항이 새로 생겼다. 제11조 2항에 “국가는 성별 또는 장애 등으로 인한 차별 상태를 시정하고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성별 또는 장애 등”에서 “등” 안에는 지역과 학벌도 있어야 한다. 이 조항은 사회의 직위와 직책을 맡을 기회를 적게 가진 이들에게, 단순한 기회 균등을 넘어서, 오히려 더 많은 기회를 주려고 국가가 애써야 한다는 점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요구는 자유지상주의, 효율성 극대화, 공리주의, 능력주의, 자연 자유주의 같은 원칙들 대신에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평등을 구현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개정안 제125조 2항에서 “경제 주체 간의 상생과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해, 국가는 곧 상호 이익을 도모하는 사회 협력 체제여야 한다는 사회계약이념을 보다 구체화했다. 또한 “국가는 토지의 공공성과 합리적 사용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특별한 제한을 하거나 의무를 부과할 수 있다”를 제128조 2항으로 새로 넣어서, 토지의 공공성을 대한민국의 기본 구조에 담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자유주의자 롤즈는 토지 소유권을 기본 자유와 권리에 넣지 않았다. 시민이 토지의 사용권, 처분권, 수익권을 모두 완전하게 가져야만 자유주의 이념이 실현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면 토지의 공공성은 오히려 더욱 강화돼야 한다.

대통령의 개헌안이든 나중에 제안될 국회 개헌안이든 헌법 개정은 우리나라를 좀 더 정의롭게 바꾸는 길이어야 한다. 개헌안들이 우리의 자유 민주주의 이념을 더욱 넓히고 더욱 깊게 하는지 따지는 일은 우리 시민들의 몫이다. 시민들이 앞장서 보다 정의로운 개헌안을 고르고 그것을 끝내 관철해야 한다.

 

 

김명석 국민대·교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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