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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성 덕분에 身分 고하를 막론하고 널리 사용했던 다양한 바구니
편리성 덕분에 身分 고하를 막론하고 널리 사용했던 다양한 바구니
  •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평론가
  • 승인 2018.04.30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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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72. 청동바구니모양항아리(靑銅製籃形壺)

바구니는 싸릿대나 고리버들나무가지, 칡넝쿨, 대나무 등을 쪼개어 서로 어긋나게 끼우고 엮어서 만들어 지는데 바닥이 좁지만 속이 깊고 둥근형태의 몸통이 만들어져서 음식물이나 생필품을 담는 여러 용도로 사용돼왔다. 아울러 입구가 좁고 바닥이 넓은 ‘다래끼’나 여인들의 반짇고리, 도시락, 작은 함지 등으로 쓰이기도 했다. 지방에 따라서는 ‘보고니’, ‘보금지’, ‘보구리’, ‘바구리’라고도 부른다.

1527년 간행된 『訓蒙字會』에는 ‘바고니’라고 기록돼있고 1779년에 간행된 『韓漢淸文鑑』에는 ‘바구레’로 기록돼 있으며 19세기 간행된 『林圓經濟志』에는 ‘바군이’로 기록되면서 “한양의 市場을 다니는 사람들은 생선이나 채소를 담는 타원형의 小籠을 가지고 다닌다. 여자들은 왼쪽 겨드랑이에 끼고 남자들은 새끼줄을 달아 가지고 다닌다. 북쪽에는 대나무가 나지 않아 싸리나무껍질을 벗겨서 꼬아 만든다”라고 記述해 당시 전라남도 담양 등 따듯한 남부지방에서는 대나무로 만들었으며 일상생활에 널리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1 다호리유적출토대바구니
사진 1 다호리유적출토대바구니

우리나라에서 바구니가 처음으로 사용된 시기는 수렵, 어로, 농경생활의 신석기시대부터로 추정되지만 현존하는 유물이 남아있지 않아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실제 유물은 古朝鮮 滅亡을 전후한 三國時代 初期 바구니로 창원 다호리고분(1호무덤)에서 출토된 대바구니가 제일 오래된 유물로 전해진다(사진1).

창원 다호리 고분(1호 무덤)에서 출토된 대바구니는 크기가 가로 55cm, 세로 65cm, 높이 12cm 정도의 장방형으로 무덤의 껴묻거리를 담은 상자로 사용됐는데 이 대바구니에는 옻칠손잡이와 옻칠칼집을 갖춘 靑銅劍과 鐵劍이 담겨있었으며 청동투겁창, 쇠도끼, 붓, 손칼, 청동거울 등 지배계층의 생활상과 내세관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물들도 함께 있었다. 

무덤에는 靑銅器, 鐵器. 漆器, 土器 등이 상당량 출토됐는데 무기류와 농공구류, 생활용품 등 다양한 종류였으며 많은 양의 출토품들을 담았던 대바구니는 身分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 편리성이 인정되어 널리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2 신라 곱돌바구니(국립경주박물관)
사진2 신라 곱돌바구니(국립경주박물관)

평양일대의 낙랑지역 古墳에서는 옻칠한 대바구니(彩畵漆莢)가 출토됐고 삼국시대는 부여 관북리유적의 연못터에서 백제시대의 대바구니가 木簡들과 함께 출토됐으며 국립경주박물관에는 남북국 신라시대 제작된 대바구니모양의 곱돌바구니(사진2)가 전시돼 있다. 

사진3 청동바구니모양항아리(고려시대)
사진3 청동바구니모양항아리(고려시대)
사진4 청동게
사진4 청동게

(사진3)은 대바구니모양의 청동항아리로 고려시대 제작된 유물로는 유일하며 ‘청동바구니모양항아리(靑銅製籃形壺)’이다. 해변이나 강가의 어촌에서 작은 게나 고동, 조개를 잡아 담을 때 사용하는 바구니로 대나무를 엮어서 만든 형태이다. 몸통은 청동으로 鑄造하고 다슬기와 게는 별도로 만들어서 붙였다(사진4). 

 


두툼한 아가리는 둥글게 안쪽으로 말아서 사선으로 음각해 대살을 표현했으며 몸통의 목 부분은 대살이 교차한 부분을 나타내려고 뚫어서 透刻으로 처리했다. 그 아래로는 如意頭文을 한 줄로 陰刻했고 나머지 몸통은 대나무로 엮어진 바구니의 형상으로 彫刻했다(사진5,6). 

사진5 대바구니모양으로 조각한 몸통
사진5 대바구니모양으로 조각한 몸통
사진6 대바구니의 몸통 부분
사진6 대바구니의 몸통 부분

바닥의 굽도 낮고 넓게 만들었는데 아가리와 같이 사선으로 陰刻線을 내어 대살로 엮은 것처럼 했다. 이 청동항아리의 입지름은 9.8cm이고 몸통의 높이는 13.3cm로 작은 꿀 항아리 크기로 아담하고 소담스러우며 어깨부분에 달려있는 고동을 중심으로 대칭이 되어 균형감을 이루고 있다.   

사진7 중국 송 자사주전자(남경박물관)

고려시대 靑磁나 陶器로 만든 항아리 중에 대바구니모양으로 만든 유물은 아직 발견된 사례가 없으나 중국 송나라의 유물에는 紫沙茶器를 대바구니모양으로 만든 사례가 있다(사진7). 황색의 태토로 몸통을 만들고 검은색의 태토로 게와 고동을 만들어 붙인 후에 燔造했고 몸통과 뚜껑꼭지는 엮어진 대나무 모양으로 조각했으며 물대와 손잡이는 대나무로 표현했고 뚜껑은 사선으로 교차하는 대살을 투각했다.  

사진8 옥돌바구니(조선시대)
사진8 옥돌바구니(조선시대)
사진9 옥돌바구니의 바닥면
사진9 옥돌바구니의 바닥면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 옥돌로 만들어진 작은 ‘옥돌바구니모양항아리’에서 고려시대의 전통이 이어진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사진8,9). 

몸통의 지름이 3.5cm로 작은 이 유물은 신라시대의 곱돌바구니(사진2)에는 없던 작은 게를 장식으로 조각했으며 한 덩어리의 옥을 가공해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당시 재질이 옥돌이거나 청동인 경우에는 모두 고급품으로서 상류층의 玩具로 보이며 제작된 사례도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공통적으로 만들어진 대바구니모양의 청동유물이나 옥돌유물, 도자유물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확실한 이유는 아직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조선후기 魚蟹圖에 등장하는 게는 등껍질의 ‘甲’과 과거급제의 ‘甲’이 같은 의미로 사용돼 입신양명의 의미를 상징했으며 물고기처럼 알을 많이 낳기 때문에 多産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사진10 대바구니(조선시대)
사진10 대바구니(조선시대)

고려시대 제작된 이 ‘청동바구니모양항아리’는 몸통의 무게가 무겁고 목 부분이 투각으로 뚫려있어서 음식물을 담아서 사용한 그릇이라 보기는 힘들고 사방탁자나 書卓위에 놓고 즐기는 감상용으로 제작된 것이라 생각된다. 몸통에 靑銅病이 생기기 전에는 금빛처럼 광택이 나서 화려하게 보였을 것이다. 세계적인 고려 상감청자와 함께 풍요롭고 세련된 상류층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금속공예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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