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8 20:20 (목)
실천적 지식인 마르크스에 대한 오해 … “그는 프로메테우스 아닌 시시포스”
실천적 지식인 마르크스에 대한 오해 … “그는 프로메테우스 아닌 시시포스”
  • 홍기빈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위원장
  • 승인 2018.05.08 11: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을 말하다_ 『마르크스 평전』(개러스 스테드먼 존스 저, 홍기빈 역, 북이십일, 2018.5)

역사상의 인물 중에 마르크스만큼 많은 전기가 쏟아져 나온 인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서거한지 150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더욱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전기 중에 마르크스를 19세기 유럽 역사와 또한 지성사의 맥락 속에 놓고서 그의 사상을 재구성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해보는 전기는 무척 찾기 어렵다. 이러한 작업에는 몇 가지 난점이 따른다. 우선 마르크스의 저작 자체가 체계적으로 정리돼 출간된 것이 최근 20세기 후반이라는 최근에 벌어진 일이다. 둘째, 그리고 그의 사상이 건드리고 있는 분야는 철학·역사학·경제학·정치학을 위시해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뻗쳐져 있으므로, 그와 관련된 역사적 지성사적인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로 초인적인 독서량이 있어야만 한다. 셋째, 마르크스는 워낙 정치적으로 예민한 인물이므로 전기 저자들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편견이 반영되지 않기가 힘들다. 따라서 엄밀한 방법론에 근거해 체계적·객관적으로 마르크스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 연구는 많지 않으며, 그러한 노력은 숱한 비난과 공격에 노출되게 마련이다.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올해가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다.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올해가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다.

19세기 지성사의 맥락 속에서 마르크스 읽기 

기존의 전기 중 이러한 난점을 극복한 가장 뛰어난 것의 하나는 오래 전인 1939년에 출간됐던 이사야 벌린의 짧은 전기를 들 수 있다. 하지만 벌린의 전기는 그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결점 혹은 최소한 문제 하나를 안고 있다. 그는 마르크스를 경제학, 철학, 정치학, 사회 이론 전반에 걸쳐서 역사와 경험적 증거를 토대로 나름대로 하나의 완결된 이론적 체계를 완성한 사람으로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이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의 관계’라는 오랜 복잡한 문제 하나와도 연결이 되어 있다. 주지하듯이 이미 19세기말부터 이른바 마르크스주의라는 것은 주로 엥겔스 및 독일사회민주당 이론가들의 작품일 뿐, 마르크스는 스스로의 말처럼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는 비판이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닌 마르크스는 누구였는가’라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 

마르크스주의라는 것은 마치 달팽이의 껍질처럼 단단하고 물샐틈없이 닫혀 있는 논리적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그 껍질이 덧씌워진 민달팽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라는 껍질을 벗겨낸 그 ‘민달팽이 마르크스’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제대로 풍부하게 답할 수 없다면, 겨우 두 뿔을 드러내면서 모습이 보이는가 싶었던 마르크스는 다시 그 마르크스주의라는 딱딱한 껍질 안으로 움츠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난 150년간 마르크스주의가 만들어낸 신화화된 마르크스가 아니라, 19세기의 구체적인 역사적 지성사적 맥락 안에서 실제로 살고 행동하고 고민하고 글을 썼던 실천적 지식인 마르크스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주의라는 껍질을 벗겨내면?

이 책의 저자는 그러한 작업을 감당할 수 있는 대단히 드문 이들 중 하나이다. 그는 60년대 말 이후 최근까지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에서 19세기 지성사를 연구해 온 역사가로서, 『캠브리지 정치 사상사』 19세기 편의 책임 편집을 맡은 이 분야의 권위자이다. 또 본인 스스로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로서 60년대 말에서 81년까지 영국의 <뉴레트프리뷰>의 편집진에 참여하면서 마르크스의 저작을 오래도록 연구했으며, 1980년대에는 포스트주의의 ‘언어적 전환linguistic turn’을 19세기 사회사 연구에 적용하기도 했다가, 90년대 이후에는 이를 버리고 다시 퀜틴 스키너Quentin Skinner 이후의 캠브리지 학파의 사상사 연구 방법론으로 회귀하는 등의 복잡한 지적 이력을 가진 이이기도 하다. 그는 실로 반세기에 걸친 19세기 역사가 및 사상사가로서의 연구를 배경으로 카를 마르크스의 지성사적 전기를 써내며, 이를 통해서 그 ‘민달팽이 마르크스’ 즉 19세기를 살았던 역사적 인물로서의 마르크스를 재구성해낸다. 

