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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이야기 : 늙음에 대하여
생각하는 이야기 : 늙음에 대하여
  • 권오길 / 강원대·생물학
  • 승인 2003.06.0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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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같이 속 비어버린 내 머리카락이여!

제목에서 말하는 대통은 다름 아닌 竹筒, 쪼개지 않고 짧게 자른 대 토막을 말한다. 헌데, 내 머리카락은 속이 텅 비어버려서 거기에 공기가 그득 들었다는 말이 아닌가. 문제는 空氣에 있다. 털 속에도 물리학과 화학이 들었다는 말이다.

어찌 살았던 간에 정년 2년을 남겨둔 내 모습이 그리 추하지는 않아 보인다. 낮 짝엔 그래도 물기가 배어있어 아직은 살금(주름살) 하나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머리로 올라가면 말이 아니다. 완전히 털이 세어 백새가 된 지 오래다. 검은머리를 찾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늙지 않으려면 자기를 사랑하라고 하니, 童顔鶴毛의 모습이 바로 나일 터, 하고 억지로 버텨나가고 있다. 동심을 잃지 않으려 애를 쓴다는 말이 더 맞다.

사실 어느 털이나 제일 안(속)에는 공기가 조금씩 들어있다. 살 밑에서 털이 만들어져서 자라 가는 과정을 보면, 멜라닌(melanin)이라는 검은 색소가 털뿌리(毛根)에 쌓이고 공기도 조금 묻어 들어간다. 그러나 병을 앓거나 영양상태가 좋지 못하면, 또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색소 침착이 제대로 안되고 공기는 더 많이 들어가서 안이 대나무 꼴로 비어버린다. 아! 바로 이게 흰머리라는 것이로군. 속 빈 털이 백모(白毛)렸다. 물론 내림, 즉 유전이 가장 큰 몫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속일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것이 유전물질 DNA라는 요술방망이다. 머리터럭 하나에도 이놈이 묻어 나오니 기가 막힌다. 대물림 씨는 못 속인다는 거지.

그런데 털이 하얀 것은 멜라닌도 멜라닌이지만 그 속을 채우고 있는 공기가 주범이다. 공기가 햇살을 받으면 빛을 散亂하기에 털이 희게 보인다. 뿐만 아니라 눈송이가 희게 보이는 것은 송이 사이 틈에 든 공기의 빛 산란이요, 흰 꽃의 꽃잎이 뽀얗게 보이는 것도 세포 틈새를 채우고 있는 공기 때문이다. 하여튼 여러 사람들이 젊게 보이겠다고 피부에 해롭고 백내장을 일키는 염색약을 그 보드라운 털에 발라 제친다. 늙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순리다. 順天者는 存하고 逆天者는 亡한다.

심심함을 풀기 위해서라거나 뭔가에 정신을 모둘 때 흔히 자기의 손가락을 꺾는 사람이 있다. 딱! 하고 소리가 나지 않던가. 물론 발가락도 비틀면 그런 소리를 낸다. 이건 또 왜 그럴까. 손마디는 다름 아닌 관절이다. 무릎, 팔, 목 등 모두 구부리고 펴고, 틀 수 있는 뼈마디가 모두 관절이다. 관절의 두 뼈끝에는 몰랑몰랑한 연골이 붙어있고 연골과 연골 사에는 액체가 들어있어 움직임을 원활케 한다. 심한 마찰을 피할 수가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역시 나이 먹으면 그 사이에 공기가 들어차게 된다. 손가락을 비틀어 꺾으면 두 뼈 사이에 들어있던 공기가 눌려 밖으로 비겨 나가면서 딱! 하고 소리를 낸다. 일종의 마찰음인 것이다. 물리학에서는 '마찰적 파동(음파)'이라 한다. 그런데 소리가 난 손가락뼈는 곧바로 다시 비틀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일정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공기가 뼈 사이, 안으로 들어온 후) 다시 소리를 내는 것만 봐도 그 소리가 '공기' 탓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세살 박이 어린이의 손발가락을 꺾어보지만 절대로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꺾기 연습을 많이 하면 더 잘 될 것이라는 점에도 동의할 수가 있으며, 손마디가 약간은 굵어질 것이다.

'우리의 몸과 공기와의 관계'를 좀더 들여다보자. 늙어빠지면 피하지방도 고갈되어 살 꺼풀이 종잇장이 되고, 간덩이의 양분 저장능력이 떨어져서 자주 허기를 느낀다. 아무튼 배가 고프다 싶으면 뱃속에서는 창피하게도 '꼬르르꼴꼴' 소리를 낸다. 왜일까. 얼마 전만 해도 방구들 대신에 파이프를 깔아서 뜨거운 물을 흘려보내 방을 덮였다. '보일러'라는 것이다. 연탄불로 데운 물을 관에 돌리면서 가끔은 공기를 뽑아냈다. '에어(air)'를 뽑아줘야 물이 힘들이지 않고 잘 돈다. 그때도 방바닥에서 꾸르르 물 흐르는 소리도 나지 않던가.

우리 뱃속에서 나는 소리도 보일러의 물소리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뱃소리는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위에서 소장(십이지장)으로 음식을 내려가는 때 내는 소리고, 또 하나는 대장에서 나는 소리다(내과 의사는 청진기로 우리 귀로 잘 들리지 않는 내장의 운동소리도 듣는다). 대장의 소리를 보자. 큰창자에 내려온 음식 찌꺼기는 물이 다 흡수되고 제법 굳은 대변덩어리의 모양을 갖춘다. 대장에는 5백가지가 넘는 세균들이 소화가 다 끝난 것을 분해하여 살고 있다. 그것들이 균형을 이뤄있으면 대장이 건강한 것이고(그렇지 못하면 설사 등 병이 됨), 그것들이 분해한 것에서 나오는 여러 비타민을 우리 몸이 흡수한다. 소위 말하는 대장균은 우리와 공생하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 그런데 분해할 때 여러 종류의 가스(공기)가 나오니 이것이 모여서 방귀가 된다. 이 가스가 대변덩어리 사이에 고여 늘어나고 그 공기 뭉치가 덩어리에 눌려져서 아래로 끼어 빠져나갈 때 꼬르륵 소리를 낸다. 그것도 일종의 마찰음이다. 이 소리도 늙다리 배에서 더 자주 울린다.


대처 늙음이란 어떤 것일까. 머리털에 기름기 빠지고 얼굴에 주름살지며, 속 비어 굽어지는 허리뼈에서만 늙정이를 보는 것이 아니더라. 머리털 속이 텅텅 비고 뼈마디에 바람들고, 대장에 가스 차는 것도 늙어빠짐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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