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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뒷골목을 배회한 불량아들 … 東洋의 중력을 창출하다
역사의 뒷골목을 배회한 불량아들 … 東洋의 중력을 창출하다
  • 정여울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연구원
  • 승인 2003.05.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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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 : 『일본문학의 근대와 반근대』(미요시 유키오 지음)외 2

동양적 근대의 창출』(히야마 히사오 지음, 이상 정선태 옮김)
『표상공간의 근대』(이효덕 지음/박성관 옮김, 이상 소명출판 刊)

기차로 표상되는 무한질주의 속도, ‘국민’과 ‘민족’이라는 개념의 절대화, ‘자유연애’라 일컫는 새로운 욕망의 재배치. ‘근대성’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연상되는 ‘강요된 기억’의 파노라마들이다. 루쉰에게 중국근대의 시발을 의미했던 신해혁명은, 근대적 법제나 국가기구의 탄생으로 다가온 것이 아니라, ‘변발을 자를 수 있는 자유’를 의미했다. 루쉰에게 문명 혹은 근대의 아이콘은 ‘책(문자, 개념)’이 아니라 ‘변발’이라는 끈질긴 일상의 습속이었던 것이다. 근대인의 봉상스(통념)를 구성하는 기억의 목록에는 이상하게도 일상과 신체를 옥죄는 구체적 경험의 흔적들보다 추상적 개념의 언표들이 넘쳐난다.

 

근대와 반근대 사이에 놓인 일본적 근대

1백여년 전 조선인들에게도 ‘문명’과 ‘개화’의 가장 강력한 표지는 ‘단발’이라는 신체적 자유 혹은 파천황의 충격과 공포였다. 근대적 국민만들기 프로젝트에 총론적/이성적으로는 동의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머리를 잘라야 하는 순간에는 극단적인 거부반응을 보이는 장면들이 속출했던 것이다. 근대적 신체와 감수성을 무기로 개개인의 이성과 욕망 모두를 완전무장하는 길은 생각처럼 순탄치 않았다. 전일적인 근대의 체험이 다만 속도와 정도의 차이만을 내장한 채 전세계에 관철됐으리라는 통념은 ‘복수의(plural) 근대성의 체험들’ 앞에 이르면 여지없이 부서진다.

‘일본문학의 근대와 반근대’는 일본의 근대를 이해하는 길로서 근대초기 일본 작가들의 좌절과 고뇌를 낱낱이 해부하는 방식을 택한다. 저자는 일본 근대문학의 근대적 지향과 반근대적 지향 사이의 격렬한 정신의 고투를 문학사 밖이 아니라 안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이 책은 타니자키 쥰이치로를 중심으로 일본문학사의 전개를 조감한 뒤, 일본 근대문학사의 ‘반근대 계보’의 형성과정과 그 구체적 질감들을 짚어내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 모리 오가이, 타카무라 코타로 등의 문학 텍스트에 철저히 근거해 ‘문학의 내부’에서 ‘문학의 외부’를 이끌어내는 전략을 취한다.

이 책은 문학사의 외곽으로만 치부되던 ‘문단 측면사’가 오히려 문학의 튼실한 내부를 구성하고 있었음을, 일본작가들의 삶의 궤적을 통해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문학’의 이름으로 ‘문학주의’에 맞서는, 역설적인 ‘문학의 외부’를 구현하고 있다.

‘표상공간의 근대’는 일본의 근대사라는 모델을 통해 근대국가에 보편적으로 강요되는 기억의 메커니즘들이 어떻게 균질화돼가는가를 보여준다. 우리의 기억을 구성하는 강렬한 근대성의 중력을 해부함으로써, 오직 국민국가만을 강조하는 순수하고 균질적인 주체성의 구축 과정을 파헤치고 있다. 표현/표상에 있어 근대적 인식론의 균질화는 서구적 원근법의 도입과 언문일치체의 보편화를 통해 가능해졌다는 점, 나아가 출판과 교육 및 교통공간의 변용을 통해 근대적 매스미디어가 인간의 경험을 균질화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서구적 근대성에 포획되지 않는 독창적 모색

또 하나의 책 ‘동양적 근대의 창출’은 단순히 ‘서구적 근대의 전횡’에 맞서는 ‘동양적 근대의 창출’로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은 코드화된 서구문명의 삶의 방식을 거부하는 ‘근대의 외부’를 끊임없이 모색했던 두 지식인, 루쉰과 소세키의 사상적 고투를 그려내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하이칼라(문명)’와 ‘번쩍이는 안경(이성)’을 자랑하는 ‘근대의 모범생’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들은 동시에 공장의 불빛과 마천루의 스펙터클이 위장하는 ‘근대의 어둠’을 고통스럽게 응시한다. 나아가 근대적 일상의 무한중력을 거스르는 새로운 삶의 속도를, 근대성이 포획할 수 없는 인간 욕망의 지형도를 그들의 작품 안에 새겨 넣었다.

소세키에게 주어진 근대의 풍경은 서구의 침략을 모면한 대가로 주어진, 광기에 가까운 모방문화라는 숙명이었다. 그는 일본의 外發的 근대의 풍경을 온몸으로 거부했다. 그의 저항 방식은 세계에 대한 개념적/분석적 탐구가 아니라 ‘일상적인 너무나 일상적인’ 인연의 세계로의 침잠이었다. 그는 근대적 일상을 구획하는 경계 내부로 철저히 파고듦으로써 오히려 근대성의 경계를 內波하는 문학적 실험을 일군다. 그는 철저한 문학적 글쓰기가 오히려 처절한 철학적 모색을 가능케 하는 층위에 이르렀고, 이것이 소세키를 ‘작가’에 머물게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루쉰은 적는다. 중국의 역사는 ‘노예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시대’와 ‘잠시 안전하게 노예가 될 수 있는 시대’의 순환에 지나지 않는다고. 중국의 역사는 한 마디로 ‘출구 없는 순환’의 반복이었다는, 극한적 자기부정의 선언인 셈이다. 그렇다면 전범을 模寫할 수도, 새것(서구문명)의 매혹에 굴복할 수도 없는 중국인에게 남은 길은 무엇일까. 사실로서의 역사를 순순히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지 않은 역사를 창안해나가는 길뿐이다. 루쉰은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의 경계에서 진동하며 ‘잡문’이라고 밖에 이름 붙일 수 없는, 문학적 장르로 포획할 수 없는 새로운 글쓰기를 실험했다.

루쉰과 소세키는 각자의 자리에서 ‘마치 출구 없는 방에 갇힌 듯 잔혹하기 그지없는 상태’를 견디며 ‘주인’으로서의 근대성과 처절하게 맞섰다. 이 책들을 통해 우리는 근대성의 경계가 구축되는 과정과 근대성에 포섭되지 않는 복수의 근대의 가능성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이들이 제시하는 근대성의 경계는 소름끼치도록 견고하고 위력적이다. 그러나 근대성의 거대한 중력을 거스르는, 반듯하고 재빠른 지름길이 없음에 좌절할 필요는 없다. 루쉰은 담담히 토해낸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위의 길과도 같은 것이다. 본래 땅위에는 길이란 게 없다. 걷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정여울 /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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