1950년대 이후 계속 진행되어 온 마르크스 및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학술적 연구 논의에 익숙치 않은 이들에게 이 책에서 그려내는 마르크스의 모습은 충격적일 수도 있고 큰 거부감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에서 그려내는 마르크스의 이미지, 즉 인간의 역사 발전 법칙이라는 비밀을 신들로부터 빼앗아 와서 인류를 지적·정치적으로 해방시킨 ‘프로메테우스’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부숴 버린다. 이사야 벌린이 그려낸 마르크스와는 전혀 다른 마르크스가 여기에 있다. 그는 일관된 사상 체계를 가진 인물이 아니며, 그의 철학도 경제학도 정치 이론도 심지어 혁명 운동 노선마저도 시기마다 인생의 고비마다 계속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정면으로 모순되는 내용들까지 잔뜩 담고 있으며, 심지어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며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기둥이 되는 『자본론』은 실패한 프로젝트였고, 마르크스주의가 한창 만들어지던 1870년 이후의 마르크스는 엉뚱하게도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최대의 적이었던 인민주의자들에 동조해 러시아 농촌 공동체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는 사실들이 강조된다. 

그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오해들

첫째, 철학적으로 볼 때 마르크스를 유물론자라고 보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오해라고 한다. 유물론/관념론이라는 대립 구도 자체가 다윈 이후의 시대이자 엥겔스가 한창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론 체계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19세기 후반의 유행이었을 뿐, 19세끼 전반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라고 한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칸트와 헤겔의 독일 관념론의 전통에 서 있는 것으로 보아야만 그의 능동적인 인간 노동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둘째, 자본주의의 발생과 진화와 소멸 그리고 새로운 생산양식의 출현을 역사적 논리적으로 구성해 낸다는 본래의 『자본론』의 프로젝트는 결국 마르크스 스스로 포기해 버리게 되며, 이후 그는 자본주의의 보편적인 발전 법칙이라는 것에 대해서조차 회의를 품게 됐다고 한다. 셋째, 그의 정치 노선은 고전적인 민주주의/사회 혁명론, 경제 결정론, 노동조합과 선거를 통한 집권을 희망하는 사회민주주의, 촌락 공동체의 발전 가능성에 희망을 거는 낭만주의까지 다양하게 변화해갔다는 것이다. 

1천 페이지가 넘는 이 책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민달팽이’ 마르크스는 그래서 ‘프로메테우스’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끊임없이 돌을 밀어 올렸다가 나동그라지고 또 다시 밀어 올렸다가 나동그라지는 시시포스의 모습에 훨씬 가깝다. 아마 이것이 그토록 많은 경건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 책에 대해 분노와 비방을 터뜨려 온 이유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주의와는 별개의 존재일 뿐만 아니라, 새롭게 ‘독해’하고 ‘구성’해야 할 별개의 마르크스라는 존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끊임없이 이 방향 저 방향으로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온 몸으로 달려들어 연구와 실천을 행하다가 실패를 또 실패를 맛보고 그러고도 또 새로이 달려들다가 힘이 다한 한 전형적인 19세기의 인물이 있을 뿐이다. 역자로서의 견해를 피력하자면, 나는 이것이 바로 진정한 마르크스의 위대성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해방과 엄밀한 진리의 추구라는 두 개의 이상만을 놓고 나머지 모든 것-심지어 자신과 가족의 행복까지-을 희생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면 그러한 행보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라가는 산마다 밀어 올리는 바윗돌마다 그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최고급의 걸작들만을 남겼던 이다. 인류는 이 시시포스의 두뇌와 몸을 일생동안 혹사시킴으로써 엄청난 혜택을 보았다. 

시시포스의 모습.
시시포스의 모습.

위대한 ‘프로메테우스’로서의 마르크스의 모습을 원하는 이들은 공산당에서 내놓은 마르크스 전기를 구해서 읽을 일이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마르크스, 19세기라는 역사적 지성사적 맥락 속에서 몸부림치고 좌절하고 또 달려들었던 ‘시시포스’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한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산업 사회와 자본주의라는 것이 그렇게 몇 개의 불변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고정된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벗은 시건방진 예언자가 아니라 끝없이 관찰하고 틀리고 또 도전하는 과학자요 실험가라고 믿기 때문이다. 

 

홍기빈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위원장
캐나다 요크대(토론토) 정치경제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며, 저·역서로는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역서) 등 다수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