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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선각자’ 박제가를 ‘기적적 돌출’로 봐서는 안 되는 이유
‘기적의 선각자’ 박제가를 ‘기적적 돌출’로 봐서는 안 되는 이유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8.04.30 10: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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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근대와 과학기술’_ 임종태 서울대 교수(화학과) 「18세기 말 조선 과학의 지형도」

무엇이 한국 사회의 급격한 전환을 가능케 한 것일까? 이 문제는 무엇보다도 이광수의 논설 이후 시기의 과학기술사에 대한 탐색을 통해 다뤄야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일본 식민 통치의 영향, 해방 이후 한국 정부와 기업의 정책, 한국을 둘러싼 국제 환경의 요인 등이 미친 영향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과연 지난 100년간의 심대한 변화를 오로지 그 시기에만 집중해서 설명할 수 있을까? 특히 그 변화가 ‘무’에서 ‘유’가 만들어지는 것과 같은 ‘기적적’ 현상이었다면, 그러나 순전한 ‘무’에서 ‘유’가 만들어지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논리학적 상식을 받아들인다면,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기 전의 한국 사회에서 그 변화를 추동했거나 또는 그 변화의 주요 양상을 규정한 어떤 요소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18세기 후반 조선 과학기술의 면모

이러한 의문을 염두에 두고, 필자는 전근대 한국의 마지막 시점인 조선 후기, 특히 영조, 정조 임금이 통치하던 18세기 후반 조선 과학기술의 면모를 조망했다. 이 시기에 주목하는 것이 필자의 자의적 선택은 아니다. 이광수와 같은 식민지 시기 한국인들의 비관적 현실 인식, 또는 그와 대체로 공명했던 일제 식민사관의 ‘정체성론’에 대항하여 지난 세기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바로 이 시기 조선 사회에 서구적 근대의 ‘맹아’가 자생적으로 등장했음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특히 영조, 정조의 시기에 만개한 ‘實學’이 주자 성리학의 번쇄한 형이상학, 봉건적 정치질서, 중세적 사대주의를 비판하고 근대적 과학기술, 민주주의, 민족주의로의 전환을 추구한 진보적 사조로 간주됐다.

필자 또한 18세기 후반 조선 사회의 과학기술이 중요한 변화의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그 변화를 서구적 근대 과학기술의 씨앗이 등장한 현상으로 이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최근 여러 연구자들의 지적처럼, 과거 조선 사회에서 근대의 맹아를 찾는 일은 한국사가 서구적 근대라는, 한국사와 무관하게 정해진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고 본다는 점에서 비역사적이다. 이는 18세기 조선의 개혁 사상가들을 마치 신의 영감에 사로잡혀 먼 훗날 도래할 메시아(서구적 근대)를 예언한 구약성서의 선지자처럼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한 역사가는 1778년 『북학의(北學議)』에서 놀라울 정도로 ‘근대적’인 경제 사상, 기술 정책을 제시한 박제가를 ‘기적의 선각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렇듯 박제가를 근대의 기적적 돌출로 보아서는 그의 사상이 지닌 당대적 의미는 물론 그것과 현대 한국 사회 사이의 연관도 잘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박제가는 당시 조선 사회의 맥락에서 설명할 수 없는 예외적 존재가 되고, 그 때문에 18세기 말 조선과 현대 한국을 이어줄 고리로서의 역할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조선 사회에서 근대의 자생적 맹아를 찾는 일은 도리어 과거 조선과 현대 한국 사이의 근본적 단절을 전제함으로써, 20세기 한국에서 일어난 급격한 변화가 순전한 기적이었음을 주장하는 행위가 돼버리는 것이다.

