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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참한 고독
무참한 고독
  • 김정란 상지대
  • 승인 2003.05.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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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李思
學人으로서의 내 삶은 모순에 가득차 있다. 내가 깊이 천착하고 있는 말들은 확신의 깊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말들과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말들의 간극은 점점 더 멀어진다. TV를 봐도, 라디오를 들어도, 인터넷을 돌아다녀 보아도, 어디에도 내 가슴에 깊이 내려와 고이는 말들은 없다. 무수한 말들, 말들. 나는 이따금 내가 귀머거리이거나 벙어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어쨌든 나는 사람들 앞에 서서 말을 하는 사람이 됐다. 다른 일들이야 어떻게 피할 수 있다고 해도, 적어도 강의는 해야 하는 것이다. 내 말은 사람들의 가슴에 내려앉지 못하고, 한 바퀴 휘돌아 다시 내 귀로 돌아온다. 나는 내 말을 환청처럼 듣는다. 근원적 두려움에 질려있는 바이브레이션. 왜 태어났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이 현실적인 맥락에서 줄창 미끄러지는 비통사적인 말. 나는 그것을 눌러둔다.

자주는 아니지만, 그 모순은 이따금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라온다. 예를 들면 강의실 안에서, 도저히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먹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 그럴 때, 내 의식은 새빨갛게 당황한다. 순간, 나는 아주 기묘한 모욕감 앞에 노출돼 서있다. 내가 사용하고 있는 진지한 모든 말들은 내 앞에 앉아있는 아이들에게는 연예인들의 연애담에 비하면 천 분지 일의 리얼리티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런 무차별적 소비문화적 맥락,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되고 있는 부드러운 상업주의적 전체주의 안에서 대체 학인으로서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이따금 나는 강의실에서 무참한 고독에 사로잡힌다. 

인문학을 가르치는 일은 점점 더 힘들어진다. 분위기는 늘 어수선하고, 학생들은 강의보다도 연예계와 스포츠 소식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휘몰아 버리는 엔터테인먼트 같은 강의를 못할 것도 없다. 학적 자의식을 숨기고, 약간의 연예적 마인드만 가미하면, 학생들을 휘몰아 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세상에 오락거리는 널려있지 않은가. 최소한의 인푸트, 그리고 물량적으로 최대치로 뽑혀져 나오는 아웃푸트. 훌렁훌렁한 인식의 미음. 건더기 없는, 거의 비존재에 가까운, 즉자성 안에 배를 바짝 붙인 맹탕 존재의 멀건 멀국. 그것으로 어떻게 시간을 통과한다는 말인가. 강의실 안에까지 시장의 문화 경제학을 끌어들일 수는 없다. 게다가 그런 방식의 쉬운 접근은 실은 오래 가지도 않는다. 어쨌든 학교는 학교인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상황 안에서, 오히려 더 진정한 인문정신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인문학자에게는 버팅기는 힘이 가장 필요한 때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인간인 바는 게놈 프로젝트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이 인간인 바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열린 것뿐이다. 그것은 바야흐로 아주 새로운 접근방식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힘든 시절인 것 같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문화적 대기는 새로운 인문학의 싹이 트기도 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는 바탕마저 다 휩쓸어버릴 정도로 상업주의적인 문화가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시절이 지나면, 인간은 틀림없이 다시 무거움을 향해 회항하겠지만, 지금 인문학이라는 오디세우스에게 이타카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전통적인 인문학 교육 방식을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대를 읽어내지 못하는 인문학, 시대와 함께 변화하지 못하는 인문학, 문자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이미지 매체가 가지고 있는 지식-쾌락의 통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문학, 탈근대적 통합적 지식체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분리주의적 인문학은 대폭 수정되거나 폐기처분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시대의 요구에 답변하지 않은 인문학자들 자신이 불러온 측면도 적지 않다. 다만, 내가 걱정스러워하는 것은, 이런 식으로 인문학적 정신 자체가 폄하당하는 분위기 안에서는, 새로운 인문학의 싹마저 다 고사해 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종자 씨는 남겨 놓아야 홍수가 지나간 이후에라도 씨를 뿌릴 것 아닌가.

김정란 상지대·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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