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청한 놈, 모자란 놈, 한심한 놈”
“멍청한 놈, 모자란 놈, 한심한 놈”
  • 김태현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기획부장
  • 승인 2018.05.08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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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생들의 一聲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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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던 사례 중 단연 으뜸은 이 ‘놈놈놈’ 시리즈다. 인권 침해 사례를 공유하는데 분노는커녕 오히려 말하는 이의 이미지가 덧씌워져 재밌어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신체에 가해지는 폭행도, 심한 욕설도 아닌 것이 세 번에 걸쳐 연달아 나오는 게 마치 격투 게임에서 많이 사용했던 ‘연속기’, ‘콤보’라 불리는 기술과 유사해 보인다. 큰 공격에 한 번 당하면 재정비해 반격이 가능하지만, 연속기에 제대로 당하면 게임이 끝날 때까지 손을 쓸 수가 없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원생이 처해있는 상황을 이 정도로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례가 있나 싶다. 문제와 해결 방법을 모두 알고 있지만 버튼을 눌러도 작동이 안 되는 구조에 걸려들었다. 학위 과정의 종료만이 유일한 결과로 남은 대학원 문제에서, 표면에 드러난 문제와 대책보다 구조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보인다. 

심한 폭력 사건만 집중적으로 이슈화되면서 작은 폭력들이 묻히고 있다. 폭력 사건은 그 피해 정도가 클수록 가해자의 악마화가 심해지고, 폭력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묻히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는 사소해 보이는 폭력이 정당화되고 갑을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대학원 내 주체 간 관계를 명확하게 드러내보고자 한다.

지도교수와의 관계에서 대학원생이 저자세를 면하기는 쉽지 않다. 학문적 권위에서부터 형성된 교수-학생의 위계 관계가 학문과 무관한 가상의 권위들과 합쳐지면서 지금의 갑-을 관계가 돼버렸다. 행정 제도와 학계에 미치는 영향력 정도로는 대학원생을 을로 만들 수 없다. 대학원생이 스스로를 을이라 생각하는 것만이 대학원생을 을로 만들 수 있다. 여기에 ‘내면화’를 요구하는 장치가 존재한다. 멍청하고, 모자라고, 한심하다는 정체성이 내면화되는 순간, 자신의 부족함만이 부당함을 당한 이유로 남는다. 폭력은 갑질의 한 유형으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갑을 관계를 형성하고 공고히 다지는 수단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수단으로서의 폭력은 제자, 후배, 동료가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따뜻한 마음과 결합해 상대에게 전달되고 받아들여짐으로써 그로 하여금 스스로 을이 되도록 한다. 다시 말해, 갑을관계라는 허상은 상대에게 을이 되기를 요구하는 순간 형체를 갖고 자발성,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런 면에서 “갑질은 갑과 을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뿐”이라고 지적한 경희대 송재룡 교수님의 관점은 대학원 사회의 문제를 풀기 위한 열쇠라고 생각한다. 갑과 을이 제 역할을 할 때 발생하는 것이 갑질이라면, 그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대학원에서 발생하는 폭력 사건들을 교수사회의 문제로 몰아가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한다. 실제로 이런 문제들은 교수-제자 사이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권력을 이양 받은 대학원생이나 선배에 의해 발생하는 폭력도 드러나지는 않지만 굉장히 많다. 서울대에서 조사한 「2016 대학원생 인권실태 및 교육연구환경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선배·동료에게서 발생한 신체적 폭력 및 집단적 따돌림이 교수·강사에게서 발생한 것보다 2~3배 정도 높았다. 최근 수 년 동안 대학에서 가장 많이 바뀐 것은 교수 개개인의 조심성이다. 이 조사 결과는, 그 조심성이 어디에서 유래했든지 간에,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한다. 정의에 대한 관념과 개인의 선의, 위축에 의존한 대학원 문화 개선은 대학원생을 더 교묘한 노예제도로 얽을 뿐이다. 

대학원 진학 전 꿈꿨던 학문적 열망과 교수님에 대한 존경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우리에게 부여된 을의 역할을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눈앞의 부당함을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순수했던 존경심을 되찾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주체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 관계가 어떤 권위에 의해 형성됐는지, 그리고 어떤 권위가 배제돼야 하는지를 명확히 해야 서로의 관계가 분명해지고, 관계를 맺은 목적이 실현된다. 연구의 가치를 바로세우고 대학의 사회적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해 연구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 갑을관계가 허상임을 인지하고, 주어진 가상의 역할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함께 만들어가는 대학문화의 시작이 될 것이다. 

 

김태현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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