필자는 조선 후기와 현대 한국 사이의 커다란 차이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말 조선의 과학기술 지형에서 현대 한국의 과학기술을 특징짓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등장했음을 제안한다. 이는 18세기 말에 ‘근대’의 맹아가 나타났다는 주장이라기보다는, 도리어 우리가 절대시하는 전근대와 근대의 구분이 실은 그렇게 근본적이지 않고, 현대 한국이 아직 18세기 말에 시작된 시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서 그때 등장한 문화적 요소가 우리의 ‘근대’를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그 심층에서 규정하는 면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북학론자들의 사유와 실천

홍대용과 그의 뒤를 잇는 북학론자들의 사유와 실천은 양반 사대부의 우주론, 기술직 중인들의 전문 분야, 장인 수공업 기술 등 폭넓은 쟁점에 걸쳐 있었고, 따라서 그들을 창으로 해 당시 조선 과학기술 전반의 상황에 대해서도 얼마간의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홍대용, 박제가 등은 18세기 후반 조선의 문화와 과학에서 상당히 개혁적인 지향을 대변하는 인물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새로운 지향에서 ‘西洋’이 미친 영향이 생각했던 것만큼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홍대용과 18세기 중후반 등장한 사대부 수학자들이 서양 수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고 또 서양 천문학의 장점을 흔쾌히 인정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들의 서양 애호 경향이 이를테면 ‘全面西化’의 지향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었다. 대개의 양반 수학자들이 서양 수학을 성리학·주역학의 형이상학적 탐구의 일환으로 연구했으며, 이러한 경향을 비판했던 홍대용의 경우도 서구 천문학과 氣의 세계상을 결합시키려 했고 나아가 莊子류의 개방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재료로 이용했다. 

요컨대 이들은 서양의 과학기술이 기성의 학술, 문화와 근본적 모순 관계에 있다고 보지 않았다. 서양의 천문학이 청조 중국의 공식 역법인 ‘시헌력’에 이용되고 있었으므로 이들에게 서양 과학을 배우는 일은 최신 중국과학을 배우는 일과 크게 구분되지 않았다. 따라서 홍대용과 북학론자들의 새로움은 ‘서양 근대 과학의 수용’ 또는 ‘서구적 근대화’와는 다른 측면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둘째, 홍대용에게서 드러나는 새로운 면모의 하나는 그때까지 대체로 분리되어 있던 양반의 학문과 중인 전문가의 기술이 수렴해가는 모습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수렴은 18세기를 거치며 홍대용과 같이 전문 분야의 지식과 실천이 지닌 가치를 인식하고 이를 전문적 수준에서 실천하는 양반 학자들이 다수 등장하고, 이러한 흐름이 중인 전문가 집단의 자의식 성장과 맞물림으로써 일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수렴은 계산과 관측의 활동을 儒家 학문의 핵심적 실천으로 자리매김하려는 홍대용의 시도에서 드러나듯 형이상학과 윤리학에 치중된 조선 성리학에 우주, 인간, 사회에 대한 실증적, 경험적 탐구로서의 성격을 부여하려는 움직임이기도 했다. 홍대용의 이러한 지향은 수학 분야의 경우 한 세대 뒤의 서호수, 19세기 중반의 남병철, 남병길 등에 의해 이어졌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경향이 양반 엘리트의 문화 전반으로 확대된 증거는 잘 보이지 않는다.

셋째, 홍대용에게서 보이는 또 다른 새로움은 그가 자신의 개방적, 성찰적 북경 여행을 조선 양반 학자들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그 결과 18세기 후반을 거치면서 중국여행은 조선 양반 엘리트들의 중요한 문화적 실천으로 자리 잡았으며, 조선과 중국의 문화 교류가 본격화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홍대용이 성찰적 중국 여행의 문화적 함의를 구체화한 방식은 그의 뒤를 이은 박제가 등의 북학론자들과 크게 달랐다. 홍대용은 북경 여행을 통해서 얻은 문화적 통찰을 자신의 천문학, 우주론 학설을 통해 표출했는데, 조선 성리학자들이 지닌 편협한 자기중심적 사유를 지구설, 지전설, 무한 우주설을 통해 구축된 중심이 없는 우주상에 입각해 비판했다. 홍대용의 이러한 개방적 사유는 조선의 편협한 성리학은 물론 서구중심주의, 중국중심주의 등 자기 집단을 중심이라고 간주하는 어떤 경향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적용될 가능성을 지닌 것이었다.

박제가를 비롯한 북학론자들은 중국으로의 여행을 조선 사회 개혁을 위한 필수적 전제로 간주한 점에서 홍대용처럼 중국 여행의 문화적 중대성을 강조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다시 중국을 중심으로 설정하고 조선을 주변화시킴으로써 홍대용이 와해시키려 한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을 (조선을 문명으로, 청나라를 야만으로 인식했던 조선 성리학과는 정반대의 구도로) 복권시켰다. 청조 중국에서 목도한 정교하고 세련된 물질문화를 문명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의 하나로 승격시킨 그들은 그 자체 내에 스스로를 개선할 잠재력이 없는 조선 사회의 개혁을 위해 강력한 국가의 존재를 요청했으며, 이 국가의 주도 하에 청조 중국의 발전된 기술과 사회 제도를 도입하고 사회에 확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홍대용과 북학론자들에게서 드러나는 이상의 새로운 요소들을 이후 도래할 서구적 근대성의 전조로 볼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직 전근대의 지평 안에 머물러 있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근대와 전근대의 구도는 박제가가 주장한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만큼이나 자의적이고 복잡한 현실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어설픈 분석 도구이다. 하지만 만약 근대와 전근대의 이분법을 벗어나 18세기 말의 상황을 되돌아보게 되면, 현대 한국 사회와의 흥미로운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찾아볼 수 있다.

현대 한국 사회의 흥미로운 연속성과 불연속성

18세기 말에 등장한 새로운 경향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지 못한 요소로는 홍대용의 사례에서 드러나는 양반과 중인 전문가의 수렴 현상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문, 사, 철의 소양을 지닌 양반 학자가 계산과 관측의 전문적 실천을 추구하고, 자신의 과학적 작업을 근거로 조선 사회의 학풍과 문화 전반을 비판한 뒤 그 대안으로 개방적 세계상을 제시한 홍대용에 비견될 만한 사례를 현대 한국 사회에서 아직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그에 비해 연속성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이광수의 글에서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잠재력에 대한 극단적 비관론, 조선의 내재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일제 식민사학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은 박제가의 『북학의』에서 이미 비슷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1960~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강력한 국가 주도의 근대화, 산업화, 과학화 정책의 단서도 『북학의』와 『경세유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20세기 후반 남한의 개발 국가는 적어도 그 기본적 상상력의 차원에서 소비에트나 만주국의 계획경제 모델에 앞서서 조선 후기의 북학론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후반의 역사학들이 북학론을 근대성의 기적적 선구로 칭송했지만, 역사학자들의 그러한 행위 자체가 18세기 후반 조선과 현대 한국 사이의 연결과 계승 관계를 강화한 면이 있다. 기적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18세기 후반과 현대 한국 사이의 가장 중요한 연속성은 바로 홍대용과 박제가의 시기에, 그들의 실천을 통해 선진 사회로의 여행이 한국 엘리트들의 문화적 정체성과 그들의 정치적, 문화적 의제를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박제가에 따르면 조선은 신라의 최치원 이래로 중국의 문화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을 문명화해야 할 나라였다. 따라서 박제가에게 있어서 북학이란 병자호란 이래 그의 시대까지 100여 년 지속된 짧은 비정상적 상황, 즉 조선이 자신을 문명이라고 간주해온 일탈을 바로잡는 일이기도 했다. 

이러한 지향은 물론 18세기 후반 당시에는 소수의 입장이었지만 19세기 말을 거치면서 점차 한국 엘리트의 주된 문화적 지향으로 자리 잡았다. 바뀐 것이라면 조선인 엘리트의 여행 목적지, 따라서 조선 사회 개혁을 위한 문명의 모델이 중국에서 일본과 서구로 달라졌다는 것이다. 

물론 외래의 모델로 자기 사회를 바꾸려는 북학과 서구적 근대화의 지향은 그에 대한 강력한 반작용과 함께 나타났다. 조선 사회의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18세기 말의 채제공과 정조의 반론, 무분별한 서구화를 비판하고 외래의 모델을 ‘우리 사회에 적합하게 토착화해야 한다’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익숙한 지향이 그 사례들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한국사에서 ‘동양적 전근대’와 ‘서구적 근대’의 분기는 생각만큼 근본적이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성찰해야 할 문제도 단순히 서구적 근대성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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